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우한 청소년기와 실패한 초혼
단재가 청소년기를 보낸 1890년대는 국가적으로 정국이 요동치고 민생이 어려운 시기였다. 반면에 개화의 물결이 서서히 밀려들어서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바꾸어 갔다. 단재가 사는 충청도 두메산골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아직 개화의 바람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엄격한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한 단재는 1892년 열두 살 때 뜻밖에도 형 재호의 요절을 겪어야 했다. 여덟 살 연상인 형 재호는 아버지를 잃은 어린 단재에게는 형이면서 보호자이자 학업의 동지로서 의지해 온 유일한 혈육이었다.
재호는 당시 사회의 풍습대로 스무 살 전에 순흥(順興) 안씨(安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어린 딸 향란(香蘭)을 두고 있었다. 재호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사인(死因)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염병이 심하던 시절이라 병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단재에게 형을 잃은 충격은 컸다. 가계(家系)는 집안의 장남이자 기둥인 재호의 사망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형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동생 단재를 무척 아꼈을 터이고, 단재는 형을 무던히 따랐을 것이다. 단재의 내성적이고 외곬에 빠진 듯한 성벽은 어렸을 때 가정생활의 불행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형의 잇단 사망은 가정에 큰 그늘이 드리웠을 것이고, 가뜩이나 민감한 성격의 단재에게 그늘의 음영은 짙게 배었을 것이다.
재호가 사망할 때 남긴 딸 향란을 단재는 친자식처럼 아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조카 딸에 대한 단재의 연민이 극진하여 망명길에 나서면서 동지에게 맡기고, 훗날 혼사 문제로 생명을 건 ‘잠입’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재는 중국 망명지에서 형의 기일을 맞아 한시(漢詩)「가형기일(家兄忌日)」을 지어 혈육의 정을 기렸다.
"아버님 끼친 아들 우리 형제 두 사람
기구한 20년에 달고 쓴 맛 다 겪었네
귀래동 마을에는 우리 자란 삼칸 집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고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 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리 오늘 밤 이역만리 길손되어
하늘가에 홀로 앉아 눈물 흘릴 줄을"
단재는 형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인 1895년 열여섯 살 되던 해, 봉건적인 농촌 풍속에 따라 풍양(豊壤) 조씨(趙氏)를 맞아 성례를 올렸다. 혼례 후에는 당연히 상투를 틀고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단재에게 가정의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었다. 조숙한 소년 유학자에게 촌부(村婦)의 존재는 이상적인 반려가 될 수 없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이 맺어준 여성에게 정을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단재는 어디에서도 첫째 부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른 기록에서도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기 어렵다. 후일 유학자들 사이에서 단재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린 데 대해 비판이 일었다. 당시의 법도에서 어찌할 수 없이 맺어진 부부의 연을 스스로 끊은 것은 유자(儒者)의 도리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 여성과는 14년을 함께 살았다. 1898년 서울에 올라와서 성균관(成均館)에 이어『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다닐 때까지 동거하였다. 정황으로 보아 망명길을 떠나면서 부인과 헤어진 듯하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관일(貫日)이라는 아들을 두었지만 유아 때 부인이 분유를 잘못 먹여서 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분유를 서양 선교사 편으로 어렵게 구해온 것을 부인이 물에 타지 않고 그냥 먹여 아이가 체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인지, 아니면 개명한 남편과 구식 촌부가 어울려 살 수 없는 시대의 간극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 여성도 시대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이웃 처녀들처럼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일을 하다가 농사꾼 베필을 만나지 않고 단재와 같은 선비를 만난 것이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꼬장꼬장한 한학자 시할아버지와 일찍 남편을 잃고 가계를 떠맡은 시어머니, 청상과부(靑孀寡婦)인 동서와 핏덩이 조카, 여기에 학문은 인근에 천재로 알려지고, 성격이 대쪽 같은 남편의 틈새에서 그녀의 시집살이는 고달픔, 그것이었을 것이다.
서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은 이미 전통유학을 뛰어 넘어 국민계몽운동의 선두에 선 개명 지식인이었다.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교유하면서 사회개혁과 국민계몽의 논설을 쓰고 일제의 침략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선각자가 되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에서 발행하는『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는 여성의 권리가 주창되고 ‘신여성운동(新女性運動)’이 전개되고 있었다. 단재 부부는 여러 가지로 위기를 맞은 것이다. 더욱이 단재는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개인적인 생활을 돌보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단재의 망명을 계기로 헤어지고, 그 때 데리고 살았던 조카 향란이는 임치정(林蚩正)의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단재는 망명지에서 줄곧 독신으로 지내다가 10년 후인 1920년 마흔한 살의 늦은 나이에 간호사 박자혜(朴慈惠)와 재혼하였다.
국내 시절 단재는 서울 삼청동에서 살았다. 직함은『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지만 생활은 궁색함을 면키 어려웠다.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에 저항하는 신문사의 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신백우(申伯雨)는 단재가 어려웠던 생활에서도 이웃을 돕던 비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한번은『대한매일신보』사장이던 영국인 배설(裵說)이 단재를 미국에 유학보내기 위해 주선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침 단재가 자고 있는 방을 한밤중에 들여다보게 된 벽초(碧初:홍명희의 호)가 깜작 놀랐다. 이불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다. (중략)
수일 전에 단재가 사는 서울 삼청동 이웃에 움막 같은 집이 있는데 가난한 품팔이꾼이 병든 팔십 노모를 모시고 거의 굶다시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선생(신백우)이 쌀을 한 되 사다주었다. 단재가 옆에 있다가 그 노모가 덮고 있는 이불을 보고 말을 꺼냈다.
“병든 노인이 저 이불로 겨울을 지낼 수가 있나? 내 이불하고 바꾸면 좋겠는데 대부(大父)의 의견이 어떻소?”
“그거야 단재 생각대로지 내가 대답할 것이 아니오.”
“내 이불은 대부가 해다 준 것이니 해다 준 사람과 덮는 사람이 다르다 뿐이지 아직 이불 임자는 대부가 아니오?”
이 말에 선생은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했다. (중략) 이리하여 깨끗한 이불과 그 노인의 누더기 이불이 바꾸어졌다."- 신범식,『경부 신백우 선생 평전(畊夫申伯雨先生評傳)』경부 신백우 선생 기념사업회, 54·55·56쪽 정리.
● 성균관에 들어가 신·구 학문 폭 넓혀
사람은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생애의 큰 전환을 이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기독교 전교의 큰 인물이 되고,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은 정주 오산학교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비폭력저항운동(非暴力抵抗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안태훈(安泰勳)과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애국심과 의리를 배우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아버지의 부임지에서 유배되어 온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단재는 향리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정통 성리학을 배우면서 많은 중국 고전을 독파하였다. 그러나 벽촌에는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의 친구 신기선(申箕善)을 손자에게 소개하였다. 신기선은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으로 대학자이며 수구파 거물 대신이었다.
충청남도 청원군 목천에 있는 그의 집에는 많은 장서가 있었다. 역대의 귀중한 한문 전적은 물론 국내외에서 발간한 신학문에 대한 다량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신기선은 젊은 시골 선비의 총명함과 학문열에 감동하여 단재를 자유롭게 서재에 출입시키면서 장서를 읽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차 큰 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단재가 신기선을 만나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그를 통해 신·구 서적을 접하게 되고 학문의 지평을 넓히는 한편 대학자, 대신의 경륜과 국내외 정세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시골 청년은 신기선의 집을 출입하게 되면서부터 정통 성리학과 신학문을 함께 익히는 새 시대의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898년 가을 단재는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후일 단재는 신기선이 친일파로 변절하면서 그와 결별하는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사적인 정리와 공적인 의리는 다르다는 신념의 일단이었다.
국비로 설치되고 운영되는 성균관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약간의 변화를 겪기는 했으나 여전히 유교교육의 최고 학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젊은 유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은 곳이 성균관이었다.
단재가 입학할 무렵에는 유학자 이종원이 관장을 맡고 있었고, 그 전 해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인공이 될 이상설(李相卨)이 교수 겸 관장으로 있었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유학의 경지에 도달한 단재는 성균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은 스승과 학우간에 주목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기재(奇才)로서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관장 이종원이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단재 한 사람뿐이다”라고 할 만큼 그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샀다. 단재는 이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온 우수한 유생들과 교유하면서 폭넓은 학문을 연마할 수 있었다.
목천에서부터 눈 뜨기 시작한 신학문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한계성을 깨닫게 되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술과 청나라를 통해 수입된 각종 서양 책, 조선의 역사와 만국사를 찾아 읽으면서 개명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성균관의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 이 기간은 단재에게 마치 조갈(燥渴) 들린 사람이 샘물을 퍼마시듯 신·구 학문의 광범위한 저서들을 거침없이 읽고 소화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서법은 한 눈에 열 행을 읽는다는 이른바 ‘일목십행(一目十行)’의 독서술이었다. 친구와 대화하면서도 책을 읽어 독파하고, 한번 독서에 빠져들면 며칠씩 세수도 아니 했다고 한다.
성균관에 있는 책만이 독파 대상은 아니었다. 틈나는 대로 종로 거리에 나가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읽지 못한 책들을 찾아 선 채로 모조리 읽고, 꼭 필요한 대목은 주인의 눈치도 아랑곳없이 붓을 들어 베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서점에 가서 책 읽기와 메모하는 습관은 망명 시기 북경대학과 북경시내 서점에서도 똑같이 행하여졌다. 이광수도 북경시내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 단재를 만났다고 회상한 바 있다.
단재는 성균관에서 3년여 동안 강의를 담당한 의병항쟁 지도자 이남규(李南珪)와 김연성, 애국계몽운동 지도자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 등의 가르침을 받거나 함께 수학하고 후배 변영만(卞榮晩)·조소앙(趙素昻) 등과 학문을 논하거나 시국을 토론하였다.
단재는 1905년 2월 합시(合試)에 들어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성균관에 대한 편제를 바꾸어 칙임관(勅任官)급으로 관장과 교수, 판임관(判任官)급으로 교수·박사, 직원으로 하는 직관을 규정하였다. 박사란 직위는 판임관급에 해당한다.
단재가 상경할 무렵인 1896년에는 수구세력의 외국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개회 지식인층 30여명이 자주 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며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이 주도하고, 이완용(李完用)·안경수(安駉壽) 등 정부 요인들도 여럿이 참가하였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 많은 청년들을 모았다. 이들은 모화관을 헐고 독립관으로 개수하여 집회장으로 삼고,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는 한편 순 국문 신문인『독립신문』을 발행하여 근대적인 자주민권사상과 민족의 자주의식을 높이고 개화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에는 서울 종로광장에서 최초의 민중대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정의 자주노선을 요구하는「헌의 6조」를 결의하고 이의 실행을 황제 고종(高宗)에게 주청하였다. 황제도 처음에는 6조의 실행을 약속했으나 이권에 눈이 어두운 정부 대신들의 방해로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독립협회에서는 정부를 맹렬히 규탄하기 시작하면서 정부와 대결하게 되었다.
단재는 1898년 10월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전통적인 유학사상에서 개혁사상가로 과감한 자기혁신과 방향 전환을 시도하였다.
시골 청년 단재는 이제 서울 한복판에서 사회 명사들과 나란히 서서 개화사상가, 자주자강 이론가로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