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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7.연구·저술과 독립운동 준비의 북경 시절 ⑵

참의부 |2013.09.04 00:40
조회 47 |추천 0

● 대종교운동(大倧敎運動)에 깊이 참여

 

단재는 북경 망명 시대에 대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대종교의 교지는 그의 이념과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만주에 머물 때부터 대종교와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한민족이 단군을 신앙으로 모시는 천신신앙(天神信仰)의 역사는 길다. 고조선의 천신교(天神敎), 부여의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의 경천교(敬天敎), 신라 숭천교(崇天敎) 등의 이름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한말(韓末)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서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우리 고유의 종교를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고, 1910년 대종교(大倧敎)로 개명하였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환웅·환검을 삼일신(三一神)으로 받들고,『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삼전개경(參佺慨經)』의 세가지 경전을 갖고 있다.

 

중흥 교주 홍암에 의해 재건된 대종교는 국권회복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주된 활동무대를 만주지역으로 옮겼다. 1910년 10월 25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支司)를 설치하고, 1911년 7월에는 홍암이 동지들과 백두산을 답사하였다. 이와 함께 북간도에 동도본사(東道本司), 러시아 소학령에 북도본사, 서울에 남도본사를 설치하여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각 분사의 책임자는 동도본사 서일(徐一), 서도본사 이동녕(李東寧)·신규식(申圭植), 북도본사 이상설(李相卨), 남도본사 강우(姜虞) 등이었다.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안을 발포하고 대종교를 유사단체로 규정하면서 불법화시켰다. 대종교를 비롯하여 천도교(天道敎) 등 민족종교들을 불법화시키면서, 이들 민족종교가 소요 사건을 일으켜 민중을 선동하고 망언을 유포하여 인심을 현혹시키며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강화시킨다는 이유로 ‘유사종교’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이에 홍암은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장문의 서한을 남기고 자결함으로써 일제의 종교탄압과 폭압정책에 항거·순국하였다.

 

단재는 북경에서 홍암의 순국 소식을 전해 듣고 통분하여「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애국자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글은 전하지 않는다.「도제사언문」의 편린이나마 전하는 것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글에서이다.

 

"그 뒤 상해서 고(故) 나철(羅喆) 선생을 도제(悼祭)한 사언문 일편을 보니까, 그야말로 웅기(雄奇)·연아(淵雅)의 치(致)를 다하여 우리네의 조예로는 도저히 그 온오(蘊奧)를 엿보기 어려울 만한 대가임을 놀랬다. 심상한 서찰이라도 일종의 필의(筆意)가 있었으며 가끔 과체행시(科體行詩)를 장난삼아 지어 놓고 혼자 웃고 보다가 찢어버리고 마는데, 그런 것까지도 붓이 가고 신채(神采)가 돌지 아니 하는 것은 없었다. 오직 서자(書字)가 극히 졸(卒)하여 어떤 데 보면 천자(千字)짜리의 습자 같기도 한 것은 천재의 일이(一異)다."- 정인보,「잔억(殘憶)의 수편(數片)」,『개정전집』下, 461쪽~462쪽.

 

단재는 단군의 역사적 존재와 의의를 크게 강조하였다. 그것은 마치 고려시대 보각국사 일연(一然)이 몽고의 침입으로 국가 존립이 어려울 때에『삼국유사(三國遺事)』5권을 편찬하면서 우리 민족의 공동 시조로서 단군을 인식한 것과 비교된다. 일연의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강조는 몽고족의 압박과 간섭이 격심했던 상황에서 민족적 자각이 크게 대두되었던 당시의 시대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단재를 비롯하여 중국권 내에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교헌(金敎獻)·김좌진(金佐鎭)·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조완구(趙琬九) 등 망명지사들이 모두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신앙인이거나 지지자였던 것은, 대종교의 교지가 망국의 처지에서 민족적 구심점을 찾아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지와 일치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재는 중국 망명 시절 내내 대종교에 많은 연구와 관심을 보였다. 서간도 시절에 대종교 계열의 동창학교의 교재로 저술한『조선사』는 그 후의『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에 흡수된 것이 정확하다면 “단군 시대의 저술은 대종교의 고대사 서술과 유사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신채호의『조선상고문화사』의 단군 시대 서술이 특히 상세하지만 모두 대종교에서 설명하는 내용에 의거하고 있다”는 평가에 믿음이 간다.

 

●『중화보』·『북경일보』에 논설 집필

 

궁핍한 생활은 북경 망명 시대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당시만 해도 북경에는 한국인이 많이 사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역에서 직업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배운 것이 글 쓰는 것과 할 일이 독립운동뿐인 망명객에게 궁핍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당시 북경에서는 유력한 중국 신문으로『중화보(中華報)』와『북경일보(北京日報)』등이 발행되고 있었다. 단재는 두 가지 목적에서 이들 신문에 글을 썼다. 중국인들에게 일제의 침략주의와 야만성을 폭로하여 한·중 두 나라가 일제에 공동 대응하도록 하는 독립운동의 방편과, 생활비를 벌기 위한 원고료 수입이 목적이었다.

 

일찍이 러시아의 철학자 벨자예프는 “그를 알고부터 내게 있어서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인(人)’과 ‘그와는 무연(無緣)한 사람’의 두 종류로 분류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전에 그에 대해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고 문학적 라이벌 관계이던 톨스토이가 그가 죽고 난 15년 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만은 남겨두어야 한다”라고 극찬했던 책들도 사실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계수단으로, 빚을 갚기 위하여 쓴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뿐 아니라 수많은 문인, 작가, 철학자들이 생활에 쪼들리면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펴낸 것이 인류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단재도 마찬가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나 만주, 상해 그리고 북경에서도 그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나라 잃은 망국노에게 러시아인과 중국인들에게 그는 낯선 이방인이었고, 그에게는 먹고 사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 여기에 성벽은 특유의 ‘고집’과 ‘기벽’이 심하여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

 

『중화보』와『북경일보』에 어떤 경위로 논설을 쓰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 기고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단재의 1차 북경 시대와 1910년대 후반기 그의 사상과 철학, 국제정세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신문에 쓴 글을 찾아 연구, 분석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단재는 이 시기에 자신의 생계를 전적으로 의존하던『중화보』에 쓴 논설을 신문사에서 임의로 고쳤다고 해서 집필을 거부하였다. 신문사에서는 단재의 논설로 발행 부수가 4000부~5000부나 증가하였으므로 사장이 수차 찾아와 사의를 표하였으나 질책만 받고 물러나야 했다.

 

신문사에서 고친 것은 조사인 ‘의(矣)’자에 불과했다. 어찌보면 조사 ‘의’자는 있으면 무방하지만 없다고 해서 크게 문장이 달라지는 글자는 아니었다. 여기서도 단재의 글쓰기의 ‘엄격성’을 찾게 된다.

 

단재는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멸시해서 함부로 글자를 고친 것이라고 분개하면서, 오히려 원고료 수입을 위해 집필을 응낙한 것을 뉘우쳤다.

 

단재는 자신이 써 놓은 글에 마음이 차지 않으면 얼마 후 찢거나 불태워 없앴다. 이렇게 하여 소실된 원고의 분량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홍명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단재는 자기의 고심 연구한 것을 초(草)하다가 갑자기 없애버리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초한 것을 다시 살펴보고 불만을 느끼는 가락일 것이다. 그의 불만하여 하는 모양으로 보면 그의 역사상 연구가 멘텔리란 학자의 수학, 언어학 지식과 같이 암중에 매몰되고 말른지도 알지 못할 일이다. 주옥이 매몰됨을 아까워함은 상정이니 나는 한갓 나의 친구를 위하여 모충(謀忠)함이 아니요, 심상한 주옥으로 피지 못할 단재의 연구를 일단이라도 매몰치 아니하려고 함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편지로 단재에게 권하기를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중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느 기회에 이 사초(史草)처럼 간행하게 되기를 깊이 바라는 까닭이다."- 홍명희,「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서(序),『개정전집』中, 14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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