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 오산학교에서 묵언의 강연
육로를 통해 청도로 가기로 한 단재는 북향 길에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찾았다. 이 학교는 1907년 신민회(新民會)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독립운동의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평북 정주에 세운 학교였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이 교장을 맡고 여준(呂準)·윤기섭(尹琦燮)·유영모(柳永模)·이광수(李光洙)·김억(金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의 신교육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단재는 신민회의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여준의 안내로 오산학교를 방문하였다. 여준은 단재보다 14, 5년 연상으로 서울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무렵부터 친밀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설립자 남강은 열다섯 살 연상의 선배로서 신민회의 평북 총감을 겸하고 있어서 단재와는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관계였다.
이들은 연배로는 장형뻘 되는 대선배들이었지만, 단재의 인품과『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애국 투혼이 넘치는 논설을 쓴 청년 지사를 무척 아껴주었다.
단재가 오산학교에 도착하자 교사와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환영회를 베풀어주었다. 그 무렵 단재는 국내 유일의 반일신문인『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문명(文名)을 날리던 때였으므로 학생들에게는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단재가 오산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교사와 학생들이 단재를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환영식은 여준이 단재의 약력을 소개한 데 이어 이광수가 환영사를 하였다.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오산학교 학생들은 숨소리도 죽여가면서 ‘우국충정(憂國衷情)’어린 단재의 연설을 기다렸다. 이때 단재를 처음 대면한 이광수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단상에 앉은 단재는 하얀 얼굴에 코 밑에 수염이 약간 난 극히 초라한 샌님이었다. 머리는 빡빡 깎고 또 그 머리가 뾰족하게 생겨서 풍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동정에 때 묻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고름도 아무렇게나 매고 섶은 꾸기고 때 묻은 보선에 메투리를 신고 있었으며 오직 비범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아무의 말도 아니 듣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그러한 이상힌 빛을 가진 눈이었다."- 이광수,「탈출 도중의 단재 인상」,『조광』1936년 4월호《개정판 단재 신채호 전집》下, 468~469쪽 재인용.
환영한 학생 노래가 있고, 소개와 약력의 설명이 있고, 극히 그 덕과 공을 찬양하는 환영사가 있고 한 뒤에 주석이 답사를 청할 때에 단재는 의자에 일어나서 그 눈으로 회중(會衆)을 한번 돌아보고는 일언거사(一言擧辭)도 없었다. 그것이 단재적(丹齋的)이었다.
"애국 교사들과 우국 학생들의 환영식장에서 막상 주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형형한 눈빛으로 한 차례 장내를 돌아보는 그것만으로 도(道)가 높은 선승(禪僧)의 인사를 닦은 셈이었다. 감격 속의 답례를 하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말하자면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침묵이었다. 이 침묵은 벼락 치는 천둥소리 이상의 엄청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글로써 말하지 아니했는가? 앞으로 또 글로써 계속해 말하리라. 그는 일부러 말을 아끼는 고사(高士) 내지 선사(禪士)의 자태를 보였다."- 임중빈,『선각자 단재 신채호』고령 신씨 대종약회, 179년(1986년)
단재는 오산학교에서 수십 일 동안 여준의 방에서 머물렀다.
"시당(時堂:여준의 호)은 선생(신채호)보다 14, 5년 연상이어서 선생에게는 반말을 하였으니 퍽 경애하였다고 한다. 두 분이 모두 담배를 즐겨서 방안에는 항상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하고 있는 두 분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에익, 그 원!” 하고 시당이 단재의 어떤 말이 못 마땅히 여기는 뜻을 표하면 “왜 그러시겨오?” 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선생은 연하고 애티 있는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곧잘 이야기를 하였으며 “왜 그러시겨오?”라는 충청도 사투리를 많이 썼다. 그의 용모나 웃음이 여성다웠으나 그의 말 속에는 추상 같은 남성적 기개가 들어 있어, 얘기가 기자(箕子) 같은 조선족 대(對) 한족(漢族) 문제에 미치면 그의 눈은 분기(忿氣)를 품고 음성은 소프라노로 변하였다. 또한 선생은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온통 옷을 버리기가 일쑤였다. 누가 그 이유를 물으니까 “나는 평생에 머리 숙이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오산에 있을 때에도 이 세숫법을 고치지 않았는데 한 번은 시당이 “에익 으응, 그게 무슨 세수하는 법이람. 고개를 좀 숙이면 방바닥에 옷을 안 질르지” 하고 혀를 차는 것을 보고 “그러면 어때요?” 하고 여전히 고개를 뻣뻣이 하고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 발랐다 한다. 그는 결코 누구의 말을 들어서 제 소신을 고치고, 남의 사정이나 감정을 꺼려서 자기 일을 고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김영호,「단재의 생애와 활동」『나라사랑』제3집, 74쪽(1971년)
선배·동지들과 오산에서 수십 일 지낸 단재는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는 망명의 여정에 올랐다. 일본 경찰의 검문검색을 피해 무사히 국경을 넘어 안동에 도착한 단재는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다가 김지간과 함께 다시 기선을 타고 연대를 거쳐 청도에 이르렀다. 청도에는 이미 국내의 신민회 간부들은 물론 블라디보스토크 등 해외에 망명해 있던 지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서 ‘청도회담(靑島會談)’은 중요한 의미를 담는다. 비록 의견의 대립이 있었고, 통일적인 ‘방략(方略)’을 세워서 즉각적인 무장투쟁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더라도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향후 만주와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의 지침이 되었다.
단재보다 한 발 앞서 청도에 도착한 이갑(李甲)·이강(李剛)·유동열(柳東說) 등은 독일의 총독부를 방문하여 잡지 발행의 허가를 신청하고, 독일 선교사를 찾아가 청도 사회에 한국인 망명객들을 소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눈치를 살피던 독일 총독은 기독교 교리 선전을 위한 잡지는 가능하지만 반일 잡지는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럴 즈음에 국내외 각지에서 이미 연통이 된 애국 지사 대부분이 청도에 모여들었다. 청도는 애국 지사들이 상해보다도 먼저 선택한 독립운동의 요지였다.
청도는 중국의 작은 어촌으로 청나라 시기에는 청도구라는 세관이 세워져 정크(중국 수역에서 수천년 동안 널리 사용되어온 범선의 총칭)무력이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중국이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받게 되면서 청도는 그 위치상 중요 전략적 지점으로 부상하였다.
청국은 1880년대 북양함대를 창설할 때 이곳에 해군 보급기지와 요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선교사 피살 사건을 구실로 1897년 무력으로 청도를 점령한 후 중국으로부터 99년간 조차하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청도는 독일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독일식으로 시가지가 건설되고 독일식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진 중국 내의 독일 영지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청도에 모이게 된 것은 독일의 조차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고, 무엇보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국내를 탈출해 오는 애국 지사들이 모두 모이기에 용이한 장소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러시아 등과 동맹관계를 맺고 국제연맹에 가담했을 때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무조건 일본의 적대국인 독일을 도와 대일(對日) 전쟁에 참전하려고도 하였다. 그리고 만주 지역을 개척하여 한국인의 근거지로 하고 이곳 청도를 한국 독립운동의 정치적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던 것 같다.
국제적인 요지 청도에서 열리는 한국인 망명자들의 ‘청도회담’에는 단재를 비롯하여 안창호·유동열·이갑·조성환·박영로 등이 참석하였다. 회담에서는 서북간도와 러시아령 해삼위에 있는 동포를 규합하여 일본에 무력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의견과, 실력이 없는 거사는 동포들의 희생만을 가져오니 서북간도, 해삼위 미주 지역에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거사하자는 주장으로 갈렸다.
단재는 무장투쟁 쪽에 섰다. 국내외 동포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독립운동의 열기가 살아 있을 때에 일제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자는 주장이었다.
여러 날에 걸쳐 논의한 결과 몇 가지 방침이 합의되었다.
"첫째, 이종호(李鍾浩)의 출자금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요청할 수 있을 자금 등을 합하여 만주 길림성 일산현에 농토를 매수하고 토지개간 사업을 한다. 둘째, 동시에 그곳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애국운동의 중심지를 만든다. 셋째, 이러한 계획의 추진을 위하여 군사사관, 일반과 학교사 및 농사전문가를 초빙한다."- 이명화,「청도회담」『독립기념관』, 2004년 5월호.
이 때 단재는 이갑(李甲)·김희선(金羲善)·유동열(柳東說)·김지간 등과 더불어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할 교사로 지명되었다.
청도회담에 참가했던 이강은『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해외에서 어떤 사업을 먼저 착수할 것을 의논함에 있어 중국 길림성 밀산부에 사관학교 설립을 선(先) 착수하기로 결의하고, 교원으로 이갑·김희성·유동열·김지간·신채호 등으로 작정하였으며, 운영자금은 전부 이종호가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 회의의 결과로 청도에 집합되었던 전원이 노령 해삼위를 경유하여 밀산부로 전왕(專往)하게 되었다. 이 회의가 간단한 듯하나 복잡다단하여 1주일 이상을 지연하면서도 일치점에 도달하지 못한 바 있엇다. 이갑의 성의와 열누(熱淚)에 의하여 결국 일치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이강,「회고록」최규홍,『단재 신채호』태극출판사, 207~208쪽 재인용.
청도회담이 끝난 후 단재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로 결정하고 러시아 입국사증을 받고자 상해로 건너갔다. 이강·이갑 등과 함께 상해에 도착한 단재는 러시아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국권이 없는 망명객의 신분으로 러시아의 입국사증을 받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단재 일행은 상해에서 북경의 러시아 영사관을 거쳐 연대(堧臺) 러시아 공사관에 가서야 간신히 입경(入境) 증명서를 얻어서 1개월만에 다시 청도로 돌아왔다. 그동안 일행은 상해 덕화은행에 가서 이용익이 예치한 돈을 알아보았으나 한국인 누군가가 이미 예금을 인출해 갔다고 하여 돈을 찾지 못하였다.
단재 일행은 청도에서 기선 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고, 안창호는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나 베를린,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청도회담을 마친 이들 대부분이 블라디보스토크 행을 택한 것은 그곳에 상당수의 교민들이 신한촌을 건설하고 해외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재는 러시아 입국사증을 받는 과정에서 뼈저린 망국민의 비애를 겪었다. 가지고 있던 노자도 교통비와 비용으로 대부분 사용하였고 무일푼의 처지로 그 해 여름에 러시아어로 ‘동방의 주인’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망명객의 신분으로 러시아에 입국한 것이다. 단재의 길고 험난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