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인의 참모습, 행동하는 지식인
아나키즘으로 무장한 단재는 즉각 행동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의 취약성은 이념과 실행의 이율배반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에는 시대정신이 있게 마련이고, 시대정신을 찾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며 존재가치다.
헤겔은 지식인의 역할을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비유하면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한낮이 끝나고 어둠이 짙어지면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지식인을 관념의 소유자, 즉 참여나 행동보다 뒷처리나 하거나 해석하는 부류로 평가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헤겔의 주장은 지식인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고 그 기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발언이다. 지식인이 시대정신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 기능자’이거나 ‘지식 판매자’일뿐이다.
인류사는 깨어 있는 소수의 지식인, 올곧은 창조적 지식인들에 의해 발전해 왔다. 그들은 전제권력과 봉건적 인습, 무지몽매와 싸우면서 진실과 정의와 자유를 쟁취하는 데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찾고 지키는 데 끔찍한 고통과 수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의 희생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가 열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은 민족해방투쟁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지식인들은 왜적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채 민족 반역의 길을 걸었다. 당연히 부귀와 영화가 따르고, 유산은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반면에 소수의 지식인들은 민족해방의 깃발을 들고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고난이 따르고 후손들에게는 영락(零落)이 유산으로 남겨졌다.
밀로반 질라스는 ‘신계급’을 논하면서 자기가 참가했던 혁명이 새로운 독재와 새로운 귀족계급을 탄생시키는 방향으로 반동화하자 단호한 태도로 그들과 결별하고 추상같은 비판자로 나섰다. 가혹한 형벌이 따르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면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인의 한 전형이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바칠 영웅교향곡을 만들었다가 그가 권력에 눈이 멀어 황제에 취임하자 가차 없이 찢어버리고 교향곡을 다시 만들었다. 이것은 참 지식인의 용기이다. 공자는 위나라의 영공(靈公)이 환자(宦者)와 같은 수레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위나라를 떠나서 진나라로 갔다고 한다. 이것은 지식인의 도덕성이다. 조담(趙談)이 천자와 같은 수레를 탔다고 해서 원사(遠絲)는 얼굴빛이 변했다고 한다. 이것은 지식인의 순수성이다. 토크빌은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그에 대한 고발장에 서명한 후 스스로 감옥행을 택했다. 이것은 지식인의 소신이다.
● 순결한 지식인의 순교주의
서러운 역사의 땅, 고난의 시대에 나라 망한 아픔을 겪으며 중원 천지를 유랑하는 선비 지식인 단재는 어언 40대 중반에 도달하였다. 망명생활도 십수년에 이르렀다. 몸에 병마는 떠나지 않고 하루 한 끼 식사도 쉽지 않았다.
식생활을 해결하고자 승려가 되었지만 조국의 일을 생각할 때 가사를 걸치고 절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념·지방색·자리다툼까지 겹쳐 분열하여 싸우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희망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항일 조국해방투쟁의 방법 중에서 가장 격렬한 방법론을 주장하고, 이 길을 걸어온 단재에게 아나키즘은 구원의 마지막 목적지이고 수단이었다. 아나키즘을 통해 민족의 고통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고통받는 민중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초기 자강사상의 한계점을 민족주의로 발전시켰으며, 민족주의의 한계를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또 점차 시들어가는 독립운동 진영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단재가 강력한 민족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영웅대망론에서 민중혁명론으로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된 데에는 3·1운동의 실패에 대한 충격과 좌절에 있다. 초기에 일제의 강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웅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영웅주의 사관에 심취하여 양계초의『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출판하고, 이탈리아의 운명이 한국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탈리아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있었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있었고, 이탈리아에 시저가 있었는가 하면 한국에는 연개소문이 있었으며,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가 하면 한국은 남북서로 일본과 러시아와 청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라고 썼다.
‘영웅사관’이 이상론으로 그치지 않고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 중 을지문덕과 최영을 주제로 한『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쓰고『이순신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3·1항쟁을 멀리에서 지켜보면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3·1운동에서 지도부의 비폭력주의와 달리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와 항쟁을 보고 민중의 저력을 알게 되었다. 또 독립운동 진영에서 명망가들이 몸을 사리고 있을 때에, 무명 독립군과 의열단원들의 자기희생을 목격하면서 민중직접혁명론을 체화(體化)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제국주의 폭력지배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으로는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폭력을 수반하는 아나키즘의 폭력혁명사상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적인 추이는 1920년 북경에서 결성한 군사통일촉성회에서 나타나고, 1921년 5월 역시 북경에서 김정목, 박봉래 등과 함께 발기한 통일촉진회에서 드러났다. 단재는 통일촉진회 취지문에서 ①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하고 ② 정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하며 ③ 군사 각 단체를 완전히 통일해서 혈전(血戰)을 전개한다고 천명하였다.
1922년 의열단선언문인「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현실을 해소·타파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1920년대 식민지 민족주의의 이념과 실천적 민족독립운동이 당면한 역사적 현단계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1924년 다물단 참여와 비슷한 시기에 아나키즘 선언 그리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 가입에 이르러, 생애의 마지막 혁명의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재는 폭력혁명론을 주창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는 등 일제와 최후 결전의 길에 나섰다. 이것은 순결한 지식인이 선택한 마지막 순교주의자의 길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