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한반도에 상륙한 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조선은 남해안에서 수군이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다. 역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었고, 지금까지 국난을 극복한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순신의 위대한 점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기억 속에 이순신은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개발하고, 함포를 사용하여 엄청난 숫자의 왜군을 무찌른 명장(名將)이지만, 역사상 적은 병력을 가지고 다수의 적군을 무찌른 영장(英將)은 수없이 많았다. 더불어 함포의 사용이 중세해진과 근대해전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는 하나 그것만으로 이순신을 우리 민족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게다가 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 아니다.
선박에 철판을 덧씌우거나 선체 일부를 철광으로 제작한 것은 거북선 건조 시기 이전에도 있었다. 1564년 명(明)에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송대(宋代)에도 왜구(倭寇)들과 싸우기 위하여 갑판 위를 철판으로 덮은 배가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만든 철갑선이 있었다. 그러나 이 철갑선은 연안이나 강가에 띄워 놓고 적군을 위협하는 용도로만 사용됐다.
중요한 것은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냐 아니냐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전투에 활용하느냐 하는 부분이다.
이순신은 중세해전의 기본 형태였던 함상육박전(艦上肉薄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거북선을 개발했다. 물론 명(明)에서도 이러한 목적으로 철갑선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백병전에 능하지 않은 점을 보완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이순신은 전투의 작전을 수행하는 데 적극 활용하였다.
우리는 그 명성에 매료된 나머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북선은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된 일종의 특수함선이었고,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은 판옥선(板屋船)이었다.
왜군은 작고 경쾌한 선박을 이용하여 적선을 따라잡은 뒤에 승선하여 백병전을 펼쳤는데, 이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판옥선의 선체를 높게 만들어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하여 만든 군선으로, 적병들의 승선을 보다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갑판 위에 철정(鐵釘)을 박아 보호막을 만들고, 함미(艦尾)의 키 부분도 거의 수직으로 설계했다.
조선의 문헌에는 거북선을 몇 척이나 만들었는지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데, 장계기록을 살펴보면 거북선은 3척에서 5척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거북선의 위력에 혼이 났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는 거북선의 정확한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거북선은 적함의 전투형태를 뚫고 들어가는 돌격선(突擊船)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북선의 임무가 충파(衝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위주로 한 주력선대가 전열을 흐트러뜨리면, 그 사이를 치고 들어가 적군의 지휘관을 사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적군의 지휘관을 저격할 때 적군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지붕을 쇠로 덮어씌운 것이다.
이러한 거북선의 성격은 1592년 7월 10일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잘 드러난다. 장계에 의하면 조선의 주력함선이 적선을 상대하고 있을 때 거북선이 금빛 찬란한 휘장으로 장식되어 있던 적장 가메이 그레고리[龜井玆矩]의 기함에 다가가 선체를 부수고 그가 가지고 있던 금빛 부채를 전리품으로 노획했다고 전한다. 이때에 가메이의 부하 장수인 구루시마 미치유키[来島通之]는 권준(權俊)의 궁시(弓矢)를 맞고 전사했는데, 그 덕분에 가메이는 간신히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주했다. 한마디로 거북선은 적군의 지휘부까지 신속하게 돌격하여 일거에 적장을 격살하는 참수공격(Decapition Strick)을 위한 특수군선이었다.
● 해상기동전(海上機動戰)
당시의 해전(海戰)은 개개함선이 인명 살상용 화포로 함선 대 함선끼리 맞붙어 싸우는 형식이었다. 비록 적군을 살상하는 도구가 창검(槍劒)이 아니라 화포(火砲)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근접전의 혼전양식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용된 포탄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때의 포탄은 안에 화약을 패워 넣은 것이 아니라, 돌을 둥글게 깎아 쇠를 입힌 무폭약 포탄으로 운동에너지로 목표물을 타격하는 ‘쇠공’이었다. 이러한 수준의 포탄으로는 적함을 신속하게 격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적병들을 직접 사격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16세기 서양의 대표적 해전으로 불리는 1571년 레판토해전(Battle of Lepanto)만 하더리도 근거리 사격이 주로 이루어졌다. 당시 기독교 연합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제독은 자신의 참모인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로에게 함포를 발사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 어느 때인지 묻자, “포탄에 맞은 적의 피를 뒤집어 쓸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을 뒤집어 놓은 지휘관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무폭약 포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시 집중타, 살보전법을 개발했다. 이는 각 함선이 단발로 화포를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대형을 만든 다음 전함대가 일시 발포하는 것이다. 이순신의 전술은 반세기 후부터 등장하는 17세기~18세기 소양의 전열함(戰列艦)에 사용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수십 척의 함선이 수백 문의 함포를 한꺼번에 발사하면 거대한 화망이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일정 반경 이내에 있는 물체들은 포탄을 맞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일시 집중타를 마치고 나면 철환(鐵丸)을 뒤집어쓰고 침몰하는 함선이 무수히 생겨났다. 여기에다 이순신은 불화살과 주화·발화통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군함을 이용한 충파를 감행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른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순신은 장거리 화포를 사용하는 해전과 병장기를 사용하는 육전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맞는 전술원리를 개발한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휘하의 장병들에게 적군과 직접 백병전을 벌이는 일을 피하도록 명령하고, 심지어 죽은 적병의 수급(首急)을 베어 얻는 행위도 금지하였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이순신이 파면당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 함대를 맡았다가 1597년 8월 27일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참패한 일이 있었다. 함포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해전방식을 답습하여 적선을 잡으려고 쫓아다녔던 것이다. 원균은 적함을 충파하고 적병의 수급을 모으는 데 열심이었지만 전공(戰功)을 과시하기 위하여 수급을 모으는 일은 적군의 전투력이 완전 무력화된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적함이 이미 침몰한 상황에서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에 체력을 소진한 원균의 함대는 적절한 때를 기다려 사방에서 몰려온 왜선들에게 전멸당했다.
● 한산도대첩의 서막
전쟁의 초반에는 조선의 수군도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당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할 당시 경상도 측 수군은 이들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하여 멀쩡한 군선을 자침(自沈)시켜버리기까지 했다. 이에 일본의 수군은 손쉽게 경상도 해역을 장악하고 서해로 돌아, 속전속결로 진격하고 있던 육군의 보급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의 침공이 시작된 지 3주 후부터 바다의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592년 5월 7일 양측 수군의 첫 접전은 경상남도 옥포(玉浦) 해역에서 벌어졌다. 조선 수군은 옥포의 좁은 해역을 봉쇄한 뒤 해안선 쪽으로 적군을 몰아붙인 다음 총통과 불화살로 공격해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또 연이어 벌어진 합포와 적진포의 전투에서도 16척의 적선을 파괴했고, 같은 방식으로 7월 8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는 추가로 13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
이에 일본의 태정대신(太政大臣)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패배의 원인을 전력분산으로 돌리고, 경상남도 각 지역에 있던 수군들을 집결시킨 다음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와키사카는 1592년 7월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이광(李洸)·윤선각(尹先覺)·김수(金睟) 등이 거느린 5만의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을 단 1천 6백여명의 기병으로 패주시킨 맹장(猛將)이었다. 아울러 부산포에 있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함대를 합류해 대함대를 구성했다.
경상남도 남쪽 해안에서 왜(倭) 수군의 세력이 확장되자 이는 전라도에까지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를 규합하여 삼도연합수군을 구성했다. 56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진 조선 수군은 1592년 7월 7일(음력)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의 73척 함대를 발견하였고,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 한산도대첩의 전개
이순신은 먼저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던 왜선을 끌어내기 위해 유인책을 펼쳤다. 흔히 이순신의 함대가 섬이 많은 해안을 이용하여 좁은 수로에서 적군을 무찔렀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옥포나 사천 등의 좁은 해역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는 왜군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조선을 침략하기 오래 전부터 조선의 국정과 전투태세, 지리 등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견내량 근처의 해안지리도 훤히 알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모험을 감행했다. 왜군이 바라던 대로 함대 전체를 적군 앞에 노출시킨 것이다. 왜군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조선 수군이 좁은 견내량지역으로 진입하기 전에 한꺼번에 나아가 공격하려 하였고, 전투가 불리해지더라도 재빨리 후퇴한 뒤 다시 역습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더구나 왜군의 뒤쪽으로 수로가 트여 있었기 때문에 산개하여 후퇴하기에 좋았고 추격하는 조선 수군이 빠른 왜선을 따라잡지 못해 지칠 무렵에 역습을 가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조선의 함대가 진격하자 왜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왜선들이 빠른 속도로 견내량을 벗어날 때까지 조선 수군이 반격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쾌재를 불렀다. 견내량을 빠져나가면 노량에 이를 때까지 협수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군의 함대가 근접해 조총(鳥銃)을 난사하며 공격하자,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좁은 해역에서의 이점을 선점하지 못하고, 넓은 바다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와키사카는 조선 수군이 유인책을 쓰려다 스스로의 꾀에 넘어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함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속단에 불과했다. 이순신은 와키사카가 인근 해역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하여 다른 전술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장사진(長蛇陳)을 이루어 앞다투어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던 조선의 함선들은 왜군의 함선이 모두 넓은 바다로 빠져나오자 갑자기 행렬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양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신속하게 학익진(鶴翼陳)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학익진은 전형적인 공격 진형으로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포위망을 형성한 다음 사방에서 압축하면서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리적 이점을 포기한 대신 자신의 함대를 이용하여 인공 협수로를 만든 것이다.
이에 왜군의 함선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달아나던 조선의 함선들이 신속하게 공격 진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 군선의 선회능력을 계산에 넣지 못한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실책이었다. 판옥선은 양옆의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였기 때문에 한쪽 방향의 노만 사용하면 빠른 속도로 선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학익진에 포위당한 와키사카의 함대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시 견내량으로 후퇴하는 것과 그에 맞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후퇴하다가는 후미에 공격을 받아 전멸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맹장으로 소문난 그는 지금까지 추격하던 여세를 몰아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와키사카는 즉각 자신의 함대를 가장 공격적인 전법인 쐐기모형의 추형진(錐形陳)으로 배치하여 이에 맞섰다. 추형진으로 학익진의 중간을 돌파할 수 있다면 그 중심 기점에 서 있는 이순신의 대장선을 공격함으로써 손쉽게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왜군의 작전은 또 다시 실패하였다. 이순신은 포위망을 정비한 다음 일제 포격명령을 내린 것이다. 살보전법으로 수백기의 철환과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동시에 날아오자 왜선은 정면과 측면 할 것 없이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화살이라기보다는 화약의 힘을 등에 입은 큰 통나무라고 할 수 있는 12척 길이의 대장군전을 맞고 무사할 수 있는 배는 없었다. 더군다나 왜선은 섬유질이 촘촘하지 못한 삼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 단단하지도 못했다.
조선 수군은 함포 공격을 마치자마자 연이어 불화살과 주화를 날렸다. 일반적으로 왜선들은 자신들의 소속을 나타내는 번기(藩旗)라든지 불교 문구를 써놓은 깃발, 또 신의 가호를 빌기 위한 온갖 주문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휘장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식들은 오히려 불화살과 주화의 좋은 목표물이 되었고, 배 전체에 불이 옮겨 붙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병들이 진화작업을 하느라 우왕좌왕 하는 사이, 거북선이 왜군의 선단 사이를 돌격하기 시작했다. 거북선은 왜선을 충파해 격침시키기도 하고, 조란환을 장전하여 발사하기도 했다. 조란환(鳥卵丸)은 글자 그대로 새알 정도 크기의 쇠구슬이다. 이것은 총통 하나에 수십 개씩 들어가기 때문에, 그 효과는 마치 현대의 산탄총과 비슷하다. 조란환을 맞은 왜병들은 갑옷이 깨져 온몸에 철환이 박힌 채 죽어갔다.
왜군의 선단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열을 정비하여 공격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최후의 방법을 동원했다. 수십 명의 자원병을 구성하여 조선 수군의 배에 구멍을 뚫는 특수작전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함선은 두께가 80센티미터나 되었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칼을 이용해 구멍을 뚫을 수가 없었다.
왜선들은 죽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좁은 포위망에 갇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총지휘관인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배 역시 거북선의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철환이 날아와 그가 앉아있던 곳을 박살냈고, 그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수많은 불화살이 날아와 기함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왜군의 지휘체계는 이미 붕괴되었고, 수재와 화재를 동시에 만난 왜선들은 전함대가 전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조선의 함선들뿐이었다. 73척의 왜선 중 무려 59척이 침몰됐고, 무사히 전장에서 빠져나간 왜선은 단 14척뿐이었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그의 가신(家臣)이었던 와키사카 사베에[脇坂左兵衛]와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은 전사하였고, 휘하의 병사들도 무려 8천여명이나 사상(死傷)되었다.
● 중세해전에서 근대해전으로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 이후 조선의 수군은 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포·사천·당항포에서 패배한 왜군은 그것이 단지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실수였다고 생각했지만, 한산도에서의 패전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내노라하는 장수들을 모두 동원해 전투력을 집중시켰고, 기동력이 좋은 왜선에게 유리한 넓은 해역에서 전투를 벌였는데도 참패한 것이다.
한산도해전 이후 왜국의 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였고,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거북선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벌어진 9월의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 조선 수군은 왜국 수군의 거점까지 쳐들어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수군은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왜군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은 부산-대마도-하카다를 잇는 좁은 측선뿐이었다. 왜군은 단순히 서해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와의 연락·보급선을 완전히 차단당해 종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면 이순신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영웅으로 칭송되는 진짜 이유는 백병전 위주의 전략을 지양하고, 함포를 이용해 적선을 공격하거나 적선을 들이받기 위하여 유리한 방향을 점하기 위한 기동전이 있었지만, 함선 자체를 병사들을 다루듯이 일정한 대형으로 만들어 거기에 맞는 전술을 펼친 예는 없었다. 게다가 살보전법을 개발하여 무기의 한계를 전술로 극복함으로써 세계 해전사의 신기원을 이룩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