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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1.영웅사관에서 민중사관으로 ⑴

참의부 |2013.09.14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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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단선언」짓고 조선사 강의

 

“현실에서 도피하는 자는 은사이며 굴복하는 자는 노예이며 격투하는 자는 전사이니 우리는 이 삼자 중에서 전사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신채호)

 

관음사의 승려생활을 마무리한 단재는 1924년 말경 독립운동의 폭력 행동단체인 다물단(多勿團)에 가담하였다. 당시 북경에서는 이석영(李石榮)의 아들 이규준과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아들 이규학과 유자명(柳子明) 등이 다물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물(多勿)’이란 단어는 북송 시대 사가 사마광(司馬光)이『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여서위복구토위다물(麗語謂復舊土爲多勿)’ 즉 “고려의 말로 옛 땅을 찾는 것을 다물이라 한다”는 데서 기원한다. 풀이하면 ‘고토 회복’, ‘광복’, ‘국권회복’ 등의 뜻을 가진 고어(古語)이다. 이와 함께 ‘용감’, ‘전진’, ‘쾌단(快斷)’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입을 다물고 행동으로 실행한다’는 뜻도 있다.

 

다물단은 1923년 3월에 김창숙(金昌淑)·배천택(裵天澤) 등이 조직한 국민당(國民黨)이 좀더 직접적인 행동을 감행할 목적으로 1924년 겨울 북경 마사묘(麻四廟) 도보사(북경대학 내)에서 창단하였다. 창단 당시 단장은 황해관이 맡았고, 조도일·이양·이규준·최태윤·김종성 등과 정의부(正義府)의 김동삼(金東三)과 가까웠던 배천택과 한진산··서동일 등이 중심이 되었다. 다물단에는 40명~50명의 단원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든 일을 비밀리에 처리한다는 뜻으로 함구한다는 뜻의 다물을 단체의 명칭으로 채택하였다.

 

다물단의 이념은 자연에서 문화로, 의존에서 독립으로 가기 위하여 스스로 닦고 기르고 자급자족하여 공존공영의 사회성을 기초로 계급적인 구생활을 변혁시킬 것과,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한 보조를 취할 것을 목표로 삼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다물단의 창립과 관련하여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이우민은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1923년 9월경, 북경에 와서 당시 다물단의 단장이었던 황해관을 만나 조선독립운동의 방침에 대하여 두세 가지 협의한 결과 다물단에 입단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1923년 9월경에 다물단에 입단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다물단이 창단된 시점을 훨씬 앞당기고 있다.

 

림유동·고광인 등 한국인 유학생들은 북경대학의 회의실을 빌어 단재를 청하여 조선 역사에 관한 강연회를 자주 열었다. 그 회의에서 단재는 조선이 멸망하게 된 원인과 과정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강연회에서는 다물단의 이념과 행동에 대해서도 논의하였을 것이다.

 

이 무렵 승복을 벗고 하산한 단재는 이회영·김창숙·유자명 등과 왕래하면서 다물단에 참여하고 이들의 권고로「다물단선언문」을 직접 집필하였다. 이회영·김창숙·유자명 등이 모두 다물단의 이론가이고 당대의 문사이지만 선언문을 단재가 맡게 된 것은, 그만큼 사상과 문장·이념이 탁월한 까닭으로서, 단원들이 그에게 선언문 집필을 의뢰한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다물단선언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단재는 북경 소경창(小涇廠)에 있는 이회영의 동생 이호영의 하숙집에서 그와 함께 기거하면서 다물단의 활동을 지도하고 국권 회복의 이상을 젊은 단원들에게 가르쳤다.

 

1925년 4월 단재가 영도하던 단원 황익수·이호영과 의열단원 유자명 등은 북경에서 소문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안정문(安定門) 내 그의 집에서 암살하였다.

 

● 고위 밀정 김달하 처단

 

김달하는 1906년 국내에서 서우학회(西友學會)에 참여했으나 중국에 건너온 이후로는 북양군벌 단기서(段祺瑞)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조선총독부의 밀정으로 10여년간 암약하였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많은 동지들을 적에게 팔아넘기는 등 독립운동의 장애물과도 같은 존재였으므로, 다물단에서 배신자를 응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암살되기 얼마 전 급진무단파의 거두 박용만(朴容萬)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일제와 타협시키는 공작을 꾸며 돈을 받았다는 등 큰 물의를 빚고 있었으므로 북경의 한국인 교포사회에서는 그의 죽음을 모두 당연시할 정도였다.

 

당시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이상재로부터 김달하를 소개받고, 이를 계기로 김달하와 접촉하게 되었다. 심산의 회고록은 김달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김달하는 문학면에서 담부한 재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승훈과 안창호와도 친한 교제를 해오던 사이로 관서 지방에선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선생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자주 김달하와 만나 경사(經史)를 토론하곤 했는데 그럴수록 그의 박학다식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의 다능에 빠져 들어가 점점 마음의 거리낌마저 없어졌는데……〃- 김창숙,『벽옹일대기』, 151쪽~152쪽, 태웅출판사, 1965년.

 

당시 북경 지방에서는 김달하가 일제의 고급 밀정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나 심산은 이를 모르고 가까이 접촉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호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에게서 김달하의 정체를 듣고, 또 그 무렵 김달하로부터 총독부 경학원부제학의 자리 회유를 받은 심산은 김달하의 본색을 알고 그와 절교를 단행하였다.

 

다물단에서는 1925년 3월 일제의 고급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였다. 김달하는 중국 총리 단기서의 비서로 있었고 당시에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이른바 거물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한때 서북학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북경 이주 초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북경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청년대회에 참가한 김달하의 처제 김활란(金活蘭)과 함께 북경에 온 이상재(李商在)가 김달하의 집에 묵게 되면서 김달하를 심산에게 소개하였고 심산은 또 우당을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김달하는 북경의 독립운동의 본거지에 깊숙이 잠입하게 된 것이었으나 심산을 매수하려다가 그만 일제 총독부의 고급 밀정임이 탄로가 났다. 그리하여 3월말 오후 여섯 시경에 이인홍과 이기환이 안정문 내 차련호동 서구내로북(西口內路北) 23호 김달하의 집을 기습하여 처단하였다. 이 사건은 다물단과 의열단의 합작품이었다.

 

김달하는 심산을 회유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안 되어 1925년 3월 30일 다물단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김달하의 처단 과정에 대하여 국내의 한 신문은 “심방왔던 괴청년 일거(一去) 후에 유혈참사, 죽은 지 두 달만에 소문이 드러난 제북경 일 밀탐 김달하 피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피해자 측의 주장을 토대로 보도하였다.

 

˝오랫동안 북경에서 재류하는 조선사람들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아오던 김달하가 죽었다는 소문이 근일에 와서야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죽은 지가 벌써 두 달이나 된 오늘에야 이 비밀이 탄로된 것을 보면 얼마나 관계자들이 이 사실을 감추려고 애를 썼는지 알 것이다. 김달하는 본래 조선 안에서 모 중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총독부의 은밀한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간 후 그간 10년을 자기 직무에 충실한 자인데 그 간에 수없는 청년을 잡아 주기도 하엿고 여간 위험한 땅에도 드나들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중국 정부에 어떻게 되엇던지 소위 참의(參議)라는 벼슬까지 얻어서 한 일까지 있었고, 얼마 전에는 자기 식구 10여명을 솔가하여 북경으로 가서 남달리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금년 봄에는 박용만 사건에 관계되어 더욱 청년들의 주목함이 되었는데 이번에 돌연히 죽은 것도 그 사건에 관련된 듯하다. 어떻게 죽은 전말도 분명치 못하나 그 가족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어떤 날 젊은 청년 두 사람이 주인을 찾아와서 급히 볼일이 있다 하므로 의심 없이 들어오라 하였더니 청년들은 한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안 사람들 보고 하는 말이 주인과 급히 비밀리에 할 말이 있으니 잠깐 안으로 들어가 달라하므로 역시 의심 없이 다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런 후에 시간이 퍽 오래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으므로 나가보았더니 청년들도 주인도 없으므로 아마 무슨 일을 의논하려 나갔나보다 하고 의심도 아니하엿으나 저녁때가 되도록 주인이 들어오지를 않아 퍽 기다렸는데 저녁에 며느리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기에 부엌에 나가 본즉 주인을 목매여 죽인 시체가 피에 쌓여 아궁이 속에 있으므로 크게 놀라 물론 그 청년들이 그 짓을 한 것이 분명하여 즉시 경찰에 통지하여 수색하였으나 우리는 청년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한번 본 것을 잘 기억할 수 없고 경찰에서도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하는데 주인이 죽은 후로는 10여 식구를 지금은 돌봐 줄 사람도 없고 또 총독부에서도 10여년이나 사용한 공으로 생각이라도 해 주련만 그것도 없으니 이제는 거지가 될 밖에 없는가보다고 가족들은 말하였는데 북경 일반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김달하 사건의 진상을 그 이상 알지 못한다더라.˝ -『동아일보』, 1925년 8월 6일자. 

 

이와는 달리 박태원의『약산과 의열단』에서는 실행자 측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925년 3월 의열단은 이들 밀정 가운데서 가장 악질분자인 김달하라는 자에게 마침내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형의 집행을 단원 이인홍과 또 한 명의 동지에게 명했다. 김달하는 당시 북경에 있었다.

 

이 자는 북양군벌의 거두 단기서의 부관으로 있으며, 뒤로는 조선총독부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독립을 위하여 열렬히 싸우고 있는 모든 애국지사들의 비밀을 탐지하여 왜적에게 다 파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하략)

 

1925년 3월 30일 오후 여섯 시 가령 하여서다. 이인홍은 또 한 명 동지와 더불어 이 가증한 경견(警犬) 김달하를 그의 처소로 찾아갔다. 당시 김은 안정문 내 차련호동 서구내로북 문패 23호에 살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니 하인이 안으로서 나와, 누구시냐, 묻는다. 두 동지는 긴 말 않고 곧 그에게 달려들어, 뒷결박을 지우고, 입에다는 재갈을 물려 한 구석에 틀어박아 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함께 방안에 있던 김달하가 “누구냐?”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인홍은 그의 손이 바지 포켓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꿈쩍 말아!

 

한 마디하고 손에 단총을 꺼내들며, 그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그 자의 바지 포켓에 들어 있는 단총을 압수하는 사이에 또 한 명의 동지 이기환은 그 가족들을 차례로 묶었다.

 

“내게 이를 말이 있다. 이리 나오너라.”

 

그들은 김달하를 이끌고 따로 떨어져 있는 뒷채로 갔다. 그리고 품에서 한 장 문서를 꺼내어 탁자 위에 펴놓았다. 곧 의열단에서 내린 사형선고서다.(중략)

 

그들이(식솔들이) 집안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뒷채에 찾아 이르렀을 때 그들의 가장은 이미 차디한 한 개 송장이었다.˝ - 박태원,『약산과 의열단』, 171쪽~173쪽, 깊은 샘, 2000년.

 

김달하의 처단과 관련하여 일제 측 자료「고등 경찰요사」에는 “다물단원 황익수, 이호영 등과 의열단원 유자명 등의 공모 행위라는 것은 당시의 여러 상황에 의해 분명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다물단원과 의열단원의 합작품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고급 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것은 이회영·신채호·유자명 등 다물단과 의열단 지도부에 의해 이루어진 쾌거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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