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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로 보는 대통령&영부인의 사랑이야기 -클리블랜드 대통령 부부-

콜로라도 |2013.12.31 11:18
조회 14,095 |추천 17

1880년대 미국은 남북전쟁의 상처를 빠른시일내 극복해나갔고.. 철도와 서부개척 역시 완성단계에 이르게 한다. 내부적으로 국력이 안정되어 가면서 미국은 그 힘을 떨칠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그 시대에 미국에는 독특한 대통령이 한 사람 있었다. 미국은 재선을 하면 총 8년을 집권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재선에 실패한 후 4년뒤에 다시 대통령이 되어 8년을 채웠다 이러한 뚝심을 가진 대통령이 바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의 부인 프랜시스의 내조가 있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두번의 집권기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첫번째 대통령 시기에는 경제호황에 힘입어 인기있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두번째 집권기에는 경제불황으로 인해 그 인기가 폭락했다.그리고  조선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는데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에 파견된 것이 바로 그의 재임기였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은 백악관에 가서 클리블랜드를 만나고 국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 때 박정양은 사모, 관대를 착용하고 신하의 대례복인 흑단령을 입은 채로 백악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뉴저지주 콜드웰의 장로교 목사 집안이었는데, 대대로 이 지역에서 목사로 유명했던 집안이다. 클리블랜드는 이 집안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원래 공부를 좋아했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숙부와 함께 살면서 잡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한동안은 뉴욕의 한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꽤 바쁜 삶이었지만 숙부의 배려로 버팔로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학을 독학으로 공부했고 1859년 변호사가 되었다.이것은 미국사에 있어서 '독학 대통령' 중 한 명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과부인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만 했기 때문에 남북전쟁 기간에도 돈을 벌어야 했다. 변호사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했는지 부지방검사, 보안관, 버팔로 시장 등을 지냈다. 남북전쟁 당시의 징병법에는 본인이 병역에 응하지 못하면 대리인에게 돈을 주고 병역을 치르게 하고 자신은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클리블랜드는 형 두 명이 군대에 가 있어서 혼자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법안에 따라 150달러에 폴란드 출신 이민자를 대리인으로 내보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점은 훗날 대권을 노릴 때의 그에게 조금 위기를 주기도 했다.

 

어쨌든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민주당에 입당했고 여러 공직을 거치면서 정직과 성실, 원칙과 소신에 따른 행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1883년 뉴욕 주지사가 되었다. 주지사로써도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하고 개혁을 실시하여 꽤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렇게 얻은 인기와 명성에 힘입어 대권 후보로 크게 부상, 결국 188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처음에 그가 당선될 가능성은 낮았다.( 링컨 대통령 이후 항상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왔다.) 그러나 당시 공화당이 선거전략을 잘못짰고(정책 대신 개인 스캔들인 병역문제와 과부와의 불륜과 그로인한 사생아 문제만을 집중 공격했지만 클리블랜드는 자신은 장가도 아직 안갔으며 그 아이도 내 아이가 맞다 양육비를 지불하겠다.는 솔직한 태도를 보여 국민들과 선거인단의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겨우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시 백악관에는 영부인이 없었다. 그는 혼자 백악관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고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결혼을 하려했다

 

1864년 폴섬가에는 경사가 생겼다. 당시 명망있는 변호사였던 오스카 폴섬에게 귀여운 딸이 태어난 것이다. 신이 난 폴섬은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열기로 했다. 약속시간이 되자 한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오스카는 두팔 벌려 친구를 환영했다. "어서오게 그로버..."

 

그로버 클리블랜드 변호사는 오스카와 함께 일하는 절친한 동료였다. 그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유모차가 들려 있었다. 그는 유모차를 폴섬부인에게 주고 요람에 누워있는 귀여운 아기를 처다보았다.  "귀엽군.... 너무 이쁘군 이름이 뭐로 지었나.." "프랜시스.." 폴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듯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폴섬 가족과 절친하게 지내왔다. 그는 프랜시스를 ‘프랭크’라 부르며 예뻐했고,  자주 방문에 아기를 안아주었다.

 

 프랜시스 클리블랜드 부인(1864~1947)

 하늘이 내려준 인연인지 몰라도 프랜시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남편감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던 중 1875년 그녀의 나이 열한살 때 아버지인 오스카 폴섬이 마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들은 클리블랜드는 한걸음에 달려와 가족을 위로하고 프랜시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그가 직접 폴섬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프랜시스를 어린 시절부터 '프랭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귀여워했고 프랜시스의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랜시스도 이 뚱뚱한 아저씨를 '클리브 아저씨(Uncle cleve)'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점차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프랜시스는 점차 클리블랜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둘은 수년간 연애를 했다. 클리블랜드는 그녀를  자주 만나 차도 마시고 공부도 가르쳐주었다. 프랜시스도 남자라고는 클리브 아저씨 밖에 몰랐다고 한걸 보면 첫사랑이었는듯 하다. 이후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자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엠마 폴섬에게 "따님과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라고 물었고 그날 이후 그녀의 방에는 클리블랜드가 보낸 꽃다발로 넘쳐 흘렀다고 한다.

 

1885년 대통령에 당선된 클리블랜드는 48세였다. 그런데 이 때까지도 총각이어서 영부인 역할은 여동생인 로즈가 대신했지만 그해 뉴욕의 웰스 칼리지를 졸업한  프랜시스에게 청혼, 곧 이듬해 6월에 백악관에서 결혼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으로 기록된  그녀의 나이는 21세였다. 나이차는 27세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언론들은 대통령이 결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클리블랜드와 폴섬가의 친분을 알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분명 폴섬 가문의 미망인인 엠마 폴섬이 상대겠지!'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대통령 결혼식날에 대통령의 딸 뻘 되는 아가씨가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21세의 나이에 백악관의 안주인이 된 그녀는 이후로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해서 받았고 꽤 인가와 평판이 좋은 편이었는데 제법 당돌한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1888년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어 주었을 때 그녀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구와 장식들을 잘 관리해 주세요. 4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또한 클리블랜드가 아내를 구타한다는 정적들의 모함에 대해 직접 언론에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녀는 최연소 영부인이라는 것 외에 직접 언론에 나서 공식해명을 한 최초의 영부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두 부부는 27년이라는 나이 차이, 사방의 끊임없는 관심 속에서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클리블랜드는 결혼 후 대통령으로서 국정운영에 더욱 전념했다.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 주된 문제는 관세무역과 노동운동이었는데, 클리블랜드는 당론인 관세인하정책에 따라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장려하여 시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또한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였고 그 강직함으로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한 점은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점으로 첫 번째 임기를 수행할 무렵에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1888년 재선을 노리고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과 격돌했는데 이 때 클리블랜드는 득표수에서는 해리슨을 9만 표 차이 정도로 눌렀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지는 바람에 백악관을 해리슨에게 내 줘야 했다. 여기에는 주미 영국 대사였던 라이놀 웨스트의 발언 탓이 컸다. (공화당 측 선거참모가 웨스트에게 "영국 입장에서는 어떤 후보가 되기를 원하는가?"라고 묻자  웨스트는 "우리는 영국에 호의적이고 자유무역과 관세인하를 모토로 하는 클리블랜드를 원한다!"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측에서는 이 발언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영국은 클리블랜드를 원한다!"고 퍼뜨렸고 이것은 인구가 많은 뉴욕주에서 영국을 혐오하던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이 클리블랜드의 표에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떨어졌다.

 

이후 4년 뒤 해리슨의 재선을 저지하고 대통령이 된 그는 당시 악화되던 경제상황이 결국 공황으로 확산되면서 경기는 더욱 침체되었고 실업률은 증가했으며 물품의 가격이 떨어지고 농업은 거의 붕괴 상황에 이르렀다. 경제 공황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당을 4년간 차지했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다시 대패하여 전체의석의 1/3 이하로 쪼그라들고 만다.

이런 배경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클리블랜드의 임기였다.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된 이래 노동운동은 조직화, 거대화되어갔으며 특히 같은 해인 1886년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은 그의 재임기에 일어난 최대의 노동운동 중 하나였다.

 당시 철도노동자들이 벌인 미국 최대규모의 파업으로서 당시 미국 철도교통의 대부분이 마비될 정도였다. 이때 클리블랜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강제진압하게 했는데 이때 연설에서 "시카고에 엽서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 미합중국 육해군 전군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그 엽서는 틀림없이 배달될 것이다. 와 "국민이 정부를 돕더라도, 정부가 국민을 도와서는 안 된다.(Though the people support the government; the government should not support the people)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이 날을 노동자가 단결해야 할 날로 꼽았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의 시작이다.

 

이렇듯  클리블랜드 정책의 강령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부의 개입을 막고 있었고 노동자에게도 우호적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면서도 국민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조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이 점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당시 미국국민들은 이 연설에 크게 환호하며 그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대통령으로써의 평가나 인기 순위는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편으로 그저 무난한 수준이었다. 높이 평가받는 점은 원칙과 소신, 강직함으로 부패를 근절했다는 업적이지만 위에서 언급된 노동운동 탄압과 경제 위기를 초래한 점에서 평가가 많이 깎인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가들은 대체적으로는 링컨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이의 대통령들 중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학자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자유경제 역사가나 보수적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헤이마켓 사건을 불량국민에 대한 정부의 단호한 대응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수정주의 및 진보적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협상능력도 없이 밀어붙이는 것만 아는 최악의 탄압사건으로 본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부정적 인기를 상쇄해주는 것이 바로 영부인 프랜시스였다. 그녀는 품위있고 우아한 행동과 말투 그리고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이거나 참여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서민들은 그녀의 구호활동에 감명받았다고 하는데 남편과는 다른 행보를 걸은 그녀의 모습은 천사와도 같았다고 한다. 이렇듯  미모와 따뜻한 성품을 겸비한 젊은 퍼스트레이디는 미디어와 대중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클리블랜드에게 비판적인 언론들은 그를 ‘프랜시스의 남편’이라고 불렀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강직하고 완고한 성품이었으며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투박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가식이 없는 솔직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다소 실패한 면이 많았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 결정에서 도덕적 기초를 생각했고 정직함과 근면함은 정말 모범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권위나 공직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두 부부는 18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71세의 클리블랜드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클리블랜드가 죽고 6년 뒤 그녀는 대학 교수와 재혼했으며 1947년까지 살았다.

 

 프랜시스의 높은인기를 반영하듯 미국에서는 그녀의 인형이 만들어졌고 한다.

 

출처:엔위하키 미러


 

 

 


 

 

추천수17
반대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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