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의 대장부 단재 신채호
단재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대장부다. 비록 체구가 왜소하고 병약하며 말이 어눌한 데다 필체까지 난필이어서 신언서(身言書)가 대장부의 격(格)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체구가 왜소해도 형형한 눈빛은 의로움과 역사를 통찰하고, 어눌한 언중(言中)에는 중천금(重千金)이 실리고, 난필의 문장은 민족사관의 사통(史統)을 정립하였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엄정한 판별력이 있었다. 신언서를 두루 갖추어도 시대와 정(正)과 사(邪), 아(我)와 비아(非我)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찌 대장부라 할 터인가?
단재는 대장부(大丈夫)라 일컬어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맹자(孟子)는 대장부의 기품을 ‘호연지기(浩然之氣)’로 표현하였다. “천하의 광거(廣居)에 살며, 천하의 정위(正位)에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함으로써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道)를 행한다. 부귀도 그 마음을 음란하게 할 수 없으며, 위무(威武)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를 대장부라 한다”라고 정의하였다.
단재를 여기에 대입하면 ‘대장부’임에 손색이 없다.
항일언론운동과 역사 연구와 민족해방운동을 일체화시키면서 뜻[志]은 대쪽같이 바르고 기(氣)는 솔같이 푸르렀다. 명리(名利)는 한낱 띠끌 같이 여기고, 대의(大義)·청절(淸節)에 굽힐 줄 몰랐다. 뜻과 학문과 행동이 일치하여 조국광복에 온 몸을 던지고 정작 자신과 가정을 위한 영생(營生)에는 뜻도 재간도 없었다.
시인이며 국학자인 조지훈(趙芝薰)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애국지사(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 이것이 한용운 선사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른 양자를 저변으로 한 정점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한용운’을 ‘신채호’로 바꾸면 영락없이 단재의 진면목이 된다. 여기에 ‘역사 연구’의 항목을 더 추가하면 될 터이다.
단재의 성품과 학행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받은 남명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당대 유학자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그의 문하에서 저명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상도 지방의 의병대장은 대부분 그의 문하생들이었을 만큼 행동하는 의열 지식인들을 배출하였다.
남명은 ‘벽립천인(壁立千刃)’ ‘태산교악(泰山喬岳)’ ‘추상열일(秋霜烈日)’ ‘부시일세(俯視一世)’의 선비로서의 기상을 추앙받았다.
문목공(文穆公) 정술(鄭述)은 남명의 제문(祭文)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천지의 순강(純剛)한 덕을 받고, 하악(河嶽)의 청숙한 정(精)을 한 몸에 모아 재식(才識)은 한 몸에 눌렀고 기개는 천고(千古)를 덮었다. 지혜는 족히 천하의 변(變)을 통하고 용맹은 족히 삼군의 수(帥)를 빼앗을 만했다. 태산교악의 기상으로 천길 벼랑에서 옷깃 흩날리고 봉황이 고상(高翔)하는 양 청고(淸高)한 지취(志趣)는 구만장천 막힐 때가 없었다.”
단재의 제문을 이렇게 쓴다고 해도 한 구절 바꿀 대목이 없겠다. 한학자 김동강(金東岡)은 남명을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단재를 남명에 대체하면 어떨까?
˝천성이 강개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분이지만 국정의 잘못과 생민(生民)으로의 어려움을 걱정함에 미쳐서는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었다. 자기를 낮추어 쓰임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를 굴하여 세속에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고만(高輓)한 자세로 세상을 굽어본 적극적 숙세주의자(淑世主義者)이다.
그렇게도 선비들이 추구하느라 구심투각(鉤心鬪角)하던 벼슬을 받지 아니하여 이른바 “선비는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제후의 벗이 되지 아니한다”는 고고탁절(孤高卓絶) 독립특행(獨立特行)하는 선비의 진면목을 보여준 개결한 인물이었다.
중류(中流)의 지주(砥柱)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탁류에 버티고 서서 격탁양청(激濁揚淸)의 가치를 들었다.˝
단재가 그때에 살았으면 남명이 되었을 터이고, 남명이 조선 말기 실국기에 살았으면 단재와 같이 언론·역사연구·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쳣을 것이다. 이들은 태산교악의 기상과 고매한 자세로서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제후의 벗이 되지 아니하면서” 고고탁절하게 ‘중류의 지주’처럼 살았다.
남명이나 단재는 타고 나심이 고결하고 사색함이 정치(精緻)하며 태산같은 기상과 추상같은 위엄으로 시대의 사표가 되고 역사의 큰 거울로 남았다. 역사학자 김용덕은 단재의 정여립(鄭汝立) 평가를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정여립은 조선 시대에 있어서 저명한 소위 ‘역적’의 한 사람이다. 나는 다산(茶山)의 세습군주제도를 부인하는 근대적 사상인 ‘탕론(湯論)’ ‘원목(原牧)’ 등의 사상의 원류가 어디 있는가를 찾아 올라다가다 정여립은 나의 중봉(重峯) 조헌(趙憲) 연구에도 깊이 관련되는 인물이며, 거기 관한 논문을 이미 탈고하고 마음속으로는 상당한 발견임을 남몰래 자부하고 있었는데, 단재는 이미 정여립을 “4백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상권20쪽)이라고까지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편(一片)의 지적을 가지고도 나는 단재의 비범한 사관을 실감할 수 있엇으며, 단재와 한 가닥 학연(學緣)마저 느꼈던 것이다.˝ - 김용덕,『한국사수록(韓國史隨錄)』, 376쪽, 을유문화사, 1984년.
김용덕은 또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단재가 탁월 초범한 역사가임은 분명하다. 범상히 보아 넘기던『구당서(舊唐書)』「백제전(百濟傳)」이나『남제서(南濟書)』「백제전」속에서 매몰된 백제의 경이적인 해외 발전을 발굴한 것은 큰 공적이며, 앞으로 약진이 예견되는 백제사 연구의 초석을 놓은 것이며, 한사군(漢四郡)의 역사 지리적 문제 및 그밖의 수많은 발견들은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만신창이가 된 우리 상고사를 재구성 재건하는, 실로 혁명적인 연구라고 할 것이다.˝ - 김용덕,『한국사수록』, 378쪽, 을유문화사, 1984년.
김용덕의 다음 글도 참고할 만하다.
˝단재의 대표작은『전후 삼한고』라고 생각한다. 단재는 이번에 나온 보유편에 영인 수록된『전후 삼한고』서문에서 “진단(震壇)이 곧 신소도(臣蘇塗)요, 신소도가 곧 신단수(神檀樹)인데 진단을 역명(域名)이라 하고 신소도를 국명이라 하고 신단수만을 제단의 나무로 아니 이 어떠한 혼돈이냐”라고 하고, 이어 “삼한은 조선의 삼왕(三王)이요 진국(辰國)은 대국의 의(義)로 조선의 존칭이며, 진변마(辰卞馬)는 삼한 각자의 이 명칭의 이명 동체임을 몰라 조선 이외에 삼한을 찾고 삼한 이전에 진국을 찾고 진번막과 진변마를 아무 관계 없는 딴 물건으로 보니 이 어떤 착란이냐”라고 강조하엿으니 이것이 단재 학설의 핵심이다.˝ - 김용덕,『한국사수록』, 376쪽~377쪽, 을유문화사, 1984년.
단재의 사관에 대해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다.
〃신채호 사학 역시 일본 어용 사학의 역사 왜곡에 정면으로 맞선 반식민사학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지만, 또 그 때문에 갖는 제약성도 많았다.
우선 신채호 역사학 역시 관념적·정신주의적 성격이 짙었다. 우선 그의 고대사 인식은 이른바 낭가사상(郎家思想)을 지주로 하는 정신주의적 역사관에 치우쳤으며, 민족사의 구원성(久遠性), 민족의 단일성, 신성성(神聖性) 등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단군 시대를 하나의 왕조 시대로 정착시키고 삼조선(三朝鮮)의 발전으로 연결시켰지만, 역시 그 실증성에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신채호의 역사학은 애국 계몽 운동기의 사상계를 지배하다시피 한 사회진화론의 영향 때문에 ‘민족주의적 영웅사관에 깊이 경도’ 했었고, 그의 투쟁사관도 “끊임없는 민족 흥망의 투쟁 속에서 영원히 승리자가 되라는 투쟁의 반복이 있었을 뿐, 진보도 발전도 고려되지 않는 점에서 그의 역사인식의 근원에는 역시 니힐리즘이 도사리고 있게 되는 것”으로 평해지기도 하며, 그의 민중사관의 모색도 “개인 중심의 자강론적 영웅사관의 자기 수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한 사회 집단으로서의 자강론적 사회 심리 혹은 민족 심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국의 부국강병책과 자강주의적 팽창 정책을 의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단재 사상의 전체주의적 성격이 배태된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조선혁명선언」에서 나타나는 그의 민중사관을 영웅사관의 변형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 역사 인식의 하나의 전단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데는 다시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에 사대주의적·충군주의적 역사 인식을 극복하고 부르주아적 국민주의 국가의 민주주의 발전을 뒷받침해야 할 시대적 요청에 적면해 있던 신채호의 역사학은 사회 진화론적 적자 생존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의하여 그의 조국이 식민지화함으로써 그것에 저항하기 위한, 역시 사회 진화론적 자강론으로 무장한 투쟁주의 역사관과 또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신주의 역사관에 빠져들엇던 것이다.
신채호의 경우, 국내의 식민지 치하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사회과학적 이론을 어느 정도 광범위하게 섭취함으로써 그의 정신주의적 역사 인식은 상당히 수정되어 갔고, 또 그것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으므로, ‘조선혁명’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부르주아적 역사인식의 한계를 어느 정도 넘어선, 이른바 민중사관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 계승된 민족주의 역사관은 식민지 치하에서의 한계성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강만길,「일제강점기의 반식민사학론」,『한국사학사의 연구』,244쪽~245쪽, 한국사연구회 편, 을유문화사.
단재의 역사인식은 봉건왕조의 사관을 거부하고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제시하는 진보성을 보이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역적’ 정여립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정여립이 “충신은 이군(二君)을 불사(不事)하여 열녀는 이부(二夫)를 불경(不更)한다”는 유가 윤리관을 일필로 말살하여, “인민에 해되는 군(君)은 시(弑)함도 가하고 인의(仁義) 부족한 부(夫)는 거(去)함도 가하다” 하며, “천의 인심이 이미 주실(周室)에 거하였는데 존주(尊周)가 무엇이며, 인중(人衆)과 토지가 벌써 조조와 사마(司馬)에게 돌아갔는데 구구일우 유현덕의 정통이 다 무엇이냐” 하는 공구(孔丘), 주희(朱熹)의 역사필법을 반대하니, 그 제자 신극성 등은 “아는 참 전성(前聖)의 미발(未發)한 말씀이다˝ 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 재기와 학식에 경도하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 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扶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집을 지어 전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은 돌비적·혁명적 학자를 용납하리오.˝ -「조선상고사」총론,『개정전집』上, 71쪽~72쪽.
단재는 매천 황현의 순절 소식을 듣고, “신성한 죽음은 시비도 잊으며 훼예도 잊고 오직 나의 사랑하는 바를 위하여 피를 머금고 칼이나 총머리에 엎어지는 죽음이니라”고 평하였다. 어김없이 단재 자신의 순절에 대해 덧붙여도 손색이 없는 평이라 하겠다.
단재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홍명희는 단재의 옥사 소식을 듣고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라고「곡 단재」에서 썼다. ‘죽어서도 사람’인 단재 신채호는 억압과 광기만이 날뛰는 일제강점기에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준 희망이고 광명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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