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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5.애국계몽운동과 반일언론의 선봉장 ⑷

참의부 |2013.08.31 14:33
조회 125 |추천 1

● 천성이 타고난 언론인

 

단재는 대한제국 시기의 애국계몽운동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언론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민족주의 언론인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고난의 생애는 ‘언론(言論)’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대의(大義)에 충실한 지사적(志士的) 언론인이다.

 

단재의 이념 성향에 대해 조동걸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는 “단재는 무정부주의자이기는 해도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속에서 단재를 찾다가 보면 단재를 찾을 수 없는, 단재 나름의 길이 있었다고 느껴진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단재는 ‘무슨 하나’가 되는 것보다 ‘모두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는 국난기 선각자로서 ‘시대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1905년『황성신문(皇城新聞)』으로부터 1921년『천고(天鼓)』의 발행 때까지 10년 이상을 언론·출판활동에 종사했다.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래 위체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17년 동안의 대부분을 언론인으로 시종하였다.

 

단재의 언론 정신을 이어받은 언론인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는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민족이 신음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시켜 볼 때 다양한 듯이 보이는 그의 활동 편력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 그의 천성은 타고난 언론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편이 아닌가 한다”고 평가했다.

 

청암은 또 “그가 남긴「조선혁명선언」이나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성토한「성토문」을 읽어봐도 그가 시대의 국제 정세를 평한 것이나 분석한 안목이 단순한 역사학자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탁월한 평론을 쓰고 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투철한 민족언론인이었던 단재에 대해 역사학자 출신의 언론인 천관우(千寬宇)는 “독립운동가로서, 사가(史家)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단재는 다방면으로 우리 근대사에 거보를 남겼지마는,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안재홍이 쓴『조선상고사』의 서문)사학도, 신문도 말하자면 그 독립운동을 위한 방법이고 수단이었다. 그것은 신문 내지 사학에 종사하는 태도에 있어 현대의 직업적 저널리스트 내지 사학도들과의 큰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왕조 말기부터 일본의 강점 시대에 걸쳐서는 독립운동과 사학과 언론을 삼위일체(三位一體)처럼 파악하고 실천한 유형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고 썼다.

 

구한말 반일언론인 중에 상당수가 훼절하거나 변절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이 그렇고 심지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명논설을 썼던 장지연(張志淵)도 말년에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잡문을 쓰고 생활비를 받아썼다. 그러나 단재는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민족언론인으로서 지조와 신념을 잃지 않았다. 단재는 변절의 대명사가 된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면서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신석우(申錫雨)·신백우(申伯雨)와 더불어 지조의 애국자 집안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단재의 서릿발 같은 필법과 시대정신을 추구하는 언론사상은 조선 중기 자치주의 개혁사상가였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정암은 대간(臺諫)으로 출발해서 대간으로 생을 마쳤다. 그는 대간으로서 언로(言路)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언로의 통폐(通閉)가 국운을 좌우한다고 인식하였다.

 

흔히 정암을 개혁정치인으로서 당쟁에 휩쓸려 희생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언관(言官)으로서, 언관의 역할 때문에 40세 때에 유배지에서 독약을 마셔야 했다. 언관인 정암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짧은 관직생활 중 1백여회에 달하는 계(啓)를 올렸으며 그 내용이 한결같이 임금에게 간(諫)하는 것이었다.

 

정암의 언로활동으로 훈구파 103명의 공신 중 3분의 2가 넘는 78명을 삭훈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임금에게 성군이 되기를 ‘강요’하는 끊임없는 ‘언로[經筵講論]’의 활동이 군주 중종(中宗)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수구세력의 모함을 받아 결국 필화(筆禍)를 입게 되었다.

 

정암은「청파양사계(請罷兩司啓)」에서 “언로가 열리고 닫히는 데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 공론이란 유국(有國)의 원기이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나, 만약 위 아래 모두 공론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망하고 만다”면서 “장사하는 사람이나 나그네 누구나 할 것 없이, 오히려 도로(길)에서도 의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공론(여론)을 상려하는 사이에서까지 구해야 한다”라고 언로의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정암은 불의나 이치에 벗어나는 일을 보면 관직의 상하, 노소를 가리지 않고 들추어 시정하려 들고 비판을 가하였다. 여기에는 임금이나 대신들고 예외가 아니었다. 사부(師父)였던 김굉필(金宏弼)에게도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이것은 마치 단재가 자신의 성장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신기선(申箕善)이 사적인 은인임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준 돈으로 대동학회(大同學會)를 확장하려고 했을 때 송병준·조중응에 다음가는 일본의 3대 충노(忠奴) 중 한 사람이라고 신랄히 비판한 것과 유사하다. 이들은 대아(大我)를 위해 편협한 사적 관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4백년을 사이에 두고 정암은 봉건주의 사회의 절대 권력과, 단재는 봉건 질서와 제국주의 세력과 생명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정론(공론) 정신의 신념과 무디지 않는 붓이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언론인 단재는 이광수가 지적한 대로 “칼날 같은 의지와 절개로 뭉쳐진 사람으로 시인적 여유조차 허락치 않은 사람”이었다.

 

● 국맥으로서의 낭가사상

 

단재(丹齋)는 언론인·역사학자·문학인·독립운동가로서 평가를 받은 데 이어 낭가사상(郎家思想)을 연구한 민족사상가로서도 독특한 위치에 서게 된다. 단재가 단재인 것은 어느 한 분야의 묶음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전체적인, 통합적인 ‘단재사상’으로 펼쳐지게 되는 대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낭가사상이 첨부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구한말에서 병합 초기에 민족사학자들은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맞서 한국사를 재정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강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박은식의 ‘국혼’, 문일평의 ‘조선심(朝鮮心)’, 정인보의 ‘얼’, 최남선의 ‘조선정신’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단재의 낭가사상은 다른 이들의 관념적인 정신사관에 비해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천관우는 학술 좌담『단재신채호론(丹齋申采浩論)』에서 단재사학의 가장 특징의 하나를 ‘낭가사상(郎家思想)’이라고 지적하였다. 언론인 출신으로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천관우의 낭가사상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단재사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몇 든다면, 그중 하나는 낭가사상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학사의 면에서 볼 때는, 그 무렵 박은식 선생이 ‘혼(魂)·백(魄)’을 내세우고 정인보 선생이 ‘얼’을, 문일평 선생이 ‘조선심(朝鮮心)’을, 최남선 선생이 ‘조선정신(朝鮮精神)’과 같은 말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것이 모두 다소 막연해 보이는데 비해서 좀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낸 것이 신채호 선생의 낭가사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이 다른 분의 것과 비교해서 어떤 좋은 점, 나쁜 점이 있는가는 별 문제로 치고 말입니다. 본래 단군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 ‘수두교’나 좀 더 내려와서는 ‘선비’, 고구려의 ‘조의선인(早衣先人)’도 그것이고『고려도경(高麗圖經)』의 ‘재가승(在家僧)’이나 신라 때 ‘화랑’도 말하자면 그 계열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그분의 독특한 ‘아(我)’와 ‘비아(非我)’라는 용어를 빌면 정신적인 면에서, ‘아’가 낭가사상이고 ‘비아’가 유가사상(儒家思想)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쭉 내려오다 묘청(妙淸)의 난리 때 낭가사상과 유가사상의 대립에서 낭가사상이 패몰했다는 것이지요. 신채호 선생은 낭가사상과 같은 우리 고유의 강건한, 집단적으로 훈련된 그러한 정신이 앞으로 우리 민족의 앞길을 살리는 데 중요한 사상이 될 것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단재가 정립한 낭가사상은 민족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과 당시 서구의 주된 사상조류인 민족주의를 수용하면서 정립되었다. 구체적인 역사방법과 이론으로 정통적인 민족사상의 기원·전승·기능을 구명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자주독립정신을 앙양하여 민족의 진로와 시대정신을 밝히고자 하였다.

 

단재는 낭가사상의 원류를 한민족의 원시종교인 수두제(蘇塗祭) 신앙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단군은 단군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민족적 구심적인 수두(단군) 제전(祭典)을 거행하였고, 이것은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三韓)의 소도(蘇塗)라는 이름의 제전으로 계승되었다가, 고구려 태조대왕(太祖大王)·차대왕(次大王)대에 와서 ‘선배’ 제도로서 국가적 차원의 정치 제도로 발전하였다고 인식하였다.

 

여기서 ‘선배’는 선인(仙人) 또는 선인(先人)의 고유한 우리말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가사상은 한국의 주체적인 전통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신라의 화랑제도에 관한 단재의 인식은 독특하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체로 하여 성장·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국선(國仙)·화랑(花郞)은 진흥대왕(眞興大王)이 곧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닦어 온 자라…. ‘선배’를 ‘신수두’ 단전(壇前)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에 힘쓰며 수박(手搏)·사예(射藝)·기마·턱견이·깨금질·씨름 등 각종 기예를 하며, 원근 산수에 탐험하며,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일처(一處)에 숙식하며, 평시에는 환난 구제나 성곽·도로 등의 수축을 자임하고, 전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배’가 ‘조의(早衣)’를 입어 ‘조의’라 칭하듯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칭함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명사며…."- 신채호,『조선상고사』「개정전집」상권, 227~228쪽.

 

단재는 낭가사상이 고려 중기까지 명맥이 이어지다가 묘청의 반란 때 국풍파가 유학파에게 패배하여 몰락함으로써 소멸하였다고 진단하였다.망명 직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지만 선교나 대종교를 신앙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망명을 전후하여 대종교가 창시되고 다른 여러 애국계몽지식인들이 여기에 참여했지만, 단재는 대종교를 신앙의 차원이 아닌 민족과 국가정신의 근원에 대한 역사 연구의 핵심적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단재는 곧 대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단재가 “대종교와 멀어진 것은 2세 교주를 김교헌(金敎獻)이 맡은 탓이 아니었던가 한다. 김교헌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김택영(金澤榮)과 가깝게 지내다가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의 반도사편찬사업에 촉탁으로 참여했다가 대종교 교주에 취임했다”라는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국난기를 맞은 단재에게 선교와 낭가사상은 “외래 사상과 외부의 침략에 맞서 이를 구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민족정신으로서의 고대 민족신앙인 선교와 전통적인 민족사상인 낭가사상의 이념을「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란 논설을 통해서 그 싹을 표출하게 된 것은 낭가사상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단재는 특히 낭가와 낭가사상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여 국선·풍류도·풍월도가 갖는 의미가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즉 낭가사상의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도교의 ‘무위(無爲)’와 ‘불언(不言)’과는 판이하며, 낭가를 풍류라 함은 지나(중국)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킨 것이며, 풍월(風月)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詠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낭가사상의 주체인 낭가의 주체는 단군왕검시대에서 비롯되고, 낭가들의 낭가사상 역시 그때부터 배태되었다는 입론의 시발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라는 분석도 따른다.

 

배용일 포항 제1대학 교수는 단재의 낭가사상의 형성과 정립의 전말에 대해 “낭가사상은 단군조선의 수두제전(단군제)→부족국가의 열국의 민족제전(영고·동맹·무천·소도 등)→고구려의 선배제도→신라의 화랑제도로 성장·발전해 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하였다.

 

"첫째, 조선 역사상 일천년 이래의 제일 큰 사건으로 묘청의 서경전역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의 역사를 사상적인 시각에서 전통적인 낭가사상과 외래 사상인 유가사상과의 대립투쟁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상의 대립은 서경전역으로 종결이 났으며, 국풍파가 사대유학파에 의해 몰락하게 되면서 민족과 국가가 쇠하게 되었다는 시각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상은 서경전역을 주더한 유학파의 총수 김부식이 전역 이후 사대적인 유학사관으로『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민족사를 위축 서술한 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신채호는 사상사적인 검토와 반성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진취적인 낭가사상이 사대주의 유교사상에 패배한 ‘사실로서의 역사’와 고유의 전통을 왜곡 말살한 ‘기록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항의와 굴절되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항거로서, 즉 사대적 중세 유교사관과 강권주의적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준엄한 비판적 논거로서 낭가사상을 인식하였다.

 

둘째, 한국 고대사의 대외항쟁 승리와 삼국통일은 낭가사상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낭가사상의 최고 발현자로서 연개소문이나 을지문덕 등을 발굴하였다. 그는 국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서의 낭가사상과 이 낭가사상의 주체자로서의 고대의 무사적 영웅을 내세움으로써 낭가사상에 입각한 민족적 영웅사관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신채호의 낭가사상은 그의 역사 인식 특히 고대사 인식의 내면적 이념과 구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결정적인 대목마다에 인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낭가사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신채호의 역사 인식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신채호의 낭가사상이 구체화된 것이 그의 고대사 인식이고 고대사 서술이다. 즉 신채호의 구체적인 역사사상과 역사서술의 이론적 근거와 이념이 낭가사상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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