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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0. 신채호와 김원봉의 의기투합 ⑵

참의부 |2013.09.12 18:29
조회 130 |추천 0

●『조선혁명선언』의 내용

 

제1장 - 일제는 한국 민족 생존의 적이다.

 

『조선혁명선언』은 5개 부문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强盜)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였다.

 

서두에서 “강도일본(强盜日本)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애고 우리의 정권(政權)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山林)·천택(川澤)·철도(鐵道)·광산(鑛山)·어장(漁場)…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고 도끼로 끊고, 토지세(土地稅)·가옥세(家屋稅)·인구세(人口稅)·가축세(家畜稅)·백일세(百一稅)·지방세(地方稅)·주초세(酒草稅)·비료세(肥料稅)·종자세(種子稅)·영업세(營業稅)·청결세(淸潔稅)·소득세(所得稅)… 기타 각종잡세가 축일(逐日)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라고 격렬하게 일제의 식민통치를 ‘강도’ 행위로 규정한다. 서두부터가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에 비해 투쟁적이며 일제에 대한 적대 인식을 분명하게 명시하였다. 제1장에서는 일제의 한국 침략의 경제적 수탈 측면에 초점을 두고, 국문·국사 등 민족말살정책을 고발하면서 일제를 한국민족 생존의 적으로 가차 없이 선언한다.

 

제1장은 이어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려가 아귀(餓鬼)로부터 유귀(流鬼)가 될 뿐이며 강도일본(强盜日本)이 헌병정치(憲兵政治)·경찰정치(警察政治)를 여행(勵行)하여 우리 민족이 촌보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분한(憤恨)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맹인(盲人)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라 일문(日文)을 국문(國文)이라’ 하는 노예양성소와 같은 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역사(朝鮮歷史)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檀君)을 무(誣)하야 소잔명존(素盞鳴尊)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영지라’한 일본인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强盜政治)를 찬미하는 반(半) 일문화(日文化)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절망(厭世絶望)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뢰(周牢)·가쇄(枷鎖)·단금질·채찍질·전기질·바늘로 손톱 밑 발톱 밀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전제국(野蠻專制國)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옥문에 나온대야 종신불구(終身不具)의 폐질자(廢疾者)가 될 뿐이라”고 일제의 잔학상을 성토하였다. 이어 총독정치의 야만성을 성토한다.

 

˝발명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활발의 기상은 경우의 압박에서 소멸되야, ‘찍도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 편태(鞭笞), 구박, 압제를 받아 환해(環海)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야 우리 민족은 아조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부터 기계가 되야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일본(强盜日本)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로 보아 을사(乙巳) 이후 13도(道)의 의병(義兵)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日本軍隊)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 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거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소화(燒火)한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오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일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에 내여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야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씌어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야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랴 하는도다.˝  

 

총독정치의 야만성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질타한 글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의열단원들은 이 선언문을 읽으면서 일제 타도에 온 몸을 아낌없이 던지고, 일제 당국은 의열투쟁 현장에 살포된 이 선언문을 수거하기에 급급하였다. 선언문 제1장의 말미는 다음과 같은 대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이상의 사실에 거(據)하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强盜政治) 곧 이족(異族)의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제2장 - 강도 정치에 타협·기생자는 우리의 적이다.

 

제2장은 3·1운동 이후 국내에 대두된 자치론, 내정독립론, 문화운동을 일제 협력하려는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매섭게 규탄하였다.

 

˝내정독립(內政獨立)이나 참정권(參政權)이나 자치운동(自治運動)을 거론하는 자는 누구이더냐? 너희들이 동양평화(東洋平和), 한국독립보전(韓國獨立保全)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야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 인민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보호한다고 하고, 조선 인민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하는 신명(申明)의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야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 강도일본(强盜日本)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宋秉晙)·민원식(閔元植) 등 12명의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狂論)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附和)하는 자는 맹인(盲人)이 아니면 어찌 간적(奸賊)이 아니겠느냐?˝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대두된 대일유화론자들에 대한 단재의 질타는 매섭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의 반란군 두목 황소(黃巢)를 질책하는 글을 써서 말에서 거꾸러뜨리고, 구한말에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친일매국노들을 규탄하여 반역도배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는, 사필(史筆)의 맥을 잇는 글이다.

 

˝설혹 강도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慨然)히 차등의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아귀(餓鬼)가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資本主義) 강도국(强盜國)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기개(畿個)) 노예대의사(奴隸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餓死)의 화(禍)를 구하겠느냐?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하종(何種)의 자치임을 물문(勿問)하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초패(招牌)인 ‘제국(帝國)’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하넨 그 부속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허명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느냐? 설혹 강도일본이 돌연히 불보살(佛菩薩)이 되야 일조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還付)하며 내정외교(內政外交)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撤還)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허명(虛名)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奉戴)한다 함이 ‘치욕(恥辱)’이란 명사(名詞)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독립운동가 이정규(李丁奎)는 자신의 회고담에서 단재를 “그의 성격은 한마디로 ‘무사기(無邪氣)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사기’ - “조금도 간사한 기가 없다”라는 말 그대로, 그의 글은 더욱 그러하다. 소절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정론에 거침이 없다.

 

˝일본의 강도정치(强盜政治)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는 누구이더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인 총적(總積)을 가르치는 명사(名詞)니 경제약탈의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기능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인(印度人)·유태족(猶太族)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제일은 금전의 힘으로 그 조선(祖先)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제일은 그 토지의 광(廣)과 인주의 중(衆)으로 상고(上古)의 자유발달한 여택을 보수(保守)함이니, 어데 문맹(蚊盲)같이 시랑(豺狼)같이 인혈(人血)을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일본(强盜日本)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보수한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기개(畿個) 신문, 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자명(自鳴)하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야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거(據)하야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정치하에서 기생(寄生)하라는 주의(主義)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1운동 후 국내에서는 이른바 ‘문화운동론’이 제기되었다. 일제가 3·1항쟁의 거센 민족적 저항을 겪으면서 더 이상 무단통치로는 한국인을 다스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전술적인 변화, 즉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몇 개 일간신문의 발행을 허가하고 문화단체, 문화운동을 허용하였다.

 

민족주의 우파 인사 상당수가 내정독립·자치론·참정권론·문화주의 따위를 내세우며 총독정치 외곽에 참여하게 되면서 무장투쟁론은 급속히 쇠락해져 갔다. 단제의 선언문 제2장은 바로 이에 대한 허구성을 이로(理路) 정연하면서도 날카롭게 통박한 것이다.

 

제3장 - 외교·준비 미몽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을 선언하노라.

 

제3장은 임시정부의 외교론·실력양성론·준비론 등의 허실 투성이인 독립운동 방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승만 등 미주파의 외교론과 도산 안창호 등의 준비론을 비판하고 이동휘 등 러시아나 코민테른과 제휴하려는 세력도 비판한다.

 

˝강도일본(强盜日本)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여좌(如左)한 논자들이 있는데, 제일은 외교론(外交論)이니 이조(李朝)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서 호국(護國)의 장책(長策)을 삼아 더욱 그 말세에 우심(尤甚)하야 갑신(甲申)이래 유신당, 수구당의 성쇄가 어의 외원(外援)의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을 인하야 을국을 제(制)함에 불과하였고 그 의뢰의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갑신(甲午甲申) 양 전역(戰役)에 일본이 수십만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야 청로(淸露)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야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랴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건지려 한다’ 하는 이들은 일검일탄(一劒一彈)으로 혼용탐포(昏庸貪暴)한 관리나 국적(國賊)에 던지지 못하고 공함(公函)이나 열국공관에 던지며 장서(長書)나 일본 정부에 보내야 국세(國勢)의 고약(孤弱)을 해소하야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칼 한 번, 총 한 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외국, 심지어 적국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세력을 성토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을사조약(乙巳條約)·경술병탄(庚戌倂呑)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천년만의 처음 당하던 치욕에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격, 종현성당(鐘峴聖堂)의 칼부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로 보면 타매(唾罵)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仁者)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국망(國亡) 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모모(某某) 지사(志士)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日露戰爭)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었고 최근 3·1운동에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국제연맹’에 대한 과언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분용(奮勇) 전진의 의기를 타소(打消)하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국세가 약한 것만을 빌미삼아 국치를 겪으면서도 적국과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우리 역사에 침 뱉고 상심하는 심경이며, 천편일률적인 외국 의존, 외교론 따위가 오히려 민중의 의기를 없애고 있다고 질타한다.

 

˝제이는 준비론(準備論)이니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비 발덧듯하던 종이쪽으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丁未年)의 헤이그 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야 의문이 되고 전쟁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성패를 불개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莪冠大衣)로 지휘의 대장이 되어 사냥 포수의 화승대(火繩隊)를 몰아 가지고 조일전쟁(朝日戰爭)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쪽이나 본 이들,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 ‘금일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將官)이나 사졸감까지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즉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독립운동 방략 중 준비론자들에 대한 단재의 불신감은 대단히 컸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우리 독립군 장병들이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비현실적인 준비론과 외교론으로 국민의 의기를 타소시키고 있었다. 단재는 이들의 허망과 공론을 질티한 것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각 지사(志士)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들어가며 혹 경향에 출몰하여 십여 성상(星霜)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만치 준비를 외쳤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 없는 회(會)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력(誠力)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의식의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에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100분지 1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일장(一場)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야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제4장 - 양병 10만이 일척의 작탄만 못하나니

 

제4장은 일제를 몰아내려는 새로운 혁명이념으로 ‘민중·폭력’의 두 요소를 바탕으로 아나키즘적 민중혁명과 폭력의 철학을 제시한다.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해야 하겠느냐?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이상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上典)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단재는 이 부문에서 과거의 혁명이 지배세력 교체에 불과함으로써 민중들에게는 아무런 변화의 의미도 없었다고 논술하고 새로운 혁명, 즉 ‘민중혁명론’을 제기한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나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沸騰澎漲)의 열도가 숫자상 강약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戰爭學上)의 정궤(定軌)에 일출(逸出)하여 무전무병(無錢無兵)한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여 외구(外寇)도 구축하나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 각오의 요구이니라.˝

 

단재는 민중혁명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일제의)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主因)되는 강도정치(强盜政治)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격폐(擊斃)하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만중(萬衆)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인인(人人)이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一路)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자(勇者)는 그 의분(義憤)에 못 이기어, 약자(弱者)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야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잔폭(奸猾殘暴)한 강도일본이 필경 구축(驅逐)되는 날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환성(喚醒)하여 강도(强盜)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新生命)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10만이 일척(一擲)의 작탄(炸彈)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 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은「의열단선언문」답게 철저하게 의열혁명론을 주창한다. 양병 십만이 폭탄투척 하나만 못하고 억천장 신문잡지가 민중의 혁명적 폭동만 못하다는 주장이었다.

 

단재는 폭력적 암살·파괴·폭동 등의 목적물을 열거하여,

 

˝1. 조선총독 급(及) 각 관공리,

2. 일본황제 급 각 관공리,

3. 정탐노와 매국적(賣國賊),

4. 적(敵)의 일체 시설물˝

 

을 들었다.

 

제5장 - 이족통치 등 파괴하고 신조선 건설

 

제5장은 다섯 가지 파괴와 다섯 가지 건설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오파괴’의 대상은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및 노예적 문화사상이며, ‘5건설’의 목표는 고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민중, 민중적 조선, 민중적 사회 및 민중적 문화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문은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라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라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 모르면 파괴할지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라는 것”을 제시하여 앞서 인용한 ‘5파괴의 대상’을 들었다.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 다리’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여 부절(不絶)하는 폭력적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여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재의『조선혁명선언』은 대일항쟁기의 모든 독립운동자들과 한국의 전민족 구성원들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제시해준 ‘민족해방전쟁의 선전포고문’이라 할 것이다.

 

● ‘불멸의 문헌’의 역사적 평가

 

단재가 민족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로 전환해가던 ‘과도기’에 집필한『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은 1920년대 초반 이후 민족주의의 독립운동노선과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강도 일본’에도 정치적·도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열단(義烈團)은 이 선언문이 채택된 시기를 전후하여 더욱 가열찬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일제는 의열단을 공포의 대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제는 의열투쟁의 결과 적지 않은 인명과 공공기관이 살상·파괴당했다.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대의 포위 속에서 3시간 반의 총격전 끝에 서대문 경찰서 경부 구리다 외 수명을 사살하여 총탄이 다하여 최후의 일발로 자결하였다.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은 1924년 1월 5일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고자 시도하다가 도쿄 니주바시[二重橋] 사쿠라다몬[櫻田門]에 투척하였으나 불발이 되어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는 1926년 12월 1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여 수명의 사원을 사살하고, 경기도 경찰부의 다바타 경부보를 사살한 다음 일본 경찰대의 추격을 받게 되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 밖에도 제3차 폭탄 국내 반입계획, 대구 부호 암살계획, 북경 밀정 암살계획, 이종암(李鍾巖) 모금사건 등 의열단이 계획하고 실행한 의거는 계속되었다.

 

『조선혁명선언』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과 그 역할에 대해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의열단을 비롯하여 독립운동단체들에게 이념과 신념을 부여하고, 그들의 독립운동을 크게 고취하였다. 의열단원들은 일제에 대한 싸움에서 폭탄과 함께「조선혁명선언」을 들고 혈투를 전개하였다. 비단 의열단원만이 아니었다. 모든 독립운동가들이「조선혁명선언」을 구하여 읽고 감격하여 독립운동에 떨쳐나서게 되었다.

 

둘째,「조선혁명선언」은 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1920년대의 특징 중 하나는 국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일부에 완전독립을 체념한 자치론자들이 대두하여 일제와의 타협론을 제창함으로써 완전독립론과 자치론과 사이에 대립투쟁이 전개된 사태에 있었다.「조선혁명선언」은 이러한 대립투쟁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이 압도적으로 승리케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완전독립과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일제의 강도적 식민지 통치는 혁명에 의해서만 축출할 수 있으며,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민족혁명운동임을 가르쳐주었다. 이 ‘선언’ 이후에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처하고 독립운동을 혁명운동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이 선언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선언’을 통하여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이 바로 한국의 민족혁명운동임을 가르쳐주고 혁명적 민족주의가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사상적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넷째, 당시의 한국민족주의와 민족주의 독립운동노선으로 하여금 당시 ‘시민적 성격’을 탈피하여 ‘민중’을 발견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단재는 이 선언에서 종래의 사회진화론적 관점들과 이에 기초한 시민적 민족주의를 극복하여 민중적 민족주의를 전개하였다. 이 선언 이후에는 조소앙과 임시정부의 삼균주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족주의 독립운동노선이 대부분이 민중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다섯째, 이 선언은 한국민족의 생존과 조건까지 철저히 박탈하는 강도적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 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언’ 이후에 의열단뿐 아니라 백범 영도하의 상해 임시정부까지 단재가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폭력 수단을 채용하게 된 것은 이 선언의 영향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신용하,『증포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370쪽~372쪽 인용.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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