출처 - 웃대 삶이무의미함 님 -
하얀 들판위에서 긴 흑발을 흩날리며 은혜가 뛰어다닌다. 한 없이 밝은 미소와 나를 보며 손짓하며 말한다. 들리지 않는다. 다가가고 싶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기울이며 다리에 힘을 주지만 땅은 끈적끈적한 진흙으로 되어 나를 점점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은혜와 나 사이를 갈라 놓기라도 하듯 커다란 진흙이 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끈적하고 축축한 감촉이 너무 낯설다. 살아남고 싶다. 급격히 빨려들어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손을 뻗는다.
“?!”
검은색. 길고 강렬해보이는 털들이 내 손을 완전히 뒤덮었다. 손을 내리고 빨려들어가고 있는 상체를 본다.
“....”
내가 알고 있던 내 모습이 아니다. 이건 마치..
“안녕.”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은혜가 나를 보며 말한다. 손을 뻗어 은혜의 손을 잡고 싶지만 흙과 털로 더럽혀진 내 몸으로는 그럴 수가 없다. 마지막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 은혜는 다른 곳으로 멀리 사라져버린다.
쿵.
허억. 숨을 크게 들이 마신다. 곧 머리에 전해지는 충격에 무의식적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벅벅 문지른다. 그러자 살랑거리며 흩날리는 검은 색의 얇은 털들이 후두둑. 떨어져내린다.
“!!”
손을 뻗어 떨어지는 털들을 잡아 낸다. 하지만 곧 놓친다. 내 손은.. 아니, 내 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마치.. 곰과 비슷한 늑대와 비슷한.. 사람의 손이 아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투명한 유리관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 슬쩍 팔꿈치를 들어 가볍게 두드린다.
쿠웅. 약간의 마찰음만 날뿐 깨질 기미 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시 손과 발, 몸을 훑어본다. 이것이 실험의 결과라는 것인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인가? 쿠웅. 옆쪽에서 들리는 소리. 고개를 돌린다.
“....”
나와 비슷한 공간 속에 있는 검은 생물이 나를 보며 서있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늑대와 곰을 반반 섞어 놓은 듯한 모습.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사람은 저런 송곳니와 붉은 색의 눈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 모습도 역시.. 그 생물은 아니,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존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신입인가?”
놀랍게도 말을 한다. 당연한건가? 전에는 사람이었을테니..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존재는 가늘게 눈을 뜨며 나를 잠깐 관찰하더니 말을이었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군. 대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리고마는데 말이야.”
“..미친다고?”
“그래. 네 상태를 보면 알텐데? 나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당신은 그렇지 않은 쪽에 속하는 것 같군.”
내 말에 그 존재는 씨익 웃었다. 하얗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인다.
“난 복수해야할 놈들이 있거든.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구.”
복수라.. 그게 과연 옳은 일인 것인가.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임을 알지 못하는 건가. 쿵. 다시 유리관을 두드리며 그 존재가 말했다.
“댁은? 사정이라도 있나?”
“딱히 없지만..”
문득 꿈속에서 나를 보며 웃었던 은혜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시 돌아갈수는 있을까. 앞으로의 내 처지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내 말에 그 존재는 나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봐. 지금 이 상태에서 통성명이나 할 때인가? 어떻게하면 여기를 빠져나갈지 궁리나 잘 해두라구.”
“빠져나가면 복수할 겁니까?”
“말이라고하나. 날 강제적으로 이렇게 만든 놈들인데 자네라면 용서할 수 있겠어? 이런 몰골로 어떻게 가족에게 돌아간단 말인가?”
가족.. 그러고보니 꽤 오랜 시간동안 들어보지도, 입 밖에 내뱉지도 못한 단어다. 가족이 있다면..
“....”
“그나저나 대단하군. 그런 상태로 온전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허나, 앞으로 나타날 녀석들을 보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를 거야.”
“싫어합니까?”
그 존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보다는 더 원초적인 것이지. 두고 보면 알게 된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몸을 이리저리 훑어 본다. 더듬거리며 얼굴의 형태를 대강 생각한다. 입을 벌려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송곳니들을 가볍게 두드린다.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다. 이런 몰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 왜 이러는 것일까. 태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정도로 심신이 강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마음이 굳어져버린 것일까.
쿵. 쿠궁. 다른 쪽에서 유리관을 두드리며 나를 노려보는 존재가 보인다. 송곳니 사이로 흐르는 침을 뿌려가며 나에게 적의를 보이는 존재다. 가만히 바라보자 더 발광을하며 괴성을 질러댄다.
“크아아!”
사람이 것이 아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무시해.”
“나를 싫어하는 겁니까?”
“아니, 배고픈거야.”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좁은 곳에 가둬두는 것도 모자라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건 실험자로서 부당한 대우가 아닌가? 이런 몰골이라고 해서 완전히 버려두는 것인가?
“이해가..”
“안되지. 하지만 두고 봐. 자네 같이 순수해보이는 ‘괴물’이 급변할 때는 더 무서운 법이지.”
“..괴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존재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 몸에 있는 털들을 고르며 말했다.
“이런 형태의 사람을 본적이 있나?”
“....”
“괴물의 모습이야. 이런 꼴로 거리를 활보한다고 생각해 봐. 어느 누가 반겨주겠나. 아, 아니지. 아마 자네는 그러지 못할거야.”
“예?”
“다..”
그 존재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곧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5명의 사람들이 유리관 너머로 보인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유리관 안에 있는 생물들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유리관을 거칠게 두드려댔다.
사파리.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먹이를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야수의 모습이 딱 그 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리관 속에 있는 생물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바쁘게 이동했다. 그리고 다른 유리관 앞에 서서 이런저런 작업들을 하기 시작했다.
“뭐하는거지?”
내 옆의 존재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도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매를 모아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여러 버튼을 누르며 조작하는 사람들과 유리관 앞에서 들뜬 표정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2~3분 가량이 지난 후 서로 상의를 한 사람들은 유리관을 옆으로 열더니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저 안에 놈은 변하지 않은 건가?”
“....”
언뜻 보이는 검은 색의 흑발. 흰색의 피부. 사람들은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어 다른 사람 등에 업히게 한 후 이동하기 시작한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지는 사람들과 등에 업힌 ‘그것’
“뭐야.”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존재. 하지만 난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은혜. 은혜가 등에 업힌 채 지나가고 있다. 나가고 싶다. 은혜를 데리고 이곳에서 완전히 나가고 싶다. 양손을 크게 휘둘러 유리관을 강하게 가격한다. 콰앙. 크게 요동치는 유리관. 깨지지 않는다.
“어이 그만해. 저놈들 자극해봤자 좋은 거 없어.”
콰앙. 쾅. 콰광. 거칠게 유리관을 두드리며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양 손이 슬슬 저며온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차 커진다. 작은 소란을 일으키면 걸음을 멈추고 내 얘기를 들어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띵-동. 곧 들려오는 엘리베이터 소리. 은혜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리도 무능한 존재였었나.
“중요한 사람인가?”“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사람입니다.”
“지키고 싶은가?”
“예.”
그 존재는 유리관에 몸을 바싹 밀착시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와 통하는 구석이 있군. 자네의 힘 정도면 쓸만할지도 몰라.”
붉은 두 눈이 빛나며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지난 생김새다. 나도 저 존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 한 켠이 찝찝한 것인가. 그저 말 없이 저 존재를 바라본다. 그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퍼진다. 쿠궁. 쿠구궁. 소리에 흥분한 유리관 속에 다른 생물들이 거칠게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