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연구의 의의(意義)
⑴ 북한 사회주의와 항일무장투쟁
1930년대의 공산주의 운동을 논할 때 우리는 흔히 이 운동의 주류를 당시 국내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던 몇 가지 운동들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이나 혁명적 농(農)·노조운동(勞組運動) 등에서 공산주의운동(共産主義運動)의 주류를 찾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의 역사적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1930년대와 1940년대 초기(해방 직전)까지의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 나아가서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흐름을 제대로 논하려면 무엇보다도 만주와 조선 북부지방에서 전개되었던 항일무장투쟁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국토를 강점당하고 국가의 주권을 유린당한 식민지 민중에게 있어 주권을 찾기 위한 저항의 최고 형태는 ‘무장투쟁(武裝鬪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오늘날 북한은 8·15해방 후 그들이 이룩한 인민정권의 건설과 개혁의 추진이 “항일혁명투쟁시기에 내놓은 인민정권건설노선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지도층의 핵심을 이루어온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 출신 인물들이 겪은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수많은 항일유격대 출신 인물들이 자신들의 전투 경험을 회상기 형식으로 발간해낸『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1권~12권,『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1권~4권 등이 담긴 학습교재로서 수십년 동안이나 광범하게 읽히고 있다. 그 결과 “생산도, 학습도 항일유격대식으로!”아는 구호가 오늘날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채 북한 주민들의 생활 속에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 또한 해방 이후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항일유격대 출신 인물들이 북한 지도층의 중핵을 이루어왔으며 최근에 와서는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서 이른바 ‘항일혁명투쟁 전통’의 사상적·혈통적 계승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북한 사회에서 유일 사상으로 자리를 잡은 주체사상(主體思想) 역시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을 빼놓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 문헌들에 나타나는 입장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북한 사회는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던 지도자들을 매개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해방 이후 북한 사회의 건설과 밀접히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논리대로라면 해방 후 혁명건설과정을 이끌어온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항일무장투쟁시기는 이른바 ‘혁명전통’의 근원이며 북한 사회주의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
물론 북한 지도층이 주장하는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란 앞의 서술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항일무장투쟁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유격전근거지에서의 개혁들, 조국광복회 활동 그리고 항일무장투쟁 전기간에 걸쳐 견지되었던 반일민족통일전선에서 얻은 경험들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의 주장과는 달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층의 총체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경험’은 고사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사실조차도 강력히 부인하는 흐름이 또 한편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의 흐름이 지금까지 남한 사회에서 북한 연구의 주류를 이루어왔다. 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기술에서도 이러한 부정의 원칙이 철저히 관철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얘컨대 국내의 대표적인 국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기백(李基白)의『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이나 한우근(韓優劤)의『한국통사(韓國通史)』등에는 1930년 이후 만주에서 전개되었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고《한국민중사(韓國民衆史)Ⅱ》의 경우도 겨우 2, 3쪽을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북한 사회과학원의《조선전사(朝鮮全史)》는 전 33권 중 7권(제16권~제22권)을 여기에 할애하고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가? 만약 이 물음에 대해서 누군가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미결상태로 남아 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북한 역사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의 초기 정통성 문제’, ‘올바른 민족해방운동사의 정립 문제’, ‘주체사상의 역사적 문제’ 등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한 문제들을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물론 이 글이 이러한 거대한 작업을 완전무결하게 해낼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규명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미숙하게나마 초보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뿐이다.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명을 위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아직까지도 끊임없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궤적을 실증적으로 규명해보겠다.
둘째, 위의 사실에 기초하여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유격전근거지에서의 개혁, 조국광복회 활동 등)을 고찰해보겠다.
셋째, 항일무장투쟁의 경험들이 해방 직후 북한 사회에서 진행된 ‘인민정권의 수립과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다.
⑵ 항일무장투쟁과 동만(東滿;간도지방)
이 글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층의 무장투쟁, 유격전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의 조직과 활동, 반일민족통일전선(反日民族統一戰線)의 전개 등 이른바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시간적 범위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항일투쟁이 본격화되는 1931년 말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의 기간으로 한다. 단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직후 북한의 인민정권수립과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 1945년 8월 15일에서 1947년 2월까지의 기간에 대한 부분적인 검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항일무장투쟁의 활동배경으로 삼았던 동만(東滿)과 장백현(長白縣)을 중심으로 한 남만(南滿)에 한정한다. 특히 이 연구의 중심적 공간범위가 될 동만과 장백지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조선민족해방운동과 깉은 연관을 갖고 있다.
첫째, 연길현(延吉縣)·화룡현(和龍縣)·왕청현(王淸縣)·훈춘현(琿春縣) 등의 지역에는 인구구성상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인 인구가 중국인보다 다섯 배 이상의 규모를 보이는 절대적 우세의 당연한 결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유격대의 성원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따라서 1934년 3월에 이 비장에 근간을 두고 조직되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수차례 조직형태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둘째, 간도지방과 장백현은 각각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를 끼고 지리적으로 조선과 인접해 있다. 비록 만주 땅이기는 하나 이 지방의 경제·문화적 사회관계는 거의 조선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1933년도 간도지방의 나라별 무역액을 살펴보면 조선과의 무역이 전체 수출의 약 99.6퍼센트, 전체 수입액의 67.2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일본 본토와의 무역은 전체 수출의 0.4퍼센트, 전체 수입액의 33.3퍼센트에 불과할 정도로 이 지방은 사회경제적으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셋째,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사회적 관계의 열악성으로 말미암아 농민이 절대 다수인 이 지역의 조선인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민족적·계급적 각성이 높은 수준에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이미 1910년대부터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해외무력활동의 근거지 역할을 해왔다.
넷째, 장백현의 경우 1936년 5월 5일 창건되어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국광복회의 만주 쪽 근거지였다. 장백현의 최남단인 압록강 상류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조선인 부락들이 조국광복회의 최초 조직작업의 대상지였으며, 조국광복회를 주도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제6사단의 병력충원의 주요 공급지였다. 참고로 당시 장백현 일대에서 조국광복회 조직을 통해 6사단에 입대한 사람 가운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김용연(1937년 여름 입대, 현 군상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김성국(1936년 가을 입대, 전 UN주재 대사, 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전문욱(1937년 4월 입대, 현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 군상장)·조명선(1937년 여름 입대. 현 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두익(현 노동당 군사위원, 군대장) 등이 있다.
이상의 조건을 갖춘 동만(간도)지방은 1931년 9월 18일에 발발한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조선인의 자치문제와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소속이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놓고 중국공산당과 끊임없이 내연시켜온 갈등의 발원지였다. 이러한 갈등의 내연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조국광복회가 창건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조선인들의 사회적 관계의 열악성, 일제의 집요한 민족내부분열공작,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중국인들의 민족배타주의 등은 항상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문제를 생각하게 했으며 그때마다 동만의 조선민족이 그들의 사고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줄곧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항전해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동만지방은 비록 일국일당주의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투쟁하고 있으나 그들의 투쟁이 곧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정신적 결의를 다지는 확실한 물적 담보물이었던 것이다.
⑶ 분석관점과 자료의 문제
이 글은 특정한 이론적 자원을 동원한 분석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파악과 연대기적 서술에 중점을 두면서 전개될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 운동은 어느 상황에서나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에 유념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투 중심의 단순한 무력항쟁이 아닌 통일전선을 꾸려나가고 유격전근거지에서 개혁을 실시하는 ‘정권건설’의 측면을 보다 중요하게 부각시키는 이른바 ‘총체적인 조망’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북한 사회주의의 자기발전과정(이 속에 보편적 발전 메카니즘과 그 특수성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필수적인 연구방법이라고 본다.
자료활용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일제 관헌자료와 북한의 공식 간행물들, 그리고 중국에서 간행된 출판물들을 1차 사료로 이용하고, 국내외의 각종 논문과 단행본들을 2차 사료로 참고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활용할 1차 사료의 종류별 장단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제 관헌자료
이 자료들은 당시 만주지방과 조선의 지배자였던 일제가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 출판한 것들로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는다. 첫째, 사건의 경우 피검자들이 죄를 덜기 위하여 사실을 위장 진술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둘째, 이 자료들에는 당시 항일유격대 토벌에 나섰던 일본인들과 유격대에서 흘린 거짓 정보가 걸러지지 않고 사실과 혼재되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일제 관헌자료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중국의 문헌들과 비교·검토하고 이 자료들을 정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② 북한의 공식 간행물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벌인 항일무장투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무장투쟁의 주체였던 북한의 간행물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의 문헌들이 시기마다 항일무장투쟁의 내용을 조금씩 달리 기술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의 문헌들이 ‘사대’와 ‘파벌’로 얼룩졌던 과거와 단절하면서 ‘자주성’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해석해온 데 기인한다. 이러한 역사의 재해석은 결과적으로 북한 문헌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며 초기 간행물들과 최근 간행물들 사이에 나타나는 일부 내용과 문구의 차이들은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하는 국내외 연구자들의 좋은 표적이 되어왔다. 따라서 북한의 문헌들을 참고할 때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대한 초기 문헌에서부터 최근의 문헌까지 비교해가면서 검토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북한 문헌들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사실에 대한 ‘과대포장’은 빈번하게 있어도 근본적인 ‘허위 날조’는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북한 문헌들과 북한 문헌의 허위를 주장하는 연구자들 사이에 쟁점이 되는 역사적 사실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그 사실 여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해석의 문제(=사관의 차이)인 것들이 더 많다.
이 문제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1934년 3월에 창건되었다고 북한 사회과학원이 주장하는 조선인민혁명군(朝鮮人民革命軍) 문제를 들 수 있다. 1934년 3월 중국공산당 동만특위(朝鮮共産黨東滿特委)가 동만(東滿) 각 현의 항일유격대를 통일적으로 편성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 독립사단을 창건한 것은 일제 관헌자료뿐만 아니라 모든 중국 문헌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북한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공식 역사서에서는《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부터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 부르고 있다. 임춘추의 회상기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당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동만반일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개편된 것으로서 그 구성이 전부 조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조선인민혁명군 혹은 조선홍군 등으로 불렀다. 우리는 그 후 동북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에 나와서 활동할 때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정식 경희대학교 석좌교수와 로버트 A. 스칼라피노 캘리포니아대학교 명예교수는 그 구성이 전부 조선 사람으로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춘추의 허위기술이라기보다는 착오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임춘추는 같은 책 다른 부분에서는 이 부대가 조선과 중국 두 인민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인민혁명군론’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예컨대 1964년판인『조선로동당력사교재』에는 인민혁명군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1968년판 백봉의 책에도 1936년 2월 남호두회의 이후 조선 북부 국경지대로 진출하면서부터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게 하였다고 기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936년 이전의 조선인민혁명군 명칭의 사용을 간접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1934년 3월의 조선인민혁명군 창설론은 정착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4년 3월에 동만에서 창설된 것은 분명히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었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은 결코 이 부대를 창설할 수 있는 최고 지도자도 아니었다(김일성은 주요 간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제2군 독립사단 3단 정치위원이 된 것은 1934년 9월부터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였다는 것은 명백히 사실의 왜곡이다. 그러나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날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부대는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지도 아래 조직되었고, 공식 명칭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었음에 틀림없으나 근본적으로 조선인이 절대 다수인 간도 땅에서 절대 다수의 조선인 성원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에 의해서 구성된 인민혁명군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1936년 2월 남호두회의 이후 제2군내 조선인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조선해방이 그들의 제일의 목표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임춘추의 설명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즉 북한이 조선인 중심의 이른바 주체적인 항일무장투쟁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의 창건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사실왜곡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해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③ 중국 문헌들
1980년대 중국의 역사학 르네상스는 동북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서적들을 출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비록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주체사관의 입장에서 부정하는 북한 측의 공식 견해를 배려해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거의 관철되고 있으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무장투쟁의 궤적을 그려보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 문헌들은 일제의 관헌자료를 이용함과 아울러 항일무장투쟁 참전자들의 증언과 당문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 문헌들이야말로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북한 문헌들의 주장과 일제관헌자료 사이의 불일치성, 국내의 김일성 비판자들의 주장의 진위 여부를 가려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객관성 유지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헌들은 기본적으로 동북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중국공산당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즉 중국 문헌들은 동만에서의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을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중국 문헌들에서는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중국 문헌들 역시 일본 문헌들과의 비교·검토 속에서 다루어져야지 그 자체로서 자기완결성을 갖는 완전한 자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비교·검토하고 나서 필자는 당시 만주상황에서 중요한 변수들, 즉 중국공산당의 만주정책, 코민테른의 대만주관계, 특히 간도문제에 대한 관심, 만주국의 성립과 관동군의 증강 추이, 소련의 대항일유격대 관계 등의 객관적 조건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을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요컨대 이 글에서 택할 분석방법이란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벗어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각종 1차 사료들을 정확하게 비교·검토하되 단순한 문헌 중심의 해석에서 벗어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결합하여 분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⑴ 시각문제
우리가 북한 사회를 올라보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 사회의 자기발전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와는 분명히 다른 북한 사회주의의 독자적인 자기발전과정을 보편성과 특수성의 동시적 고려 속에서 살펴보려는 시도야말로 과학적 북한 연구의 전제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한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북한 연구의 시각은 대부분 이러한 과학성을 담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북한 연구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대별해볼 수 있다. 먼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선입관을 가지고 북한을 인식하는 연구시각을 들 수 있다. ‘김일성 괴뢰집단’, ‘피의 숙청을 통한 정권의 유지’, ‘혹독한 감시체제’, ‘광적인 개인숭배의 강요’ 등을 통해 북한 사회를 보려는 이러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 남한 사회의 관변연구계를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에게 있어서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젊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은 기껏해야 ‘습격’, ‘약탈’, ‘주민 납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은 종종 연구자로 하여금 사실마저도 외면하게 하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기존의 국내 연구서들 가운데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김준엽·김창순 공저『한국공산주의운동사』5권에서조차도 이러한 실수는 쉽게 발견된다. 이 책은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 조직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6사단장 김일성을 중심으로 움직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긴 일제의 관헌자료들을 몇 차례 인용하면서도 끝내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주도했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1952년 4월 15일자『로동신문』전 4면에 걸쳐 실린「김일성 장군의 략전」을 북한 최초의 공식 전기로 보면서 이 전기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중 일부를 변조시켰다고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김일성 장군의 략전」이 조국광복회를 자주적인 민족혁명운동단체였던 것처럼 꾸미기 위해 10대 강령 제2항을 변조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은 변조된 강령 제2항의 내용으로 엉뚱하게 10대 강령 제3항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당시『로동신문』을 찾아본 결과 1952년 4월 15일자『로동신문』은 결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변조해놓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김일성 생일 40주년 기념특집으로 게재된「김일성 장군의 략전」에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중 항일혁명투쟁의 성공 후 ‘중국 영토 내(구체적으로는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의 실현’을 천명한 제2항을 제외한 9개 항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 제2항을 다른 내용으로 변조시켜놓은 것은 아니다. 이 전기에서 조국광복회 강령을 소개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 장군이 30년대의 우리나라의 현실에 있어서 경제적·정치적 및 무장적 투쟁을 어떻게 결부시켰으며 인민 각계 각층의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빨찌산 투쟁을 광범한 인민대중 속에 어떻게 뿌리작았으며 우리나라의 장래전망과 지향을 어떻게 천명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하여서는 그가 작성한 조국광복회 강령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국광복회의 강령에는 “조선 민족의 총동원으로……(인용자가 생략한 내용은 제2항을 제외한 9개의 조국광복회 강령)……친선을 유지할 것” 등 기본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이 인용문을 보면 우리는 이 전기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중 제2항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으 곧 강령 제2항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지 글의 전후 맥락상 필요하지 않은 항복을 뺀 것에 불과하다. 사실 북한의 문헌들은『한국공산주의운동사』5권에서 제시하고 있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제2항을 포함한 모든 내용이 기본적으로 같은 10대 강령을 1946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제시해왔다. 굳이 이 전기에서만 제2항을 변조시키거나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서술을 지난 10여년 동안이나 고치지 않고 고집해온 이 책은 항일무장투쟁사(抗日武裝鬪爭史)에서 김일성의 역할을 왜소화시키기 위해 조선 해방을 위해 조선인들이 만든 항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를 전적으로 일제의 관헌자료에 의거하여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만특위의 지시에 의한” 비주체적인 조직이었음을 강변하고 있다. 요컨대 김준엽·김창순 공저『한국공산주의운동사』5권은 김일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1930년대 후반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광범하게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의의마저도 왜소화시키는 이른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했다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시각 자체가 역사적 사실마저도 왜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기존의 북한 연구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시각으로는 기본적으로 반공적 편향을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하나 어느 정도 북한 사회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연구시각이 있다. 주로 미국에서 북한을 연구한 국내외 한국인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시각은 반공적 시각에 비하면 훨씬 객관적인 면을 가진다. 이들은 자료 해석에서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무장투쟁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해방 직후에 있어서도 대체로 소련의 지배력과 함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도층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씌어진 저서로서 가장 선구적인 것은 이정식 경희대학교 석좌교수와 로버트 A. 스칼라피노 캘리포니아대학교 명예교수가 공동저술한『한국공산주의운동사』1·2·3권과 청계연구소에서 1989년에 발간된 서대숙 저술『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을 들 수 있다. 이 책들은 풍부한 자료의 인용과 비교적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서 이전의 연구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수작들이다. 특히『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경우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풍부한 자료들을 활용하여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해서 돋보이는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북한 연구를 진일보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대숙 하와이대학교 부교수는 이 책에서 광범한 자료를 인용하여 우리 남한 사회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가짜 김일성론’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현재의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장과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약했던 진짜 김일성임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은 이러한 연구시각은 기본적으로 지본주의 체제의 운동법칙과 인식들을 가지고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바라봄으로써 중대한 한계를 안고 있다. 즉, 이 책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를 분파투쟁에 중점을 두고 관찰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시기 유격전근거지에서 이루어진 개혁이나 반일민족통일전선의 전개과정 등 핵심적인 요소들을 간과했으며, 해방 후 북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 관련된 기술에서도 민주개혁(1946년 2월~47년 2월), 사회주의적 개조(1947년~1958년),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6·25 남북전쟁 이후) 등 북한 사회주의 발전의 중심적인 주제들을 경시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또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무장투쟁이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조·만 국경 부근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도 대체로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들은 몇 가지 중요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회의 발전과정을 토대와 상부구조의 연관성 속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단순히 상부구조 중심으로 관찰함으로써 결국 대중운동과 함께 성장해온 북한 사회의 참모습을 밝히는 데는 크게 미흡했다고 볼 수 있다.
⑵ 자료 활용의 문제……‘가짜 김일성론’과 ‘피의 숙청론’ 검토
북한 정치사 연구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편협하고 부정적인 시각은 자료 활용에서도 대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자료만을 자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시각의 문제와 더불어 자료 활용의 문제라는 이중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 오류의 대표적인 산물로는 이명영 성균관대학교 교수의 저서들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이 교수의 대표적 주장인 ‘가짜 김일성론’의 허수겅을 살펴보자.
“《김일성열전(金日成列傳)》은 중국공산당 유격대장 김일성과 북한 주석 김일성과의 동일인 여부를 캐는 것을 핵심과제로 삼았으며 동일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이 책 출판 10년 뒤의 이 교소의 자신감 넘친 진술에서도 보이듯《김일성열전》은 근본적으로 ‘가짜 김일성론’을 고증하기 위해서 씌어졌다. 또한《재만한인 공산주의운동 연구》는 ‘가짜 김일성론’을 전체 재만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공간 속에서 입증해보기 위하여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들에서 이 교수는 방대한 일제의 관헌자료들을 중심으로 북한의 현재 주석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시기에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단장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도 지낸 일이 없는 ‘가짜 김일성’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가짜 김일성론’을 증명하기 위하여 제시했던 일제의 관헌자료와는 달리 중국 문헌을 보면 후기 형식으로 김일성의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의 김일성 언급부분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항일연군 제2군의 항일투쟁도 다른 항연부대와 마찬가지로 조선공산주의자와 혁명가의 국제주의적인 지원을 얻었다. 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을 대표로 하는 많은 조선족 동지들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항일투쟁에 참가하여 제2군의 건립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조선족 동지들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몇 차례 압록강을 건너 조국 땅에서도 적을 습격하였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전투는 조선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의 위대한 역량을 보여주면서 일본 식민지 통치하의 조선 인민에게 광명과 희망을 주었다. ……예를 들면 항일연군 1로군 부사령관 겸 2로군 정치위원 위증민이 위장병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그를 보고 마음을 놓지 못한 김일성은 부하에게 지시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위증민을 위하여 밀영을 만들고 약품을 구입하고 영양 상태를 개선하도록 하였다. 어느 해는 설이 가까워오자 위증민이 김일성을 초청하여 함께 설을 쇨 준비를 하였다. 그는 전사에게 지시하여 통조림깡통으로 만든 재래식 국수기계를 이용하여 냉면을 만들고 김일성 등 조선족 동지를 초대하였다. 김일성은 위증민의 병세가 위급함을 알고 그에게 휴식을 권유하고 경호원에게도 위증민을 쉬게 하도록 지시하였다. 후에 김일성이 눈 속을 행군하다가 동상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증민은 매우 걱정하여 시간을 짜내어 몸소 김일성을 방문하였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최근의 중국 문헌에서는 이미 사망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북한 지도자들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1988년 6월 발간된『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에는 이전의 중국 문헌에서는 언급이 없던 최현(崔賢)·오백룡(白吳龍)·임춘추(林春秋) 등 1980년대 사망한 북한 고위층 지도자들의 직위나 활동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설령 이 교수의 주장대로 중국 문헌에 김일성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 현재의 김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이 교수가 고증한 1·2대 김일성도 중국 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그의 공들인 연구성과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학문적 성과마저도 포기할 수 잇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편향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김일성 행명론(行名論)’의 논리적 무모성도 심각하다.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이나 최현이 죽었을 때 그들의 이름을 따서 제2대 김일성, 제2대 최현이 출현했다고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커다란 하나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항일무장투쟁기간 중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인 지도자들 중에도 김일성이나 최현에 버금가는 지도자들이 무수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단 참모장이었던 이홍광(李紅光)이나 중국공산당 남만성위 조직부장을 지낸 이동광(李東光) 같은 뛰어난 조선인 지도자들이 전사했을 때, 그들의 이름을 따서 제2의 이홍광, 제2의 이동광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문헌에서도 항일무장투쟁기간 중 수많은 명망 있는 중국인 지도자들이 죽어갔지만 어디에도 죽은 이의 이름을 딴 제2의 인물이 출현해서 죽은 이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유독 김일성과 최현만이 죽어서도 그들을 대신할 제2의 김일성, 제2의 최현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현재의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많은 증언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북환에서는 1956년 절정에 달했던 ‘반종파 투쟁’ 이후 본격화된 이른바 ‘항일혁명전통’ 강조의 일환으로 1959년부터『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포함한 수많은 항일유격대원들의 회상기를 발간해왔다.이 회상기 저술에 참여한 인물들만 1백여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항일무장투쟁기간 중(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시절 포함) 김일성과 생활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일제관헌자료나 최근 발간되고 있는 중국 문헌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이들의 회상기가 자료가치가 충분한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단 김일성 관련부분은 약간의 과장이 섞였다고 본다). 특히 최근 남한을 방문한 항일무장투쟁 시절의 여전사 중국 교포 이민의 증언(그녀는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에서 3년간 함께 생활했다)이나 1950년대 북한에서의 반김일성운동(反金日成運動)의 주역 중의 하나였던 이상조의 원한 맺힌 증언을 듣는 가운데 함께 증언한 한막스와 이문일(전 노동당 중앙위원)의 진술내용에서도 우리는 현재의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명영 교수의 실패는 허위정보로 가득 찬 일제관헌자료를 맹신한 데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교 교수의 지적대로 그의 책들은 “그 당시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김일성 부대가 흘린 거짓 정보에 얼마나 현혹되어 있었는가를 전해주는 자료로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시중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는 ‘가짜 김일성론’의 생성 배경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짜 김일성론이 제기되는 초창기인 1946년 4월 8·9일자『해방일보』에「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이라는 제하의 2회 연속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해명이 충분하리라고 본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을 요약해보기로 하겠다.
이 글의 필자 권용호는 김일성에 대해서 가짜니 2세니 하는 등 횡설수설의 풍성과 억측이 나도는 이유는 첫째 그렇게 유명한 장군이 나이가 어리다는 데서 나온 평범한 해석이며, 둘째 친일파·반역분자들이 진보적 민주주의 진영에 일대 타격을 주기 위한 좋은 재료로 선전하는 야비한 의도로 보고 있다. “필자가 만주에 있을 때 김일성 장군의 부대가 일본군을 보기 좋게 격파했다는 기사가 수없이 신문에 특호활자로 기재되었다. 장군의 이름과 연령이 씌어 있는데 공교롭게 나이가 필자와 연갑(年甲)인 까닭으로 언제든지 장군의 기억이 새로웠다”고 김일성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는 조선내에서 ‘김일성 장군’을 잘못 해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먼저 “김일성 장군이 국외인 만주에서 활동했기 때문으로 동만 동포들은 대개 그의 연소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50여세니 2세니 하는 말은 전혀 없었으나” 조선내에서는 “조선 재래의 관습에 따라 연장자는 무엇이든지 안다는 우월감이 장군을 잘못 해석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의 정치인들의 나이가 대부분 60·70세인 까닭에 김일성 장군도 노년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정확한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채 거의 중상모략으로 일관하면서 씌어진 임은(林隱)의 저서『북조선왕조 성립 비사(北朝鮮王朝成立秘史)』(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를 검토해보자. ‘피의 숙청을 통해 권좌에 오른 김일성’의 권력장악과정을 그린 이 책은 객관적인 자료의 뒷받침 없이 목적의식적인 자의성을 가지고 쓴 대표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특히 김일성의 정적 숙청과정은 가히 김일성을 살인마로 연상시키는 데 충분할 만큼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은 김일성이 권력장악을 위해 자행한 피의 숙청이란 ‘사형이나 지방으로 유형 후에 처형하는 것과 같은 궁극적인 죽음’이라고 소개하면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무수한 인사들(여기에는 김일성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그의 동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을 열거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금까지 북한 사회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던 사람들 중에 자연사(自然死)한 사람은 지극히 행운아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이 책은 ‘김일성의 광기 어린 피의 숙청’을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은 북한사회에서 요직에 있다가 장기간 활동 상황이 포착되지 않은 인물들은 예외 없이 피의 숙청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에서 발간된 북한관계 인명사전들은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의 허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인명사전들은 임은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고 수차례 강조한 최광(崔光)·최용진(崔勇進)·이영호(李永浩) 등이 멀쩡하게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최광은 1981년 3월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1988년 2월에는 25년만에 인민군 총참모장에 재기용되었다. 최용진도 1980년 10월에 열린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책에서 임은은 1948년 국방경비대 육군 소령으로 월북했던 강태무가 학살되었다고 단언했으나 그도 1981년 10월 양강도 행정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공직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소개하면서 김일성에게 박해를 받고 망명한 조선인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임은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그의 본명이 1947년 북조선 광산노동자 직업동맹의 책임자였으며 현재 소련에 살고 있는 허진(許進)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와다 교수는 확증할 수는 없지만 그가 소련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몇 가지 논리를 대고 있다. 즉 “미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나돌고 있는 한글로 된 육필 원고의 사본을 보면 표지에 임은의 인장과 허진의 인장이 찍혀 있으며, 원고용지는 일본제이고 쓰인 한자는 현대 중국의 약식 한자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임은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은 단순히 이러한 원고지나 그 필체의 종류에서만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조선혁명가라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가 썼다고 보기 어려운 문구들이 책의 중간중간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변증법은 사회의 사물이 서로 상반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남과 북으로, 양과 음으로, 민주와 독재로 남북한은 서로 다른 조류를 타고 흐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문구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임은이 공산주의자라면 이러한 말이 어떠한 의도로 씌어졌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필자는 남한의 북한 사회 연구계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몇몇 책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북한 연구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각과 자료 활용상의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허위날조’와 ‘과대포장’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 남한 사회의 북한 연구자 가운데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대한 북한의 역사기술이 정확한 고증에 바탕을 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최소한 과대포장은 인정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과대포장은 있는 사실에 대한 역사해석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결코 없는 역사의 날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남한 사회의 북한 사회 연구계에 잠복해 있는 허위날조와 과대포장 주장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논의를 통해 해소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구호로는 진상이 밝혀질 수 없으며 오직 올바른 시각과 정확하고 풍부한 자료의 활용이 결합되어 도출한 결론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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