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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독립운동을 했던 한 가문 이야기...

콜로라도 |2013.11.26 14:21
조회 22,838 |추천 360

3대가 심지어 며느리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 집안이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미처 버리지 못한 작위로 인해 올해도 독립운동가에 포함되지 못하고 그 시체가 아직도 타국에 누워 있고 그 아들은 갖은고생을 다하여 결국 해방을 맞이하지만 분단을 반대하는 김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몰려 감시 받다가 전쟁중 납북당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며(아내의 끝없는 자료수집과 노력으로 인해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됨) 그의 며느리는 전쟁후  198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까지 30여년간 공산당 부역자라는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또한 둘째 아들은 의열단의 일원으로 일제에 채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은 후 그 후유증으로 자살했다. 그리고 손자는 최연소 광복군 대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동농 김가진(1846-1922) 당시 명문가인 안동김씨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당시 서얼들의 관례대로 규장각 검서관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후 고종의 특별명령으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급재했다.

 

그는 개화파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며 반청주의자였다.  그는 수사관으로 있을 때 청나라 상인이 조선상인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나자 즉시 그 청 상인을 채포하였다가 청나라 공사에게 감히 소국인이 대국인을 잡았다며 뺨을 맞았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상부가 자신의 잘못으로 몰자 그는 소위 중화에서 벗어나야 나라가 산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의해 사실상 반식민지의 상태일 때 그는 왕후 민씨에게 대놓고 청을 물리치고 개화해야 나라가 산다 라고 하여 그녀의 반발을 사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후 러시아를 끌여들여 청을 견재하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가 남원으로 유배를 간 그는 풀려난 후 각국의 공사를 지내면서 중국어,일본어,영어를 습득하였다.

 

이후 갑오개혁의 핵심일원이자 독립협회의 간부로서 독립문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 나라 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1902년 한글교육학교를 전국에 세웠다. 이후 마지막까지 일진회에 저항했으며 을사늑약 채결에 반대했다. 그러다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고향으로 은거했다. 일제는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렸다.

김가진은 한민족이 독립과 자주의 의지가 없었기에 나라를 잃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9년을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크게 깨달아 아직 우리민족에게는 독립의지가 있다며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고 재산을 모두 정리한 후 상해로 망명했다. 일본은 그를 잡으려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상해로 온 그는 현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릎을 꿇으며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 70세가 넘은 노인의 눈물에 독립운동가 들은 숙연해 졌다고 한다. 이후 일본밀정이 다가와 자작으로 올려줄테니 돌아오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호통을 치며 그 남작작위도 필요없으니 당장 가지고 돌아가라고 했다.

  일제에게 있어 김가진의 망명은 큰 타격이었다. 일본은 전 세계에 조선의 전 지도층들이 일본과의 합병을 원하고 있으며 상해에 있는 자들은 소위 못배운 무식한 자들이라고 선전해 왔는데 그의 망명은 이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가진은 조선의 2품이상 관료들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으로 전환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동단을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독립운동에 구심점이 필요함을 느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계획했다. 수개월간 의친왕 측과 연락한 후 거사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강은 불과 목적지의 200M 앞에서 일본형사에게 채포되어 실패로 끝났다. 이후 김가진은 무장투쟁을 역설하며 북로군정서로 향해 그곳을 고문을 지내다가 상해로 돌아온 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시정부는 직접 그의 장례를 주관해 명복을 빌어주었다.(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그를 사면했으며 돈을 모아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비석은 1966년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는 "독립된 후에도 내 시신이 더러우니 나의 죄가 용서받기 전에는 고국의 땅에 묻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2013년 올해도 그는 상해공원에 매정하게 묻혀있다. 독립유공 서훈심사 위원회는 그가 남작작위를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는데 만약 김가진이 반납을 하러 갔다면 일본이 순순히 그를 보내줬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보훈처가 이처럼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선 후’보다 ‘경 중’을 앞세우는 것은 ‘선 항일- 후 친일’ 시비가 끊이지 않는, 변절한 일부 민족지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환은 1900년 생이었으며 상당히 똑똑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1911년 정정화와 결혼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개화사상을 공부하였으며 항상 세계의 시사에 주목하라는 말을 들었다. 특히 1918년 1차대전이 끝날무렵 김가진은 그에게 이 전쟁이 끝나면 조선도 독립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한민족이 그것을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후 앞서 이야기 한대로 김가진은 반성의 눈물을 흘리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곧 이어 김의한도 아버지를 따라 망명해 선전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며느리 정정화도 상해와 조선을 넘나들며 연통제를 통한 독립운동 자금의 확보를 꾀하다가 많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녀는 김구 및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젊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먹이려 노력했다.그리고 임시정부의 자금마련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으니 그런 그녀를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대한의 잔다르크라고 불렸다. 이후 대한 광복군으로 활동한 두 부부는 일제가 패망할 때 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추천수360
반대수1
베플유렌시아|2013.11.26 15:10
오늘 본 글 중 이분들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제일 무섭다
베플|2013.11.26 22:01
안타깝다...그리고 부끄럽다... 내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게 다 저분들덕택인데 나는 저분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그 희생에 대해 충분히 기념받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게... 우리는 늘 일본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도 잊고 있는건 마찬가지가 아닌지....
베플야동보자병...|2013.11.26 22:27
아..정말 감동적이고 멋있다.감사합니다! 진짜 대단한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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