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얘기지만, 솔직히 이런 얘기 터놓고 말할 상대가 없어서 여기에다가 끄적여봅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조언이든 아니면 저를 향한 욕이라도 괜찮습니다.
사실은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대화가 하고 싶은데, 이 곳이 적당한 것 같아 적습니다.
이제 저와 아내는 어느 새 36살이 되었습니다만, 처음 만났던 건 12년 전이었습니다.
저는 군대를 제대한지 얼마 안된 대학생이었고,
아내는 서울로 상경하여 저희 집 근처에서 자취하는 회사원으로, 동갑내기 친구였어요.
연애하던 시절, 저는 나쁜 남자친구였지요.
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면 3개월을 채 못버티고 회사를 옮기려 퇴사하기 일쑤였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제가 철이 없었어요.
어렸고, 치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6개월가량을 백수로 지내기도 했구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곳 저곳에 취업을 잘 하기는 했지만, 끈기가 굉장히 부족했어요.
그렇게 능력없는 남자친구로 3년을 사귀다, 27살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얼떨결에'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태로 서둘러 결혼까지 하게 됐지요.
결혼 초, 임신때까지도 저의 끈기부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서툴고 능력없는 남편인지라, 임신중에도 먹고싶은 것, 입고싶은 것 마음껏 해주지 못했어요.
그게 아마 아직까지도 아내의 마음속에 한이 되어있을 겁니다.
저와 아내는 모두 부모님의 사랑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제 경우에는, 아버지가 걸핏하면 술드시고 행패부리시던 분이셔서
부모님 이혼 후, 장사하시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구요.
어머니는 장사가 바쁘셔서, 거의 혼자 자라다시피 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연락도 안하고 살고있어요.
아내의 경우는 조금 더 안좋았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남아선호사상이 강하신 아버지는 남동생만 데려가시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됐는데, 어머니가 어린 딸을 이모에게 맡기고 이민을 가셨었거든요.
지금은 다시 한국으로 오시긴 했습니다만, 가정부로 일하고 계시고
연세가 있으셔서 언제까지 일하실지 모르겠으나, 노후준비는 안되어 계십니다...
뭐, 그렇게 저와 아내 모두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자라다보니,
아이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한 편입니다.
저는 사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제가 이런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종일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퇴근길에는 아이 얼굴을 볼 생각에 하루가 행복하더군요.
정말로, 우리 아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덩이였습니다.
저도 아이생각에 끈기를 가지고, 일을 열심히 했구요.
꽤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 만큼 한동안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아이에게 정말 좋은 엄마였고,
저도 아이에게 나름대로 괜찮은 아빠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집, 회사, 집 밖에 모르고.... 술도 일절 입에 안대고, 오로지 가정밖에 몰랐거든요.
부부 사이에는 사실 문제가 있긴 했어요.
딱히 다투거나, 싸우진 않았지만, 꽤 오래전부터 각방을 써왔거든요.
아내는 아이와 같이 자고, 저만 따로 혼자 잤습니다.
딱히 이유는 없었어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그렇게 하길 원했습니다.
저는 그냥 아내가 아이때문이라고 하니 마땅히 따랐지요.
이 외에도, 사실 문제는 더 있었습니다.
결혼 이후 관계를 갖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결혼생활 9년간, 10번이나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나요. 2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이것도, 항상 우리 부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때문이라고 하니
다 웃으면서 참고 그러려니 했습니다.
음.... 9년간 단 한번도 아침상 받은 적이 없어요.
제가 원래 아침을 잘 안먹고 다니는 편이었으니, 이건 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래를 하면, 아이 옷은 차곡차곡 개서 서랍장안에 넣어지는데요.
제 옷은 그냥 꾸깃꾸깃 둘둘 말려서 장농안에 처박아집니다.
음식은 항상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로만,
제가 배가 고프면 아이가 배고파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가 밥먹을 때 같이 먹었구요.
제가 컴퓨터하다가도,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컴퓨터해야한다면 당장 일어나야 했구요.
TV나 라디오듣다가도 아이가 영어듣기공부해야한다고 하면, 보던 TV나 라디오 꺼야했어요.
이런 건 지극히 당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9년간 모든게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가장으로써, 남편으로써의 대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결혼전과 임신 초기의 제 업보려니 하고 달게 받았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아이에게는 정말 좋은 엄마였으니까요.
제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댓가일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저도 아이를 정말 사랑하니까요.
우리 세 식구가 같이 장보러 다니고, 여행도 다니고, 장난도 잘 치고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사이좋은 부부로 지냈어요.
아이가 원하는 것들은 왠만하면 다 사주고, 주말이든 평일이든 아이와 잘 놀아주는
가정밖에 모르는 아빠, 그리고, 아이교육에 매우 열정적인 엄마... 뭐 이랬지요.
워낙 가진 것 없이 시작한 결혼생활에서, 조금씩 돈도 모으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 집 재정상황을 전혀 몰라요.
모든 재산관리는 다 아내가 했습니다. 제 급여통장 출금카드도 아내가 가지고 있구요.
저는 우리 집 재산이 얼마가 있는지 모릅니다. 전세집 명의도 아내이름으로 되어있구요.
전세집 이사할 때, 대출 조금 받았던 게 있다고 들었고, 마이너스 대출도 조금 있다고 했었는데,
대출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쓴 것도 있어요.
주식투자한다고 욕심부리다가 천만원 날렸지요....
여튼 뭐.... 이렇게 저렇게 그냥저냥
문제가 많은 부부사이이기도 하면서, 사이는 좋은 그런 부부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괜찮아도,
결국 쌓인 문제는 한번에 터지더군요.
창업을 하고자, 이런저런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의견대립으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사소한 문제였는데, 굉장히 서운했어요.
아무튼, 제가 이혼을 하자고 말했습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버렸어요.
그렇다고, 흥분했다거나, 화나서 홧김에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한 번 터진 마음은 좀체로 사그러들지 않았지만,
말투도, 마음도 매우 차분했고 진지했지요.
아내는 정말 놀라고 당황하더군요.
울면서, 결혼 전, 그리고 임신초기 서러웠던 얘기들을 쏟아냅니다.
이혼가정에서 자라온 상처, 그대로 아이에게 주고싶냐구요...
가장 제 취약한 약점이기도 하지요... 우리 아이요....
아이는 꼭 제가 키우고 싶습니다.
엄마없이 잘 키울 자신은 없지만, 아이없이는 정말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아이에게 제 상처를 그대로 주고싶지도 않습니다만,
만약 이혼한다면, 아이는 제가 키워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생각보다 꽤 흔쾌히 그러라고 하길래, 이 점은 당황스럽기도 했지요.
정말 확실하게 이혼으로 마음을 굳히게 된 건 그 이후였습니다.
이혼에 대한 거 저보고 아이에게 말하라더군요.
그래서 아이를 불러다놓고, 엄마는 주말에만 만나고 아빠랑 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이미 체념하고 알고있었다는 듯이 '응' 하는거에요.
엄마가 아빠랑 헤어질수도 있다고 얘기했었답니다.
제가 이혼얘기 꺼냈을 때, 아내는 어떻게 자기한테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냐며 울었는데...
알고보니, 이미 이전에 아이에게 먼저 그런 얘기를 했었더군요...
아마, 제가 먼저 이혼을 얘기하지 않았더라도, 아내가 말을 꺼냈을수도 있었겠구나 싶더라구요.
정말 확실하게 이혼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건 그 때였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친정으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술은 할 줄 모르는데, 정말 취하고싶은 밤이네요.
제 인생이 한스럽습니다.
송두리째 갈아엎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