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그리고 10년만의 국회 입성
노무현은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또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는 도저히 정권교체를 하기 어렵다고 봤지만 여러 모로 존경하는 그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DJ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하면 나는 ‘참으로 아까운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DJ야말로 내가 말한 지도자의 3대 요건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권력장악 능력’, ‘살림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다만 DJ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내가 본 DJ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공부하는 사람, 그래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사람이었다. DJ에게는 모든 문제들을 항상 미리 앞서서 깊이 생각해 두는 좋은 습관이 있었다.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을 손꼽으라면 나는 DJ를 주저하지 않고 추천할 것이다.
그리고 DJ는 결코 포기가 없는, 또 결코 좌절하지 않는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규정하면서 가장 적당한 용어와 문장을 갖고 개발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대변인을 하고 있을 당시, 성명이나 논평을 내야 하는데 상황이 애매하여 어떻게 해야할 지 고심이 될 때에는 DJ를 찾아가면 해결이 되었다. DJ가 즉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 적기만 하면 그대로 정리된 성명서가 될 정도였다.˝ -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95쪽~96쪽.
김대중이 영국에서 돌아와 아태재단에서 통일문제를 연구할 무렵의 얘기다. 노무현은 “DJ의 가장 큰 허점은 허점이 너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제15대 대선을 앞둔 1996년은 정치적으로 김대중에게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제15대 총선에 나타난 민심의 향방은 김대중을 비켜가고 있었다. 대선국면이 요동치면서 ‘통추’ 멤버들도 “바람 부는 날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대개는 저마다의 인연과 시국 인식에 따라 여야의 길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택했다. ‘통추’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조직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던 노무현은 신중한 처신이 요구되어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1997년 3월에 노무현은 음식점을 냈다. 뜻 맞은 몇몇이 상호보증을 서서 은행 대출로 운영자금을 만들었다. 이들은 소주잔을 놓고 며칠 동안 논의한 끝에 식당 이름을 ‘하로동선(夏爐冬扇)’으로 정했다.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지은『논형(論衡)』「봉우편(逢遇篇)」의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보탬도 안 되는 능력을 갖추고 도움이 안 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름이 화로를 올리고 겨울에 부채를 바치는 것과 얻고자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듣고자 하지 않는 말을 올리면서도 화를 당하지 않는다면 이는 큰 행운이다”는 구절에서 나온 ‘하로동선’은 “철에 맞지 않거나 격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원래는 “어떤 물건이든 사용하기에 따라 유용하기 마련으로 무용지물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든 비유로 쓰인 것이다.
왕충은 이 글에서 ‘출사(出仕)에서의 운명’을 논의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학문과 덕이 높고 재능이 출중한데도 연이 닿지 않아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하로동선’으로 취급하여 업신여기는 것을 비웃고 있다. 군신(君臣)이 서로 연이 닿지 않으면 충언을 해도 누명을 덮어쓰기도 하고, 반대로 군주의 부덕을 모른 체함으로써 오히려 영당을 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록 여름 화로라 해도 젖은 것을 말릴 수도 있고, 겨울 부채라 해도 불씨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니, 다만 때를 못 만나 제 쓰임을 못하고 있을 뿐 다 나름의 소용이 있다는 것이다.
‘하로동선’은 동지들과의 만남의 마당이자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듣는 여론의 마당이기도 했다. 전직 의원들이 일주일에 하루씩 출근하여 서빙을 하고 손님들과 대화 상대가 되기도 했다. 노무현도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들을 맞았다. 여러 계층의 국민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럴 즈음, 대선을 앞둔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 행정부의 거듭된 실정으로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국민의 생계가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은 이런 시급한 문제해결에는 손을 놓은 채 차기 집권을 둘러싼 정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신한국당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고 인기를 얻은 이회창이 대통령선거 후보가 되었고, 서울시장 조순은 잔류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다가 합당(1997년 11월 21일 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를 대통령선거 후보 겸 명예총재로, 조순 민주당 총재를 초대 총재로 선출했다. 이때 이회창은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세탁하여 김영삼과의 ‘차별화’를 꾀했다)을 통해 신한국당 총재로 변신했다.
노무현은 결국 김대중 진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이회창 대세론’에 눌려 김대중의 당선이 난망해보이던 시점의 결단이었다. 어디까지나 600년 동안 지속되어온 부패하고 타락한 수구기득세력을 교체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에서였다. 대세에 따라 줄서기를 했다면 이회창 편에 섰을 것이다. 노무현의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씨는 원래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회창 씨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로 김영삼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어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절묘하게 타협을 한 것이다.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잡게 만들었던 것은 대구와 충청도의 이반이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결국 이회창 씨도 조순 씨도 권력의 줄을 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하면 권력에 줄을 대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살아온 유능한 사람들을 국가운영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40쪽~141쪽.
김대중 진영에서는 상당한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 ‘통추’의 합세를 크게 반겼다. 특히 취약지역인 영남권의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는 노무현·김광일 등의 참여는 천군만마의 원군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껏 정치인 노무현이 추구해온 길은, 속된 눈으로 보면 어리석다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만 원론으로 보면 정도(正道)였다. 어떤 정치적 갈림길에서도 사리사욕을 철저하게 배제해온 그는 한 번도 공인(公人)의 정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막스 베버가 “정치가 그 고향으로 삼아 정착할 곳이 바로 도덕”이라고 설파한 대로 노무현은 원칙과 도덕을 무기로 황량한 정치판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래서 승승장구가 보장된 3당 합당 참여도 거부했고, 그 대가로 10여년의 거듭된 패배와 고초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여러 날의 고민 끝에 이번에도 ‘어리석은’ 결단을 내렸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낮아 보이던 시기에 새정치국민회의 참여를 결심한 그는 “고립당한 쪽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결국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7년 11월 13일, 대선 한 달 전이었다. 부산의 재야인사와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그 선택을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연고 때문에 나를 후원해주었던 부산·울산 인사들 중에는 절교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수없이 이합집산을 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야당 정치인이었다. 호남을 고립시켜놓은 정치지형에서 고립당한 쪽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열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쪽에 가담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당당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대목에 이르면 노무현은 정치인이기보다는 순교자의 모습에 가깝다. 그동안 수구기득세력이 어떻게 호남을 차별하고 멸시했는가를 돌아볼 때 ‘경상도 사람’ 노무현이 “고립당한 쪽을 거들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선언은 자기희생을 넘어서는 ‘거룩한 순교’였다.
한편, 그즈음 다시 불거진 ‘3김 청산’에 관한 노무현의 시각은 남달랐다. 숱한 정치학자, 언론인, 정치인들이 정략이나 추세에 따라 ‘3김 청산’을 외칠 때 노무현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정권 교체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의거하여 이 문제에 접근했다.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통추 시절 김근태 의원이 이끌던 ‘통일시대국민회의’ 초청으로 시국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3김청산’에 대해 물었다. 나는 정권교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어떻게든 정권교체를 할 수만 있다면 김대중 총재를 도와줘야 하지 않는가? 백 가지 제도보다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 정권교체의 경험,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다. 이론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정권교체가 중요하다.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있으면 김대중 총재를 돕겠다.”
원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략적, 전술적 명제는 타협할 수 있다. 나는 ‘3김청산’이라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 타협할 수 있는 전략적 명제라고 보았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46쪽.
대선이 임박하면서 외신들은 한국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워싱턴포스트》는 10월 13일자에서 “사석에서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야당 승리가 남북 간의 직접 대화는 물론 관계 개선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 주장했다”면서 “장기간 민주주의를 주장해온 김대중은 남북 간의 성취를 위해 미국이 중재 역할을 해줄 것을 계속 요구해 왔다”고 보도했다.《LA타임스》도 10월 16일자에서 “김대중의 확실한 선두주자로의 대두는 그의 용기와 집념에 대한 찬사이며 또 한국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논평했다.
김대중의 대권 행보는 연초부터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과 정책연합에 이은 연대, 영남권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는 박태준 전 포철회장의 영입, 여기에 노무현 등 통추의 핵심 멤버들까지 참여를 선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범야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어느 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에 초조해진 정부여당은 예의 용공음해와 온갖 비방으로 언론을 도배질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