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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역사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영락제와 조선의 여인들-

콜로라도 |2014.01.10 12:23
조회 10,720 |추천 11

1408년 명나라의 환관 황헌은 그 작은눈을 희번득 거리며 무언가를 처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에는 총 20여명의 미녀들이 서있었다. 황헌은 그 여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옆을 돌아보고 왕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냈다. 그러자 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은 쓴 입맛을

다시면서도 웃는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드디어 황헌이 총 8명의 미녀를 골랐다. 그들은 진헌녀라는 이름으로 명나라에 바쳐질 여자들이었다. 원나라와 고려에서 시작된 공녀는 명과 조선으로 바뀐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특히 이것은 태종이 먼저 원한 일이기도 하였다.(태종은 1400년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건문제의 원병요구를 거절하고 당시 연왕인 주체에게 사자를 보냈다. 이후 연왕이 정난의 변을 승리로 이끈 후 영락제가 되어 조선에 책봉사절을 보내 태종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1408년 6월 황헌이 사절로 와서 건낸 한마디는 조선조정을 뒤 흔들었다.

 

"대명국의 공주마마와 귀국의 세자를 결혼시키라고 황제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과거 조선국왕전하를 보신 폐하께서  호랑이의 상이라고 극찬하시며 그 자식도

 마땅히 호랑이일테니 짐의 딸과 결혼할 자격이 있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명의 속셈은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원과 고려의

관계를 재탕하려는 것을 태종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청을 거절할 순 없었다. 고민하던 태종은 세자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완곡히 거절한 후 대신 조선의 미녀를 황제폐하께 바치겠다고 역제안을 했다. 황헌은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 청을 수락했다. 이후 전국에 간택령을 내려 처녀들을 불러올린 태종은 황헌에게 직접 고르라고 하였고 황헌은 직접 8명의 처녀들을 골랐다. 장차 태종,세종 양대의 업보라고 불릴 처녀공납의 재시작이었다.(세종대왕 또한 명에 처녀들을 골라 자주 보내었다. 사대외교의 폐해중에 하나로서 세종대왕의 흑역사중 하나이다. 이것은 명나라 5대황제인 선덕제 까지 이어지다가 6대황제인 정통제의 칙령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정든 고향을 떠나 먼 중국에 성노리개로 끌려가게 될 여덟여인들은 가족들을 붙잡고 통곡을 해 그 울름소리가 장안을 시끄럽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명은 어쩔 수 없는지라 권씨,한씨,최씨,여씨,황씨 등 여덟여인들은 가족들과 마지막 만남을 가진 후 명나라로 가는 가마에 몸을 실었다.

 

태종은  진헌녀로 뽑힌 권씨의 아버지 권집중에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며, 권씨의 오빠 권영균은 중군사정(中軍司正)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곱여인들의 아버지와 남성형제들에게도 비슷한 직위를 내려 위로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11월 12일, 황엄과 함께 명나라로 떠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영락제의 후궁전에 머물렀다. 당시 북경은 자금성의 공사가 막 시작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한족이나 몽골족 후궁들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여덟여인은 서로를 지켜주기로 맹세하고 꿋꿋하게 버텨 나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1409년 2월 9일 조선의 진헌녀를 보기 위해 북경으로 돌아온 영락제는 여덟명의 조선여인들을 살펴보다가 특히 권씨의 뛰어난 미모에 반해 그녀를 즉석에서 현인비(顯仁妃)를 봉하고, 그 오라비 권영균(權永均)을 3품 광록시경(光祿寺卿)에 제수하여 채단(綵段) 60필, 채견(綵絹) 3백 필, 금(錦) 10필, 황금 2정(錠), 백은(白銀) 10정, 말 5필, 안장[鞍] 2면(面), 옷 2벌[襲], 초(鈔) 3천 장을 하사하였다. 그외의 일곱여인들은 각각 여미인,임순비,이소의,최미인,정비,송비,황비라는 직첩을 내려주었다.

 명나라의 3대황제인 영락제는 특히 조선의 미녀를 매우 좋아했는데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일부학자들은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여인이었기에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였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중국의 대다수 학자들은 1360년생인 영락제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인 주원장의 세력이 강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한다.

 

영락제는 이 가운데 현인비 권씨를 매우 좋아했다. 명사(明史) 기록에 따르면,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권씨의 아름다움에 반한 영락제가 그녀에게 어떤 장기가 있느냐고 물었고, 권씨가 옥소를 꺼내 불자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퍼져 영락제가 매우 기뻐했으며 곧 권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한 달 만에 그녀를 정식 황비로 책봉하고 그녀와 동행해 온 권영균 에게도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특히 권씨는 다소곳하고 예의에 밝았으며 무척 청순한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북방에서 거칠게 살아온 영락제에게는 꽃과같은 여인이었다. 현인비 권씨 또한 영락제를 사모하게 되어 중국말을 가장 빨리배웠다고 전하며 궁중에 가장 먼저 적응을 하였다고 전한다. 현인비와 하루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영락제 또한 자연히 그녀가 선사하는 조선의 음식에 매료되었다.(조선 음식과 술도 입맞에 맞았던지 그 재능이 있는 궁인도 보내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영락제는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서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는데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본래 남경은 건문제의 세력 기반이었는데 북방에서 들어온 영락제로서는 영 불안했고, 아직 북방에서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던 상황이다 보니 북방에 위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1407년에 축조를 시작해 1421년에 완공한 자금성 그러나 영락제는 완공된지 불과

 3년뒤에 숨을 거둔다. 즉 자손들과 만주족들이 잘 활용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했으며, 이를 통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시설도 보완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런 내정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외정적인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만큼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기간 동안 무려 5차례나 몽골에 친히 원정하여 승리를 거두어 몽골족이 명을 넘보지 못하게 했으며 티베트조선, 여진족에 대해서도 조공을 받았고 베트남에도 원정군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일본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건문제 시절 일본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감합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대함대 항해이다. 1405년에 첫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6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명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

 원나라 운남왕의 아들로 태어나 포로로 잡힌 후 거세당했던 환관 정화는

네번의 대항해를 떠나 세계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이 때 명나라에 처음으로 기린이 들어왔는데

이는 당시 기린이 나타나면 그 황제는 명군이다. 라는 속설을 확정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이렇듯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치세는 영락성세(永樂盛世)라 불렸다.   그러나 영락제가 점차 승승장구해가려고 할 무렵 조선여인들에게는 비극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락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1407년에 사망한 인효문황후를 대리하여 명 황실의 내명부를 관장했던 권씨는 1410년 10월 24일에, 북방 정벌을 나선 영락제를 동행하였다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던 길에 중병을 얻어 산동 임성(臨城) 제남로(濟南路)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죽음에 크게 비통해 한 영락제는 친히 그녀의 제사를 지내주고 친히 궁사를 지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玉琯携來玉殿吹(옥관휴래옥전취) - 옥피리를 꺼내 옥전에서 부니,
天生艶質自高麗(천생염질자고려) - 고려에서 온 타고난 미인이구나.
無端北狩蛾眉死(무단북수아미사) - 북벌에 나선 미인이 까닭 없이 죽고,
風雨荒城葬盛姬(풍우황성장성희) - 비바람 몰아치는 성에서 그녀의 장례가 한창이구나    

그러나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음모가 있을 것이라 주장하고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결국 1414년에는 권씨의 죽음이 권씨를 질투한 다른 조선의 공녀 여미인(呂美人)이 권씨와 함께 영락제의 북방 정벌을 동행했던 길에 미리 내관을 통해 은장이에게 구했던 비상을 권씨의 호도차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보고가 들어오자 대노하여 은장이와 내관 6인을 모두 죽이고 여씨에게도 낙형(烙刑: 단근질)을 가해 죽게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힘 없이 건너온 여씨는 결국 먼 이국땅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여씨 성을 가진 명나라 궁인이 여미인에게 동성애를 구애하였으나 여미인이 들어주지 않자 원한을 품고 무고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영락제는 이에 어이없어 하며 당시 조사관과 여궁인을 비롯한 관련자 2800여명을 죽였고 억울하게 죽은 여미인의 신원이 복관되면서 미인의 윗 작위인 첩여로 추승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임씨와 정씨는 국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했다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최미인과 한씨 뿐이었고  이를 어여(魚呂)의 난(亂)이라고도 한다.

 

함께 살아가자던 여덟여인들의 맹세는 헛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두 여인의 모진운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락제의 거대한 사업은 그만큼 거대한 비용을 요구한다. 자금성을 짓고 정화의 대함대를 만드느라 중국은 물론 인근 지역까지 쓸만한 목재가 고갈될 지경이었으며,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에 허리가 휘고 식량마저 빼앗겨 굶기가 일쑤였다. 삼려오출이나 정화의 서방원정 역시 들어간 비용에 비해 실익은 없다는 비판이 드높았다. 마침 자금성에 대화재가 일어나 옥좌까지 잿더미로 변하고, 지방에서는 홍수와 역병이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규모 민란까지 벌어지자 “이것은 위정자의 부덕함을 하늘이 꾸짖는 것”이라면서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유교적 명분론 앞에 마냥 동창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었던 영락제도 결국 타협하여,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신하들과 소통하기로 한다.

 

명나라의 압력이 늦춰지자 이민족들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베트남에서는 명나라의 지배를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몽골의 칸도 영락제의 사신을 돌려보내며 더 이상 저자세를 취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영락제는 이것을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너희의 말을 듣다 보니 국방이 해이해지고 오랑캐가 날뛴다”며 신하들을 꾸짖은 그는 다섯 번째 몽골 친정에 나선다. 하지만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던 그에게 그것은 지나친 무리였다. 결국 그는 몽골의 칸을 뒤쫓다가 고비사막 한가운데에서 숨지고 말았다. 1424년 8월 11일이었다.

 

 영락제의 시신은 북경으로 옮겨져 성대한 장례식을 거쳤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여인들에게 운명의 갈림길이 되고 말았다. 과거 명나라의 초대황제인 홍무제 주원장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여인들의 정조를 믿지못한다. 내가 죽고나면 내 여인들은 각자 다른남자의 품에 안기려 하겠지 그꼴을 두고볼 순 없다 내가 죽거든 내가 총애한 여인들을 모두 나와 함께 묻어다오 그렇게 되면 난 죽어서도 그녀들과 함께 즐길 것이니라..."

 

2대황제인 건문제는 이 유언을 받들어 홍무제의 후궁 수십여명을 홍무제의 묘에 함께 묻었다. 그런데 문제는 명나라가  주원장의 유훈을 받들어야 하는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전 황제의 말을 후대가 본받아야 할 법이었다. 따라서 그의 후계자인 영락제 또한 후궁들과 함께 잠들기를 원했고 4대황제인 홍희제 역시 그 뜻을 받들어야만 했다. 이 때 후궁 수십 명이 영락제의 능에 함께 매장되었는데, 영락제가 생전 한씨를 좋아하고 최씨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여인의 생사가 갈렸다. 한씨는 영락제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순장을 당해야 할 처지였고 최씨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영락제가 한씨를 좋아한 이유는 그녀의 현명함 때문이었다. 하루는  같이 끌려온 황하신의 딸 황씨가 끌려가기 전날 사랑하던 남자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는데 이후 벌어진 처녀성 검사에서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때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는데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에게 뺨을 때렸다고 한다.)

 

한씨의 죽음(그녀는 한확의 여동생으로서 인수대비의 고모였다. 그녀는 끌려가기 전날 오라비 한확이 명나라 궁궐에 가면 호의호식 할 것이라고 위로하자 화를 내며 누이를 팔아먹고 무엇이 그리 좋단 말이오 하며 호통을 첬다고 한다)을 두고 세종실록은 다음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제가 죽자 후궁으로 순장(殉葬)된 사람이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여 죽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유모의 이름)에게 이르기를, “유모! 나는 가요. 나는 가요.”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내 죽었다.”

 

한씨의 공녀입궐과 죽음은 한확의 집안인 청주한씨에게는 크나큰 기회였다. 한확은 명나라 황제의 외척이라는 타이틀로 조선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가문이 되었고 이를 기회라고 본 수양대군과 혼담을 맺어 이후 세조시대에도 훈구가문으로 승승장구했다. 한확은 한 술 더 떠 자신의 또 다른 누이를 5대황제인 선덕제의 후궁으로 바치는데 이 한씨여인 또한 비가 되어 오라비를 든든하게 지원해 주었다.(원래 이 여인도 선덕제가 죽은 뒤 순장당할 운명이었으나 그 언니가 순장된 마당에 동생도 순장시킬 수 없다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464년 영종황제는 마지막 숨이 넘어갈 무렵 허겁지겁 대신들을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쥐어짜는 힘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장은 인간의 생목숨을 끊으라는 것으로서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나는 어린시절 부터 궁인들의 통곡과 비명소리를 들으며 내가 죽은뒤에는 저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제 나는 곧 죽는다. 나는 여인들의 죽음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비록 태조께서 정하신 일이나 그분도 이 이상의 희생을 바라시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죽거든 순장을 더 이상 하지말고 내 말을 곧 후대의 법도로 정하라...."

 

이후 영종은 할 일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드디어 조선여인들을 비롯한 궁정여인들의 공포였던 순장이 폐지된 것이다.

 

출처:네이버캐스트 영락제편, 엔하위키 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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