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고학자들과 고전학자들의 증언
1.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올브라이트 박사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고고학에 의하면 구약 전승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와 19세기의 중요한 역사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과다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의심들은 지금도 종종 제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의심들이 점차 근거가 없는 것들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들이 거듭되면 될수록 성경의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성경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2. Yale 대학의 Millar Burrows : “고고학은 여러 사례를 통하여 근대 비평가들의 논리가 가상적이고 실제적이 아니며, 역사적 발전 단계를 인위적으로 적용했음을 증명했다….”
3. Merrill Unger : “구약 성경 고고학은 모든 나라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중요한 인물들을 다시 소생시켰다….”
4. Frederic Kenyon : “지난 19세기 후반기를 휩쓸었던 성경 회의론자들의 비판에 관하여 고고학이 그 허구성을 증명함으로써 고고학은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
5. 고고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는 F. Albright : “고고학이 실제로 구약 성경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6.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고고학 전문가인 넬슨 글루엑 박사도 평생 성경 고고학을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성경의 기록을 부인한 고고학적 발견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개괄적으로, 혹은 세세하게 확증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2) 가장 최근에 발견된 그다랴의 인장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인물인 그다랴 (게달리아 벤 파슈르)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완전한 형태로 발굴됐다고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가 2008년 8월 19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히브리대의 에일라트 마자르 교수팀은 최근 예루살렘 성벽의 남쪽 출입구인 분문(Dung Gate) 근처 지하에서 구약 성경의 예레미야서(38장 1절)에 나오는 그다랴의 점토 인장을 찾아냈다. 2천600년 전에 사용된 지름 1㎝ 크기의 이 인장이 출토된 지역은 마자르 교수팀이 2005년 유갈(예후칼 벤 셸레마야후)의 인장을 찾아낸 곳이기도 하다.
예레미야서에 함께 나오는 그다랴와 유갈은 고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제데키아) 휘하에서 장관직을 지낸 인물들로 전해지고 있다. 마자르 교수는 성경의 같은 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들이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기는 이스라엘 고고학 발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자평했다.
유갈의 인장은 마자라 교수가 다윗 왕 궁전으로 추정하는 석조 구조물 지하에서 발굴됐고, 그다랴의 인장은 같은 구조물의 외벽 밑에서 출토됐다.
3) 창세기의 사실을 밝혀낸 고고학
성경의 창세기는 특별히 많은 비평가의 도전을 받아온 책이다. 창세기 4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이 구절은 라멕의 아들 두발가인이 청동과 쇠로 물건을 만드는 최초의 금속 세공인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청동기 및 철기 시대를 더 최근의 시대로 잡았기 때문에 이 기록이 심한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3,000년부터 철제 무기와 도구들이 등장했음을 발견했고, 텔 아스마르에서는 기원전 2,700년 경의 철제 단도 손잡이를 찾아냈다. 이 발굴로 성경의 기록과 연대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가 입증되었다.
4) 아브라함은 실재의 인물인가?
성경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성경의 유명한 인물로서, 성경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70여 년을 살아온 본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75세 되던 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믿음으로 떠났다(창 11:31~32, 12:1~5, 히 11:8). 그때는 기원전(B.C.) 1875년경으로 이 일이 성경에 나오는 구속 역사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215년 후인 기원전 1660년에는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고, 그 후 215년 후인 기원전 1445년에는 출애굽이 있었다(갈 3:7; 출 12:40). 아브라함의 살던 도시 우르는 1853년 영국인 테일러(J. Taylor)에 의하여 ‘텔텔 엘-무카이야’(Tell el-Muqayyar)를 발굴함으로써 드러났다.
1. 우르의 생활 모습
고고학자들이 우르를 발굴한 결과, 아브라함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900년 경의 거주지에서 성경의 사실과 조화되는 여러 가지 유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당시 태양빛에 말린 고운 흙가루로 만든 진흙 벽돌로 지은 이층집의 폐허를 발견해 내었으며, 그 외에 흙을 구워 만든 도기로 깐 안뜰, 물통과 대야가 놓인 로비, 붉은 도기 배수관을 가진 수세식 화장실, 화로와 맷돌이 놓인 부엌,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식 층계 등등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10여 개의 방을 가진 이층집들의 흔적도 발굴되었다. 그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브라함 당시의 집들은 현대식 문화 주택처럼 편리한 구조였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의견이었디. 이러한 편리한 도시와 안락한 집에서 살던 아브라함이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 아브라함의 애굽 피난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그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때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다(창 12:11).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사실을 밝혀 주는 역사적인 증거가 고고학을 통해 밝혀졌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기원전 1900년경)에 살던 애굽(이집트)의 동부 쪽 사막 지방의 고급 관리였던 크놈헤텝 (Khnumhetep)의 무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 무덤은 베니 하산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그 무덤 속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무덤 벽화는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37명의 셈족 계통의 아시아 사람들이 이브샤라고 부르는 지도자를 따라 팔레스타인 쪽에서 이집트로 들어오는 그림이었다. 크놈헤텝은 자기 생전에 겪은 인상 깊은 사실을 자신의 무덤 벽화로 남긴 것이다.
또한, 큰 강이 없는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들면 아시아 사람들은 나일 강의 혜택을 누리는 이집트의 동부 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음이 여러 기록에서도 밝혀졌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당대의 역사의 사실들과 정확하게 일치된다(창 43장 참조).
3. 함무라비 법전이 밝힌 아브라함의 가족 문제
모르강(Jaques De morgan)이 지휘하는 프랑스 발굴단은 1901년 12월과 1902년 1월 사이에 페르시아의 옛 수도 “수사”에서 8피트 높이에 검은색 섬록암 입석으로 된 돌을 발굴하였는데, 그것은 저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그것에는 39단, 3,624행으로 된 282조의 고대 법문이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아모리 왕이었던 함무라비(1728~1686 BC)의 법전은 바로 아브라함 시대를 전후해서 모세의 법보다 2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이 법전이 발굴됨으로써 아브라함 등 족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후에 쓰인 모세의 율법(민법)의 역사적, 사회적, 법적 타당성이 상대적으로 입증되었다. 함무라비 법 145조에 보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면 남편은 그와 이혼하든지 낮은 신분의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으며, 아내 스스로 자기 여종 중의 하나를 택하여 남편에게 첩으로 주라는 규정이 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후자를 택한 당시의 사례인 것이다(창 16:1~3). 후에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준 것도 같은 사례이다(창 30:3).
메소포타미아 여러 곳에서는 기원전 2천 년 안팎의 연대가 쓰인 점토 계약 문서에서 아바라마(Abarama), 아바암라암(Abaamraam) 등으로 불리는 당대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브람(창 12:1), 후에 개명된 이름인 아브라함(창 17:4, 5)은 모두가 당대의 구음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인명이었음이 입증되었다.
5) 성경에 나오는 헷 족속(Hittites)은 정말 존재했었는가?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창 15:18-20). 성경 비평가들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헷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구약 성서 외에는 이 족속에 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지금은 1,200년의 헷 족속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성경에는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이 28번 이상이나 나타나는데, 세계 역사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믿을만한 책이 되지 못한다고 그동안 회의론자들이 조롱해 왔다. 그러던 중 이집트의 한 무덤의 벽화에서 상형문자로 기록된 헷 족속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애굽이 헷 족속들과 20여 차례나 전쟁을 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는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남서쪽에 있는 헷 족속의 나라, 즉 영어로 발음해서 히타이트(Hittite) 나라의 수도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 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던 기록이 성경에 나온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 자기와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 족속이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히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이다. 그전까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히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은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히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면서 성경이 진실임이 증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