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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5.애국계몽운동과 반일언론의 선봉장 ⑴

참의부 |2013.08.28 18:22
조회 160 |추천 0

● 민족언론의 정신사적 원류『대한매일신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1906년『황성신문(皇城新聞)』이 폐간되면서 양기탁(梁起鐸)의 추천으로 영국인 베델(Bethell)이 경영하는『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처음에는 논설기자로 일하다가 곧 주필이 되어 신문의 논설을 주관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7월 18일 양기탁·유동열(柳東說) 등이 영국인 베델을 사주(社主)로 추대해서 창간한 신문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하여 창간되었다.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의「신문지법」등 일제(日帝)의 탄압과 검열을 피하기 위해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하여 황제의 내탕금과 이용익(李容翊)·민영환(閔泳煥) 등의 자금 지원을 받아 신문사 시설을 마련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당시 한국의 어려운 처지와 정부의 주장을 세계 각국에 알리기 위해 일반 신문(국한문)과 함께 영어를 사용한 신문의 간행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이다.

 

창간 당시는 타블로이드판 6쪽으로서 그 중 2쪽이 한글 전용, 나머지 4쪽이 영문이었다. 이듬해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판을 따로 떼어 두가지 신문을 만들었다. 영문판 제호는『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였다. 논설진은 양기탁·박은식(朴殷植)·신채호·장도빈(張道斌)·최익(崔益)·장달선(張達善)·황희성(黃犧性) 등이며 안태국(安泰國)·임치정(林蚩正)·이교담(李交淡)·옥관빈(玉觀彬)·강문수(姜文秀) 등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권회복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통감부의 악정을 샅샅이 파헤치고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항쟁을 크게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 한국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통감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서도『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連續不絶)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대한매일신보』에 대해 통감부는 온갖 회유와 매수작전으로 그 논조를 꺾으려 했으나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단재가 구체적으로 언제『대한매일신보』 에 들어갔는지, 그 일자는 불명확하다.『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쓴 정진석 한국신문협회 정책자문위원장은 1907년 후반으로 잡고 있다.

 

"…1908년 5월 28일에 다시 마루야마[丸山重俊] 고문이 통감부 외무부장 나베시마[鍋島]에게 보낸「대한매일신보의 현황」에는 박은식의 이름이 빠지고, 신채호가 국한문판의 논설을 집필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런 사실로 보아 1907년 후반에 박은식이 물러나고 신채호가 새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박은식은「신보」를 떠나「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신채호는 1908년 4월 12일과 13일 이틀간「여우인절교서(輿友人絶交書)」(한글판은 4월 17일~18일),「친구에게 전하는 편지」를 게재하여 일진회에 가담한 친일파와 국민·대한 두 친일지를 비판하였다. 또 5월 2일부터 6월 30일까지는「수군 제1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을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호로 연재하였다."- 정진석,『대한매일신보와 배설』133쪽, 나남(1987년)  

 

이에 따르면 단재가『대한매일신보』에 입사한 해는 1907년이 된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의 성과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작성한 ‘신채호 연보’ 등에서는 한결같이 1906년으로 잡고 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이 폐간되면서 양기탁의 천거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로 옮겼다면 1906년이 맞을 것이다. 양기탁만한 인물이 반일구국논조의 신문을 만들고 있으면서 단재와 같은 유능한 청년 논객을 1년여씩이나 ‘방치’하고 있었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전의 동지 서세충(徐世忠)은「단재의 천재와 의체(疑體) 없는 성격」에서 “스물다섯살에『황성신문』논설기자가 되어 당시 동지(同紙)의 간부 장지연(張志淵)·유근(柳瑾)·남궁억(南宮檍)씨 등 제(諸) 선배들과 같이 재기 넘치는 필봉(筆棒)을 휘둘렀었다. 그 다음『대한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주필이 되었으니 당시 단재는 스물여섯살의 청년이었으며…”라고 하여 ‘스물여섯살 입사’를 주장하였다. 스물여섯살 때는 1905년이 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단재는『대한매일신보』총무 양기탁의 요청에 다라 1905년 말~1906년 초에『대한매일신보』논설기자로 옮겨 활동하게 된 듯하다. 신용하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는 “신채호는 이렇게 하여 1906년(스물일곱살)부터『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라고 스물일곱살 설을 주장하였다.

 

청년 논객 단재가『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간 것은 독수리가 창공을 나는 격에 비유되었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묻히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대한매일신보』의 지면은 단재의 우국정신과 배일사상 그리고 국민계몽의 필봉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사대주의 역사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사론(史論)을 쓰고 여성계몽 잡지도 펴냈다.   

 

고난에 찬 단재의 생애 중에서『대한매일신보』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적이고 능력을 발휘한 기간이었다. 단재는 1910년 봄, 신문사를 떠날 때까지 4년여 동안 국권 상실의 위기 상황 속에서 친일파들을 비난하고 국민들 계몽하는 수많은 논설을 썼다. 바로 이 기간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탈로 망해가는 시기였다. 당시『대한매일신보』는 민족언론의 정신사적 원류로서, 그리고 반일언론운동(反日言論運動)의 총본산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중심에 애국적 선각자 박은식과 양기탁 그리고 단재의 필봉이 있었다.

 

"신채호의 웅건·활달한 필치와 비판적 형안이 담긴 계몽 논설과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해박한 역사평론은 당시 청년 지식층과 일반 민중들에게 애국심과 항일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각성제 역할을 하였다. 그가 이 시기에 발표한 애국심·민족주의·국민국가사상·역사의식·신교육사상이 담긴 많은 명논설들은 그의 투철한 비판의식과 전기 민족주의 사상의 성격을 그대로 잘 대변해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홍규,『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262쪽, 형설출판사

 

●『대한매일신보』에 쓴 명논설

 

단재는『대한매일신보』에서 근무한 4년여 동안 많은 글을 썼다. 이 시기에 시론이나 평론뿐 아니라 을지문덕(乙支文德)·최영(崔瑩)·이순신(李舜臣) 등 전쟁영웅들의 전기도 썼다. 이들 자강주의(自强主義)적 전쟁영웅을 통해 국난극복의 의지를 찾고자 한 것이다. 단재의 자강론적 국사 인식의 발상은 주로 이 무렵『대한매일신보』논설을 통한 언론활동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단재의 이런 의식과 사상에 관해 언론인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보호’로 위장돤 일제강점의 침략 과정에서 허울만의 대한제국 시대에 단재는 열강이 경쟁하는 한반도의 국제적 환경 속에서 자립·자강의 독립국가 건설의 방도를 모색하는데 열중하였다. 단재는 그의 논설과 논문 속에서 그의 독립국가 건설의 방도를 외경력(外競力)과 자강(自强)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은 지난날과는 달리 시대적 명분의 질서가 아니라 오직 실력이 좌우하는 열강들의 세력 균형에 입각한 냉엄한 권력정치의 무대였다. 이와 같이 힘이 지배하는 강자생존의 새 국제질서 속에서 구국·애국의 방책은 오로지 자강책, 다시 말해 근대적 국가주권의 확립과 부국강병의 국력 배경이었던 것이다."- 송건호,『한국현대인물사론』, 303~304쪽, 한길사(1992년)

 

단재가『대한매일신보』에 글을 쓸 때에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일제가 설치한 한국통감부의「보인규칙」이나「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롭게 필봉을 휘둘러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몽 논설을 쓸 수 있었다.

 

논설기자로 입사한 후 주필이 되어 1910년 봄 망명하기 전까지 각종 시국논설과 사론(史論)을 통해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대한매일신보』에 쓴 주요 시국논설은「일본의 3대 충노(忠奴)」·「금일(今日) 대한제국의 목적지」·「논(論) 충신(忠臣)」·「한국자치제의 약사」·「가정교육의 전도」·「서호문답(西湖問答)」·「정신상 국가」·「동화(同化)의 비판」·「영웅과 세계」·「국가를 멸망케하는 학부(學部)」·「학생계의 특색」·「문화(文化)와 무력(武力)」·「국문(國文)의 기원」·「국민의 혼」·「큰 나와 작은 나」·「한국민족지리(韓國民族地理)상 발전」·「동국(東國) 고대 선교고(仙敎考)」·「진화와 퇴화」·「한일합병론자들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등 다수가 있다.

 

사론으로는「독사신론(讀史新論)」, 영웅전기류에는「수군 제1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등과, 시론(詩論)으로「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를 연재하였다. 또『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와『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에「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등의 글을 발표하였고, 그 밖에『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역술하고,『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편찬하고,『가정잡지』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논설 중에「독사신론」은 나중에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소년』제3년 제8권에「국사사론(國史史論)」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이 시기 단재가 집필한 한민족사의 영웅들의 일대기는 당시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쓴 내용이다.

 

수많은 논설 중에서 몇 편을 골라 본다. 먼저「일본의 큰 충노(忠奴) 세 사람」이다. 여기서 ‘충노 세 사람’은 친일매국노 송병준(宋秉畯)·조중응(趙重應)·신기선(申箕善)을 말한다. 신기선은 단재에게 자신의 서재를 개방하고 성균관에 천거해 준 바로 그 사람이다. 단재는 사적(私的) 은혜와 공적(公的) 죄상을 분명히 하였다. 신기선은 당시 친일행위를 일삼아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큰 충노(忠奴) 세 사람」

 

〃…한국에 일본의 큰 충노가 세 사람이 있는 것은 내가 부득불(不得不) 통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반성대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하느님을 부르며 땅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아니치 못 할지로다.

 

저 세 사람의 일본 대충노(大忠奴)가 저의 일신만 노예되고 말진대 내가 마땅치 묻지 아니할지며, 저의 일신만 노예되고 말진대 내가 마땅히 슬퍼하지 아니할지나 귀가 막히고 참혹하도다. 저희들로 인하야 무고한 양민들이 모두 노예의 굴속으로 몰려 들어가니, 귀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믿지 아니하는가? 내 말을 좀 살펴 들을지어다.

 

제일 충노 송병준은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야 오조약시에 선언서로 일등공신이 되고, 그 수하 정병 40만명으로 일본에 아첨하여 자위단 토벌대로 전국을 소요케 하며, 제이충노 조중응은 동아개진 교육회의 두령이 되어 보부상 80만명을 회집하여 이등(伊藤)씨와 증미(曾彌)씨의 호령을 등대하여, 제삼충노 신기선은 이등씨의 돈 1만환으로 대동학회(大東學會)를 확장하여 유교를 부리한다 위명(僞命)하고, 포고문 일장으로 국내 유림으로 위협하여 일본 권력내에 복종케 하고자 하니, (혹이 말하되 신기선씨는 원래 임산림 문인으로 학식이 좀 있고 환욕이 비록 탱중하나 공론을 두려워하니 포고문 같은 것은 필경 해외 중 다른 사람의 의견이요, 신씨의 주견이 아닌 듯 하거늘, 지금 삼대 충노로 함께 열명하면 어찌 원통치 아니리오? 하노니,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 책재원수(責在元帥)라는 주의로 말하면 신시가 비록 입이 백이라도 변명하기 어려우리라.)

 

금일에 40만명이 명일이 50만 60만이 될른지도 알지 못할지며, 금일에 공자왈 맹자왈 하는 자가 명일에 이를 다 검게 하며, 못을 다 아롱지게 하지 아니할른지도 알지 못할지니, 연즉 부지불각증에 전국 2천만 인종이 저 일본 삼대(三代) 충노배(忠奴輩)의 소원과 같이 점점 일본인의 매와 일본인의 사냥개와 일본인의 소와 밀이 되기가 쉬우리니, 슬프다. 박제상(朴堤上)은 이미 멀고, 김시민(金時敏)은 이미 없으매, 침침한 그믐밤에 여호와 삵이 분분이 횡행하는도다!

 

혁혁한 단군(檀君) 기자(箕子)의 자손으로 신무일왕(神武日王)을 존중하며, 당당한 임진년(壬辰年)에 끼친 백성으로 풍신수길(豊臣秀吉)이를 흠앙하며, 융희(隆熙) 조정의 신자(臣者)로서 명치만세(明治萬歲)를 호칭하며, 독립 산하의 종자로서 보호정책에 굴복하여 한국 곡식을 파종하고도 일본의 우로를 바라며, 한국 토지를 밟고도 일본의 일월을 숭배하니, 이 무리가 날로 성하면 장래에 면목이 변치 아니한 한국 사람을 어느 곳에서 얻어 볼까!

 

인심이 있는 한국인이여, 저 무리의 속임수 가운데 빠지지 말지어다.

 

지금 나라가 빌고 위태하나 인심만 변치 아니하고 보면 가히 편안할지며, 지금 나라가 비록 망하였을지라도 인심만 변치 아니하고 보면 가히 흥할지니라.

 

희랍(希臘:그리스)이 필경 독립함은 희랍인의 말에 가로되,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희랍인은 희랍인이 될 따름이다”한 까닭이라.〃

 

단재는「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를 썼다. 친구가 매국노 집단인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여 활동한 데 대한 분노와 타매의 글이다. 단채의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은 정신이 잘 드러난다.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

 

〃…본 기자가 가로되 대저 일진회에 든 자는 자세히 볼지어다. 평일에 눈을 부릅뜨며 팔뚝을 뽐내고 천하일을 논난하던 노형(老兄)으로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항상 하늘을 부르짖으며 땅을 두드리고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던 노형으로써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일진회에 들더라도 노형은 독히 들지 아니할 줄로 믿었던 노형으로서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노형이 향일(向日)에 우리나라는 4천년 이래로 하루도 완전한 독립이 없음을 홀연히 탄식하기에 노형의 조국을 나삐 여기는 것을 의심하였으나, 일진회에 들 줄은 알지 못하였으며, 노형이 향일에 우리나라 힘으로는 필경 자주독립하지 못하겠다 하기에, 노형의 동포를 없수이 여기는 것을 애석히 여겼으나 일진회에 들른지는 알지 못하였으며, 노형이 향일에 민영환(閔泳煥)·최익현(崔益鉉)·이준(李儁)·김봉학(金奉學) 제씨(諸氏)는 다만 그 몸만 죽고 나라에 이익이 없는 줄로 평론하기에, 노형의 언론이 돌연 변하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일진회에 들 줄은 알지 못하였으며, 노형이 향일에 송병준·이완용·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도 역시 한때 영웅이라 목전에 부귀가 자족하니, 국가와 인민의 멸망하는 것을 알리요 하기에 노형의 사싱이 홀연히 변하는 것을 민망히 여겼으나 일진회에 들 줄은 알지 못하였으니, 노형으로서 지금 일진회에 들었단 말인가?

 

오호라! 내가 이로 성기아 노형과 절교하노니, 노형이 지금 일진회에 든 바에야 내가 비록 아니 끊고자 한들 아니 끊을 수 없으며, 노형이 스스로 조국을 잊은 바에야 내가 아니 끊고자 한들 아니 끊을 수 없으며, 노형이 스스로 동포를 잊은 바에야 내가 아니 끊고자 한들 아니 끊을 수 없으니, 오호라! 내가 노형을 끊지 아니하면 조국이 장차 나를 끊을지며 동포가 장차 나를 끊을지니, 내가 노형을 끊을지언정 어찌 조국과 동포에게 끊치리오?

 

그러나 내가 지금 노형을 끊지 아니할 수 없는 경우를 당하여 또 차마 절교치 못하는 인정이 있으니, 슬프다! 노형이여, 우리가 지금 아니 끊지 못할 경우를 당하여 가히 끊지 아니할 도리를 연구하여 볼지니, 끊지 아니할 도리는 다름이 아니라 노형이 스스로 조국과 동포를 배반하지 아니하면 내가 언감히 노형을 끊으리오?

 

노형이 근일에『국민신보(國民新報)』와『대한신문(大韓新聞)』의 두 마귀의 신문을 구람하더니 홀연히 혼(魂)을 잃었는가? 노형이 근일에 개진교육회(開進敎育會)와 대동학회의 두 마귀 당파를 추축(追逐)하더니 홀연 지조를 변하였는가?

 

슬프다! 노형아, 저희들의 말을 나도 또한 들었노라. 저희들이 항상 하는 말이 일진회원이 날로 강성하고 유명의 담류가 날로 감쇄(減殺)하여야 생명을 가히 보전하여 국권도 가히 회복되리라 하나니, 의병의 해(害)가 없는 것은 아니로되, 그 해는 다만 외면상으로 생명과 재산의 해뿐이어니와, 일진회의 해는 곧 내면상으로 국민의 정신을 해롭게 하나니, 국민의 정신을 이미 잃은 후에야 어찌 국권을 회복하리요? (중략)

 

이 내 한몸이 아무리 작을지언정 잘 쓰고 보면 워싱턴, 마찌니가 될지며, 잘못 쓰고 보면 송병준, 이용구가 될지니 노형이 워싱턴, 마찌니가 되고자 아니하고 기어코 송병준, 이용구가 되고자 함은 웬 까닭이뇨? (후략)〃

 

단재는 후일『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대작을 집필하면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 그 외에는 비아라 하였다. 단재의 이와 같은 역사관은 이미 1900년대 초에 쓴「대아(大我)와 소아(小我)」에서 발원한다.

 

「대아(大我)와 소아(小我)」

 

〃…내가 국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는 나의 눈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유심한 눈물을 뿌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사회를 위하여 피를 토하면 피를 토하는 나의 창자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값있는 피를 흘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뼈에 사모치는 극통지원의 원수가 있으면 천하에 칼을 들고 일어서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마음에 새겨 잊지 못할 부끄러움이 있으면 천하에 총을 매고 도모하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싸움의 공을 사랑하면 천백년 전에 나라를 열고 땅을 개척하던…

 

슬프다. 온 세상에 어찌하여 자기의 침 면목을 알지 못하고 혹 구복을 나라 하여 진진한 고향으로 이것만 채우고자 하며, 혹 성명이 내라 하고 혹 문호를 나라하여, 부끄럽고 욕이 오른지 자유치 못함을 당하든지 이것만 보존하고 이것만 유지코자 하다가 조상에게는 패류의 자손이 되고 국가의 죄인도 되며 동포의 좀과 도적도 되고 인류의 마귀도 되나니, 오호라! 자기의 참 면목이 나타나는 날이면 어찌 설워 울고 이를 갈지 아니하리오?

 

울지어다. 울지어다. 내가 이 한 붓을 들고 천당의 문을 열고 분분이 길을 잃은 자들을 부르노니, 울지어다. 울지어다. 나의 이르는 바 천당은 종교가의 미혹하는 별세계의 천당이 아니라, 나의 참 면목을 나타내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이것이라. (중략)

 

반드시 죽는 나를 보면 마침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보면 반드시 길이 죽이 아니리라.

 

비록 그러나 나의 이 의논이 어찌 철학의 공상을 의지하여 세상을 피하는 뜻을 고동함이리요? 다만 우리 중생을 불러서 본래 면목을 깨달으며, 살고 죽는 데 관계를 살피고 쾌활한 세계에 앞으로 나아가다가 저 작은 내가 칼에 죽거든 이 큰 나는 그 앞에서 하례하여 나의 영원히 있음을 축하하기 위함이로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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