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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유스티아누스&테오도라

콜로라도 |2014.01.04 13:03
조회 17,109 |추천 41

서기 524년 마케도니아 어느 작은 마을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한 남성 앞에 화려한 복장을 입은 로마장군이 긴장한 듯 서 있었다.

 

"당신의 숙부 아니 황제폐하께서 찿으십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청년은 읽던 책을 덮고 옷을 갈아입은 남성은 마을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말 위에 올라탔다. 말 위에서도 그는 계속 마을을 뒤돌아 보았다.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이기에....

 

130여년전 로마는 두 나라로 갈라졌다. 그 중 하나인 동로마 혹은 비잔틴제국이라 불리는 이 나라는 동방무역으로 인해 상당히 번영하고 있던 나라였다. 그러나 황위다툼이 자주 일어났고 그것은 군사력을 쥐고있던 군인들에게 있어 일종의 기회였다. 그중 유스티누스라는 장군이 두드러져 마침내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나이가 꽤 많이 든 노인이었다. 여기에 자식까지 없자 형의 아들인 조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데려오게 한 것이다. 말 위에 앉아있는 그 청년이 바로 다음 황제가 될 후계자였다. 그의 이름은 유스티아누스였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마케도니아의 빈농 가정 출신으로

군인으로 성공한 삼촌 유스티누스 1세의 행정을 돕다가

공동황제로 임명되었고 마침내 유스티누스 1세 사후에 단독황제로 등극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유스티아누스는 행정일을 배우는 적응기간을 거치던 중 하루는 무료함에 지쳐 시내구경을 나서게 되었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시종 한사람 만을 거느리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 죽이는데... 오오오"

 

사람들을 해집고 안쪽에 들어선 그는 눈이 휘동그래졌다.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던 야릇한 광경

 

한 아름다운 여성이 알몸으로 봉을 잡은체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라... 그녀는 말 사육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적에 그녀의 집안은 수도의 전차패 중 하나인 녹색패의 탄압을 받고, 그녀는 반대당인 청색패의 비호를 받았다.  그녀는 악랄한 아버지에 의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만 했고 그때 받은 돈들은 모두 아버지의 술값과 도박으로 탕진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는 함께 몸을 팔았던 여동생과 함께 집을 나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남자들의 품에 안겼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옷을 벗고 춤을추는 무희가 되었고 돈을 받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몸으로 춤을추는 댄서이자 때때로 몸까지 팔아야 했던 테오도라는 시장의 한 무도회장에서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 마침내 황후에 자리에 까지 올랐다.

 

유스티아누스는 매혹적인 그녀를 보자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처음에는 그녀의 매끈한 육체를 보았으나 계속 만나면서 그는 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유스티아누스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고 테오도라는 유스티아누스와 동거까지 하였다. 문제는 그가 일반인이 아닌 다음 후계자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의 반대파들은 이 사랑을 두고 온갖 소문을 퍼뜨렸다. 주요 타켓은 테오도라였다. 사실 소문이 나게 될 정도로 그녀는 알몸무희로 유명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법까지 고쳐가며 그녀와 정식결혼을 했다.

 

서기 527년 유스티누스가 사망하자 그가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라는 마침내 황후의 자리에 오른것이다. 그녀는 유스티아누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자신의 약점이었던 좋지못한 과거를 그는 받아들였고 감싸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황후가 되면서 정숙한 여인으로 바뀌었고 남편에 대해서도 사랑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니카의 반란이었다.

니카의 반란: 유스티아누스는 즉위 이전에 정치적 ·종교적 정책을 지지하는 청파(靑派)를 비호하고 반대파인 녹파(綠派)와는 대립하였으나, 제위에 오르자 소동의 원인이 되고 민중적 ·정치적 압력단체가 되기 쉬운 당파를 탄압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 ·녹 양파가 532년 1월 ‘니카(그리스語로 승리를 의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니카를 외치며 황궁을 포위한 청파와 녹파들은 황제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해 위협을 가했다. 이에 겁을 먹은 유스티아누스는 보물을 챙겨 탈출하려 했지만 테오도라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폐하 수도를 버리시고 도데체 어디로 가시겠단 말입니까 당신이 수도를 벗어난 순간 당신의 황제가 아니게 되고 저 또한 황후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수치스럽게 황후의 옷을 벗느니 당당히 황후의 옷을 입고 죽을 것입니다. 폐하도 황제로서 당당히 행동하십시오"

 

유스티아누스는 헤머를 맞은듯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는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먼저 우호적인 청파를 뇌물을 주어  분열시킨 후 곧 정규군이 투입되어 녹당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청당 또한 환호하며 이를 반겼으나 그 다음의 희생양들은 자신들이 되고 말았다. 결국 테오도라의 현명한 조언으로 유스티아누스는 니카의 반란을 진압했고 황제권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렇게 힘을 집중시킨 유스티아누스는 테오도라를 더 지극하게 사랑하게 되었고 테오도라 또한 유스티아누스의 품에 안겼다.

 

유스티아누스는 강화된 권력으로 여러가지 사업을 벌였다 먼저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고 현재까지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당대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인 성 소피아 대성당을 완성했으며, 벨리사리우스나르세스를 파견하여 고트족반달족에게 점령당했던 이탈리아 본토와 카르타고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를 수복하여,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제외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을 다시 수복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여 한때 지중해를 다시금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다.

 

 벨리사리우스:  환관인 나르세스와 함께 동로마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는 또한 테오도라의 여동생과 결혼해 유스티아누스의 동서가 되기도 한다.

그는 탁월한 지략과 전술로 반달제국을 멸망시켰고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해 한 전투에서

4000명의 군대로 4만명의 게르만족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특히 적은부대로

다수의 적을 물리치는 것에 능했는데 이것은 그가 원해서가 아닌 유스티아누스와 테오도라의

의심과 견제로 대규모 부대의 병력을 배당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환관이자 장군인 나르세스는 환관답지 않게 과감하고 전략,전술에 능해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전선으로 소환되자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외의 다른전투에서도 압도적인 위력으로 게르만군을 격파하였다. 그들은 유스티아누스의 두개의 창이었다.

 

 유스티아누스의 3대업적 중 하나인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 유스티아누스가 천사를 본 꿈을 꾸고 난 뒤 만들었다. 이 거대한 대성당은 이후 중세에도 서유럽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매메드 2세의 침공으로 함락된 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는데 성당 옆의 네개의 큰 첨탑이 그 상징이며 내부의 벽화도 모두 회칠하여 덮어버렸다.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회칠이 벗겨저 아름다운 벽화가 드러났다. 터키공화국이 들어선 뒤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민간에 공개되었으나 지난해 이슬람 학자들이 다시금 이슬람 모스크로 바꾸자는 소송을 내서

시끄럽다.

 

유스티아누스는 천한 신분 출신의 황후 테오도라를 극진히 사랑했으며 따라서 실제로 공동으로 통치했다.하지만 테오도라는 현명하고 사리에 밝아 측천무후와는 달리 남편에게 조언을 해주는 역할에 충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상당수의 기록이나 역사가들은 테오도라 황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라틴어에 더 익숙했고 그리스어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 학자들은 황제를 무식하다고 비웃었다, 그래서였는지 로마 역사와 과거의 로마 풍습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서 유명무실화된 고대의 여러 관직이나 풍습을 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고대 애호가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또한 기독교를 매우 선호하는 성향을 보여 유태인들을 가끔씩 괴롭히거나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문닫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황제 나름의 복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국력을 쏟아부은 세가지 사업은 유스티아누스를 지금도 유명하게 해 주었다. 물론 당대에도 그는 훌륭한 군주로 인식되었다. 현명한 황후 테오도라와 후계자를 가진 절대군주 유스티아누스는 마냥 행복할 것 같았다.(그는 세간에 공처가라 불릴 정도로 테오도라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함께 있으려고 했다. 심지어 소피아 대성당에 자신 외에도 황후의 것도 세겨넣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548년 동로마 제국 전역에 페스트가 퍼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도시인구가 집중되어 있던 콘스탄티노플에 피해가 더 커졌다. 황궁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유스티아누스와 테오도라가 동시에 감염되어 사경을 해매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병에 시달렸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은 괜찮은데 당신은 어떠냐는 물음을 계속 던졌다고 한다. 이후 유스티아누스는 가까스로 병세를 회복했지만 테오도라는 결국 4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만다.

 

유스티아누스는 테오도라 황후가 죽고 삶의 활력을 잃고, 말년에 정신분열증에 걸려 지나치게 종교문제에만 집착했다. 당시 정통파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있던 이집트와 시리아 단성론파간의 분쟁에서 자신이 고안한 신교리를 통해 개선된 판결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그 방법으로 내세운 신교리가 정통파와 단성론자들 모두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스티아누스는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의심증에 빠져 벨리사리우스를 한직으로 내모는 등, 좋은 모습으로 결말을 짓지는 못했다. 게다가 국고도 이 시점에 와서는 후임황제가 한탄할 정도로 고갈되어버렸다. 이후 유스티아누스는 죽음에 이르러  "황제가 죽었다 만세"라는 백성들의 외침을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

 

 

유스티아누스는 일자무식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삼촌을 도우면서 습득한 교양으로 동시대 최고의 교양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군주였다. 선대의 황제들이 쌓아올린 제국 재건책을 바탕으로 고토 수복에 나서 효율적으로 병력을 축적 투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명한 황제였다. 이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고 불린다. 테오도라 또한 어두운 과거를 현명하게 벗어나 황제이기 이전 사랑하던 남편에게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아내였다.

 

출처:엔위하키 미러, 로마인 이야기

추천수41
반대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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