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다. 민족의 후예는 선조의 얼을 이어 새 역사를 창조해 간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역사는 오늘날 얼마나 사실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동북아를 웅비했던 우리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는 철저히 유린되고, 왜곡되고, 말살되었다. 인류의 시원사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한민족 반만년 역사가 언젠가는 정확하게 재조명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만주 대륙을 풍미했던 옛 고구려인들의 사라진 역사의 일편을 밝혀 보고자 한다.
900년간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해 온 거대왕국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네 차례에 걸친 전쟁 끝에 멸망했다. 그 동안 고구려는 동이족(東夷族)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고정의(高正義)·양만춘(楊萬春) 등 불세출의 영웅들이 만주 대륙을 호령할 때마다, 요동을 침략한 수백만 중국인의 뼈가 고구려의 산하에 묻혔다.
이러한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어이없게도 자중지란이 일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는 철저히 고구려를 궤멸시켰다. 고구려의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고구려 황족을 비롯한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의 본토로 끌고 가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9백년 장구한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서기 670년 4월, 고구려의 장수 검모잠(劍牟岑)이 보장왕(寶藏王)의 외손 안승(安勝)을 추대하여 칼을 들고 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大仲象)·대조영(大祚榮) 부자가 당군을 몰아내고 동모산(東牟山)을 거점으로 진국(震國)을 건국하여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多勿)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 보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자신들의 영역으로 쫓겨가야만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나라에 저항하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사라져 간 고구려의 자손 가운데는 서역을 평정한 ‘동양의 한니발’ 고선지(高仙芝) 장군도 있었고, 무열(武列)의 명예에 봉해진 왕사례(王思禮)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인일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인들에게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이정기는 타고난 무장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755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하북지역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요동에 있는 평로도독부와 장안의 당나라 조정은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의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하여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하여 평로도독부를 접수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동쪽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국체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정기는 요동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본토에 또 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병사 대부분이 고구려인이었던 2만의 전투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에 상륙하였다.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패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갔던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영원히 망해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부흥군이 왔다는 소식에 산동의 유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사실 2만의 군사는 극히 적은 병력이었다. 당나라는 1개 주만 해도 수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2만의 병력은 별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2만의 군사로 중국의 한복판으로 쳐들어간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곳엔 수많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정기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10여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호에 8백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781년, 이정기의 군대는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과 장안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가 점렴해 버리니 장안의 당나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20만 대군을 동원해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향하여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천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승승장구하여 변주의 20만 대군을 패퇴시키며 성에 고립시키고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이 다한 것이다. 당나라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두고, 고구려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정기는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통함을 삼키며 치청군은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의 황제 덕종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다음해에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의 보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자사 이유, 덕주자사 이사진, 체주자사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 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나라를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을 써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이사도는 당나라의 헌종이 제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준비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의 200만 섬의 군량미를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낙양성을 기습하여 궁궐을 불살라 버렸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 전술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나라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나라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나라의 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나라 공격을 명하였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나라를 총공격하였다.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 아픈 동족상잔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들의 제나라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 지 58년. 이제 그 불꽃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나라가 망한 뒤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의 제왕이 되었다. 중국 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 휘하의 선단을 통해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그 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고구려 언어를 구사하며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 출신 중원의 군벌 이정기! 어찌하여 이같이 찬란했던 민족의 영웅이, 민족의 정신이 1천 2백년간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었던가? 왜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처럼 고증이 확실한 고구려의 후예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제는 과거의 친일식민사관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에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밴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