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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기담 시리즈-임진왜란3(+추가)

기담 |2013.09.16 03:29
조회 36,306 |추천 77

 


3. 기록되지 못한 비극

 

(이 얘긴 좀 진지하고 싶으니까 음슴체 안쓸게요..)

 

대마도에 우나쓰라 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거기엔 묘가 하나 있는데

 

묘패엔 '朝鮮國王姬の墓(조선국왕희의묘)'라고 쓰여있다.


한자를 풀이해보면 조선나라 왕희의 묘라는 소리다.

 

왕희는 무엇인가.

 

임금왕, 아가씨희..즉, 임금의 딸이라는 일본식 표현이다.

 

그렇다면 조선 어느 왕의 딸이라는 걸까?

 

그 해답으로 무덤에는 이연 왕희라고 쓰여있다.

 

이연은 조선 선조임금의 이름이다.

 

즉, 조선국왕희, 이연왕희가 뜻하는 것은 한때 조선 선조임금의 딸, 옹주로 살던 여인이라는 말이다.

 

그럼 대체 왜..조선 임금의 딸이 이렇게 연고없는 일본 땅에 쓸쓸하고 초라하게 묻혀있는 것일까.

답을 한마디로 하자면 임진왜란 때문이다.

 

순서대로 살펴보면

 

딱 조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에 왕이 되어 하필 터진 임진왜란 덕에 무능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 선조에게는 임해군, 광해군 말고도 딸이 있었다.(부인 8명에 14남 11녀)

 

그 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찾아보려고 선조의 가계도에 나와있는 공주, 옹주를 모두 검색해보았으나 가계도에도 없다..하긴 조선왕조실록에조차도 기록되어있지 않는 사건이니까..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임해군과 임해군의 4살아들, 6살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선조의 딸, 임해군의 누이도 같이 끌려가게 된다.

 

무능한 선조임금은 혼자 도망가기도 바빴기에 차마 자식들 챙길 여력도 없었다고 한다.

 

임해군은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임해군의 누이와 아이들은 돌아갈수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임해군의 입장은 부모로써 몹시 애통한 일이지만 본인 하나 살려준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할 만큼 일본이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 살려주고 내 아이들까지 돌려달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조의 입장은..글쎄..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왜 데려오기 싫었는지 나온다.

 

아무튼..

 

일본에 남은 선조의 딸과 손주들의 행적을 보면

 

임해군의 아들은 가토 기요마사의 양아들이 되어 살면서 조선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13세에 승려가 된다.

 

일연스님.

 

그가 임해군의 아들이다.

 

왜 승려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겠지만 불공을 쌓으면 누이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갈수 있지 않을까 해서라고 한다.

 

스님이 되어 살면서 그는 종교가 없던 일본인들을 교화해 불교를 믿게 만들었고 그러다가 일본 불교계의 최고봉인 성인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지금 후쿠오카에는 일연스님이 창건한 묘안사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엔 현해탄을 바라보는 슬픈 눈동자의 목상 하나가 있고 그 이름엔 임해군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불공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원대로 고모님이나 누이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임해군의 아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양아들이 되어 귀여움을 받고 살았던 것과 달리,

 

임해군의 딸은 가토 기요마사의 최측근인 니와세 지방 영주의 양딸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그 영주의 측실이 되어 성노리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이연 왕희...

 

가계도에도 없고 실록에도 없고 이름조차 없는 그녀는 이미 일본에 온 순간부터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길거리에서 겁탈을 당했기 때문.

 

길거리에서 그렇게 당하면서 소리내어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울면서 소리쳤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일본 고서 기록에 전하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온 포로 신세의 그녀는 더 이상 조선의 왕족도, 고귀한 신분도 아니었으니까.

 

그러한 이유때문에 선조 입장에서는 겁탈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데리고 돌아와봤자 안좋은 취급만 받을 것인데 사실상 겁탈까지 당한 더러운 몸이 되었으니 그 비겁한 성정에 딸이라고 해도 데려오기 싫었던것.

 

일연스님이 된 임해군의 아들은 멀쩡했는데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숙부인 광해군때문이고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알수있다.

 

선조임금이 유일한 적자, 어린 영창대군을 다음왕으로 올리길 바라고 죽었는데

 

서자중에서도 둘째아들이라 전혀 계승권이 없는 광해군이 왕자리가 탐이 나 5살인가 몹시 어린 막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 방에 가둔 다음 아궁이에 몹시 뜨겁게 불을 지펴 익혀서 죽였고

 

영창대군 세력인 임해군은 강화 교동도로 유배보내 죽였으며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는 궁에 가둬버리는 어마어마한 짓을 벌인것도 모자라

 

억불숭유 정책까지 해버려서 도저히 그가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해군이 그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

 

결국 일연스님, 이름모를 옹주, 임해군의 비운의 둘째 딸은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쓸쓸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단종과 안평대군 / 수양대군

고종과 덕혜옹주가 생각나는 오늘의 이야기..

 

이야기를 마치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포로로 끌려가 한많고 비참한 생을 살았던

홍호연과 선조의 후손들을 역시 같은 시기에 운명의 장난처럼 일본인에서 조선인이 된 김충선이 조선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일본에서 그들을 돌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광해군이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제 말에 오해가 생겼네요..ㅋㅋ 결코 평가절하하는거 아니구요~

불과 십수년전 초딩때 처음 계축일기라는 만화로 된 책을 봤는데 거기서 광해군을 굉장히 돼지같은 빌어먹을 놈(?)으로 그려놔서 와 나쁜놈이네 했는데 성장하면서 보니까 멀쩡하다 못해 많은 업적을 이룬 똑똑하고 재능이 아까웠던 인재더라구요..그거랑 같은 맥락에서 쓴거예요^^;

 

 

추천수77
반대수6
베플왓더뻑|2013.09.16 22:49
광해군이 임해군, 영창대군 사사한것과, 인목대비 유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봄. 영창대군은 왕이 된 광해군의 가장 큰 정적이였고, 광해군도 죽이길 꺼려했다고 함. 임해군은 성격이 괴팍했으며, 자꾸 광해군 행보에 누를 끼치는 행동을 함. 그래도 친형이라 납두려고 했지만, 광해군 측근들인 북인들이 강력히 사사를 원했음. 당시 광해군은 불안한 입지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세력이 작았음. 또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이 사사되자, 복수(?)의 움직임을 보였다고 함. 솔직히 광해군에게 힘을 못 실어준 선조의 잘못이 제일 큼. 또 광해군이 나쁘다 치면, 지 동생들 죽인 태종이나, 지 친형 암살했다고 의심받고 조카마저 죽인 세조나, 지 아들, 며느리, 손자들 모조리 몰살한 인조나, 자기 아들 귀주에 갇혀 죽게한 선조는 개객끼들임. 특히 인조, 정치라도 제대로 했음 몰라. 광해군은 자기 세력을 통제 못한게 흠이였지만, 중립외교에 전후복구도 한 훌륭한 왕임. 재건 하는일은 어려워서 세종도 쉽게 못했을 거임.
베플미소양|2013.09.16 14:32
저도 밑에분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광해군이 차라리 계속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병자호란이나 정묘호란을 겪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무래도 서인이 승리했으니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베플L|2013.09.17 10:17
안타깝네요 조선에선 왕녀의 신분이었는데 어린나이에 낮선 땅에서 겁탈당하고.. 저분들을 한국으로 다시 모셔서 묻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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