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타임》지에 각하 사진을 게재하라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역사 및 저널리즘학과 종신교수로 재직중인 제임스 C. 톰슨은 1996년 8월 11일 오전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필자는 그에게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에 게재하려는 한국 정부의 로비에 대해 알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한국 시간으로 일요일 오전이고 미국 동부 시간은 토요일 오후에 케임브르지 교외 자택에서 전화를 받은 톰슨 교수는 답변에 앞서 필자의 신원과 취재의 용도 등을 물었다. 다행히 그는 필자의 신원을 하버드대학 니만펠로 명단에서 확인했으며 신뢰감을 표하는 가운데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답변했다.
“그때가 1970년 6월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20주년이 되기 수주일 전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 법과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국 유학생이 대학 구내 동아시아센터에 있는 내 연구실로 찾아왓다. 그는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타임》지 표지에 게재하도록 주선해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했다.”
“당시 그 유학생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인도 아니고 저널리스트나 변호사도 아니었다. 그저 젊은 학생신분이었을 텐데 귀하는 그가 연구실로 찾아오기 전에도 그의 신원을 알고 있었는가?”
“그와 개인적인 교우는 없었다. 그저 학교 안에서 세미나, 리셉션이나 아시아 관련 모임에서 몇 번 인사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의사표현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하버드대학 역사학과 조교수로 ‘동아시아와 미국 관계’를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주변에서 그를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다. 또 그가 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한다고 들어서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타임》지 외에《뉴스위크》지도 대상으로 포함됐다는 설이 있는데….”
“나는《뉴스위크》지 얘기는 못 들었다.《타임》지에 게재하게 해주면 5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의였다.”
“그 자리에서 그에게 어떤 언질을 주었는가? 어떤 답변을 했는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언론과 그럴 만한 커넥션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고 거절했다.”
“박정희 정권의 로비스트가 톰슨 교수를 로비 대상자로 지목했다면 귀하가 그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시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프리랜서였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는 그와 동행해 ABC TV 방송에 보도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내가 언론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하버드대학의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코스인 니만펠로십 책임자로 일했다.”
⑴ “개인 견해까지 매수·조작하는 정권”
과거사에 불과한 것 같지만 다수 국민의 역사의식과 관련 깊은 박정희의 얼굴사진 게재 로비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1996년 5월 말에야 공개됐다. 미국의 저명한 한국학 전공자인 시카고대학 정치학과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발표한「남한의 학계 로비」라는 논문에 이것이 적시돼 있었다. 이 논문은 찰머스 존슨 전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교수가 소장으로 잇는 일본정책연구소의 비정기간행물 7호로 발간돼 미국의 대학가에 나돌았다.
커밍스는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 중에서 가장 방대한 저술을 펴냈다. 그의 주요 저서는 1980년에 출간된『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이 책은 한때 한·일·미 3개국의 6·25전란 연구자들 사이에 필독서로 꼽히기도 했다. 특히 한국의 대학생과 재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그는 이 책이 나온 지 10년 만인 1990년 속편을 펴내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자로 위치를 굳혔다.
커밍스는 박정희 정권의 학계 로비 실상을 폭로한 이 논문에서 과거 군부세력이 연구비를 미끼로 미국 내 비판적인 학자들까지 입을 막았다고 했다. 이 논문은 권력자들이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짓밟아온 한국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많은 해외 한국인들을 수치스럽게 했다.
독재권력의 탄압뿐 아니라 돈에 의한 유혹과 매수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에 수정을 가하려는 풍토가 한국사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커밍스가 지적한 대로 박정희 정권이 저질러온 연구비 로비 대상은 미국 학계였다. 이로 미루어 한국 내부 상황은 오죽했겠느냐고 한 한국인 교수는 말했다. 그는 또 그런 독재권력 아래서 창의적인 탐구와 표현의 자유를 차압당한 한국의 학자·문인·언론인들에 대해서 국제사회의 눈초리가 어떨지 생각해보면 얼굴이 붉어진다고 탄식했다.
커밍스는 미국 학계에 연구비를 대주거나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한 한국의 기관과 함께 이를 받은 미국 대학 및 학자들을 비판했다. 한국 측의 돈줄로는 국제교류재단(구 국제문화협회)과 무역업체들의 출연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산학협동재단이 자주 거론됐다. 그 배후는 한국 외무부나 중앙정보부라는 것이다.
한국으로부터 로비성 연구비를 받아왔다고 그가 거명한 대학은 자신이 속한 시애틀의 워싱턴주립대학과 시카고대학을 제외한 다수의 유명 대학들이다.
또 학자들 중에서도 미국의 아시아학계 원로인 로버트 스칼라피노 버클리대학 명예교수가 1970년대 한국으로부터 오는 모든 연구비 협의를 도맡는 창구 역할을 했다는 미국 의회 조사보고서를 인용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정치 문제가 포함된 연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버클리대학 측의 양해사항”이라고 썼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의 한국학 전공학자들이 한국 측으로부터 연구비나 방문초청 등을 받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학자가 자신의 연구대상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서는 객관적인 견해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근거가 인정된다. 한국 내 학자들도 참고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둘째 이유다. 즉 연구비를 주는 한국 측이 특히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가 학문의 자유는 존중받지 못하면서도 학문 자체와 학자들의 견해는 지나치게 중시한다고 평가했다. 역설적인 지적이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학자나 언론인 등 지식인의 견해가 일반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항상 집권자들의 공작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타당한 분석이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어느 선진국 정권 못지않게 지식인 계층이 참여한 테크노크라시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대학교수, 언론인, 변호사, 심지어 원로시인들까지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지지 그룹으로 동원됐다. 그러니까 한국의 권력자들이 지식인의 용도를 잘 알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외교관이나 해외공보관은 주재국 언론의 한국 관련 보도에 대한 분석과 대처를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 그것도 바로 한국 정부가 언론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커밍스는 지적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정책에 대해 과거 군사정권과 다른 것으로 상당한 기대를 표시하기도 햇다. 군부독재 유산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그는 보았다. 커밍스의 논문을 접한 미국 내 한국인 교환교수 등 많은 인사들은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본인 자신이 그런 제의를 한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기억이 그럴지 모르지만 나의 기억은 이렇게 그것은 사실이다.”
톰슨 교수는 난센스라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한쪽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톰슨 교수 이외에 그 로비사건 당시 그것을 전해들은 증인이 있는지 여부도 진상을 규명하는데 필요하다.
“그 로비사건과 관련해 의회청문회에 나가거나 언론에 토로한 적이 있는가?”
“청문회 같은 데는 나가지 않았다. 언론의 경우 가까운 저널리스트들이 인터뷰 요청도 했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다.”
“로비사건 직후에 동료 교수나 친지에게 얘기한 일이 있는가?”
“있다. 당일 오후 나의 보스 격인 동아시아연구소장 존 킹 페어뱅크 교수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랬단; 페어뱅크 교수는 한마디로 ‘그것은 뇌물수수 행위’라고 규정지었으며 나도 동감을 표시했다.”
하버드대학의 다른 아시아학 교수들에 비해 페어뱅크는 한국의 유신체제와 인권 문제 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별로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한국 측의 로비를 일언지하에 뇌물수수 행위로 규정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하버드대학의 아시아학 교수들 중 에드윈 라이샤워나 제롬 코언은 한국의 독재정치에 비판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 그러나 페어뱅크는 이들과 입장이 달랐던 것 같은데….”
“학자로서 관심의 차이였을 뿐이다. 라이샤워나 코언이 한국 정치에 관심을 많이 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페어뱅크는 중국 역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문제에 별로 눈을 돌린 적이 없다.”
브루스 커밍스도 논문에서 박정희 정권의 하버드대학에 대한 로비와 교수들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박정희 정권의 진정한 관심은 라이샤워나 코언 같은 교수들의 한국 정부에 대한 반대활동을 견제하는 대응활동을 지원함으로써 하버드대학에 한국 지지 분위기를 싹트게 하는 데 있었다고 한 한국 기자가 보도했다. 다른 교수들(페어뱅크도 그 중 한 사람)은 최근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어째서 하버드대학의 교수들이 외국의 내정에 간섭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 글을 읽으면 페어뱅크 교수에게 상당한 친한(親韓) 혐의가 두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어 커밍스는 당시 한국의 독재정권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뉴욕타임스》의 도쿄 특파원 리차드 헬로란의 기사를 인용했다.
“하버드에 대한 기부를 관장한 사람은 박정희의 사위로 당시 중앙정보부 미국지부 책임자였던 한병기였다. 의회 조사소위는 후에 한 씨가 박 대통령에게 1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할 수 있도록 기업에 압력을 넣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그 기금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 1975년 6월 하버드대학에 주어졌다고 결론지었다.”
⑵ 김형욱의 미국 의회 프레이저 소위 증언
당시《뉴욕타임스》보도에 따르면 하버드대학이 한국에서 연구기금을 받은 후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대학도 한국 무역업체로부터 기금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버드대학의 연구기금에 대해 순수성을 따지는 글들이 나돌자 컬럼비아대학의 교수·학생들이 한국의 연구비를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부의 명문대학들에게 돌아간 한국 측의 기금은 1975년 6월에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75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군사독재정권과 언론탄압이 미국의 중심부 명문대학과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화됐기 때문이다. 국제교류재단의 한 간부는 1980년 전두환 정권 초기에 한국 정부가 하버드대학에 100만 달러를 연구비 명목으로 제공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커밍스는 미국 의회의 한미관계소위에서《타임》지 로비 때도 사건이 거론된 것처럼 썼다. 코리아게이트를 조사한 미국 의회 한미관계소위는 위원장의 이름을 따 프레이저 위원회로 불리기도 했다. 이 프레이저 소위는 전직 중앙정보부 간부 등 많은 한국 인사들에 대한 청문회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어에 능통한 미국인 통역관을 고용했다. 나중에 하버드-옌칭연구소 부소장이 된 에드워드 베이커가 당시 프레이저 소위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베이커 부소장도 1996년 8월 11일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로비 사건을 증언했다.
“한국 유학생이 박정희 사진을《타임》지 표지에 게재하려는 로비를 벌였다는데 이에 대해서 들은 일이 있는가?”
“로비스트가 찾아가 부탁했던 당사자인 제임스 톰슨 교수에게서 직접 들었다. 당시 박정희의 사진을 게재하게 해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얘기였다.”
“지금 그 로비 혐의자가 그것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데….”
“톰슨 교수가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도 수차 들었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톰슨 교수는 오랫동안 니만펠로십의 책임자도 지냈으며,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다.”
“당시의 로비 혐의자를 직접 잘 아는가?”
“잘 안다. 그는 사진 로비 외에 박정희 정권과 다른 것으로도 연루돼 있었다. 프레이저 소위의 비공개 청문회에서 증언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K가 수차례 찾아와 박정희 행정부를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돌려보내곤 했다고 말했다. 프레이저 위원장이 질문하고 김형욱 씨가 답변한 그 비공개 청문회에 내가 통역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김 씨는 그 로비 혐의자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내놓았다.”
베이커 부소장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당시 자신이 참석했던 프레이저 청문회의 보고서 사본을 팩스로 보내왔다.〈한미관계 조사〉라는 표제의 보고서 제7부 6페이지에 김형욱이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위원장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김형욱은 프레이저 위원장이 그 로비 혐의자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라고 서두를 떼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내가 한국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할 때 그가 여러 번 찾아왔다. 그는 한국 신문들에 한반도 통일 문제에 관해 수차례 기고했다. 그가 유능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는 정치학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그는 나에게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그런 자리를 얻으려고 매우 열심히 일했다.”
김형욱은 유신체제 선포 후 박정희가 자신이 신임해온 심복 중 하나이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권력남용과 부패 등의 죄를 씌워 숙청해버리자 1973년 여름 슬그머니 동남아로 나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박정희 아래서 중요한 기밀을 관리하거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들의 말로가 순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현실화됐기 때문이었다. 미국 망명생활 중 그는 계속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권력 내부의 비행을 폭로하는 일에 전념했다. 김형욱은 자신의 미국 망명생활 초기 그 로비 혐의자가 자주 찾아왔다고 증언했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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