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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술레이만 대제&후렘 황후

콜로라도 |2014.01.08 13:13
조회 7,716 |추천 9

1530년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선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 살려주세요..."

 

크림칸국의 잔인한 몽골전사들은 마을을 불지르면서 사람들을 죽이거나 납치해갔다.

 

주로 노인들이나 반항하는 남성은 죽였고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항복한 남자들은

 

사슬에 묶인 체 채찍을 맞으며 걸어가야만 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카파였다

 

그곳에서 그들의 운명은  남자는 노예, 소년과 소녀, 그리고 젊은여성들은 미모에 따라 성노리개로

 

정해져 있었다.

 

한 소녀가 산위의 풀 숲에서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머리를 한 13세쯤 되보이는 이 소녀는 오들오들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여 여기에 숨어있었군....."

 

음흉한 미소를 띈 크림칸국의 전사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 또한

 

사슬에 묶인체 정처없이 걸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의 황궁 안에서 한 젊은황제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옆에있던 총희는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마하데브란... 그녀는

 

옆에있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자 주인인 술레이만의 장남 무스타파를 낳아준 여자였다.

 

술레이만 또한 그녀에게 고마워 하고 또한 사랑하고 있었다.

 

술레이만의 아버지 셀림 1세는 잔인하지만 정력적인 인물로서 이집트를 정복하고 페르시아를 격파한 훌륭한 전사였다 하지만 그는 후계자는 단 한명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서 친하 자기 손으로 술레이만을 제외한 다른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눈앞에서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 본 술레이만 그때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으며 그때부터 자주 악몽을 꾸었다. 1520년 마침내 셀림이 죽고 난 후 술레이만이 술탄이 되었다.

 아버지 셀림 1세로 부터 후계자로 낙점된 술레이만은 형제들이 모두 아버지의 손에

죽은 후 안정된 후계자 구도를 걸을 수 있었다.( 이 소재는 창세기전 파트 3에서 살라딘 스토리에 차용되었다.)

 

한편 카파에 도착한 재상 이브라힘 파샤는 술탄에게 바칠 미모의 여성노예를 고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보던 그는 노예시장에서 상품대에 오른 한 소녀를 보고 눈이 휘동그래 졌고 그녀를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 그녀의 이름은  록셀라나 리조보스카 우크라이나 출신의 그리스 정교 사제의 딸이었다. 얼마 후 이브라힘 파샤는 궁정환관을 매수하여 록셀라나를 황제의 침실에 들여보내는데 성공했다. 비단이불에 둘둘 말려져 술탄에 보내진 그는 알몸이었는데 술탄은 이불을 푼 후 드러난 그녀의 몸매와 미모에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술레이만 대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황후 록셀라나

그녀는 술탄의 노예에서 황후가 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후일 하렘권력의 발단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였다.

 

술레이만은 그날부터 록셀라나에게 푹빠져 매일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술탄이 그녀를 사랑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녀의 지적능력 때문이었다. 사제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여러분야의 책을 읽었고 이를 바탕으로 황제에게 점차 조언을 해주거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이전의 순종적이기만 하던 마하데브란과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술레이만 20세의 나이에 즉위한 혈기왕성하고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즉위 초에 그를 본 한 베네치아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술탄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인물로, 표정에서 단호함이 느껴지는 강인한 인물이다. 그는 이름대로 총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다.”

 

술레이만 1세는 즉위 전부터 증조부 메메드 2세가 마무리 짓지 못한 정복 사업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헝가리의 관문 베오그라드 요새 점령과 로도스 섬 점령이었다.

 베오그라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술레이만 황제가 적장인 헝가리왕을 무릎 꿇리고 있는

그림

 그러나 몰타기사단과의 로도스 섬 공방전은 장기간에 걸쳐 실시되었으나 크게 고전하였다.

 

술탄의 군대는 동쪽으로도 진군했다. 1534~35, 1548~49, 1554~55년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술레이만 1세는 아덴, 예맨, 바그다드와 이라크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서부, 소아시아 동부 등을 점령했지만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패망시키지는 못했고 1555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1538년 9월 28일에는 하이르 앗 딘(대항해시대에서 붉은수염 바바로사 하이레딘의 모델)이 이끄는 술탄의 해군이 그리스 서부 프레베자 근해에서 로마 교황령,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를 격파했다. 술탄의 해군은 트리폴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지역도 장악했다. 이로써 오스만투르크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했다

 

직접 전장터를 다니던 와중에도 술레이만은 록살리나를 그리워하며 그녀에게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록셀라나 또한 술탄을 그리워 하는 답장을 보내기도

 

하였다.(그녀의 편지에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일상에 대해 담백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궁전에 돌아와서도 술레이만은 록셀라나를 찿았다. 이에 따라 마하데브란을 제외하고 그 어떤 후궁들도 술탄의 얼굴을 보기가 불가능했다.

 

 

술레이만 1세 치세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누렸다. 황실이 후원하는 많은 예술가 집단이 활동했다. 도제식으로 수련을 마친 예술가와 장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정해진 등급을 부여 받고 연간 네 차례 급료를 받았다. 1526년의 경우 40개 집단에 속한 600여 명이 활동했다. 당대에 가장 재능 있는 예술가와 장인들이 이러한 집단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단 이슬람권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많은 이들이 왔다. 이를 통해 유럽 예술과 이슬람 예술의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황실을 위해 일하는 예술가들은 화가, 보석세공사, 금세공사, 모피공, 건축가, 직물 제조공, 제책 장인 등 매우 다양했다. 술레이만 1세 이전의 술탄들은 대체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술레이만 1세부터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고유의 예술 전통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술레이만 1세는 내치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이슬람권의 전통적인 법률은 코란에 바탕을 둔 법체계인 샤리아였다 술레이만 1세는 그런 샤리아가 미처 제시하지 못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까눈’(일종의 행정 법규체계)을 광범위하게 체계화했다. 또한 공정하게 사유재산권을 보장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그는 광대한 영토에 걸쳐 다양한 인종과 종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법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또한 그는 유능한 관료들을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등용하여 제국을 체계적으로 다스렸다. 술레이만 1세 시대 이후 노예 출신 관료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렇듯 전성기를 이끌고 있던 술레이만은 록살리나와 사랑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사실 오스만제국의 황후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과거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대패해 사로잡혔을 때 티무르가 바예지드의 황후를 벌거벗기고 술을 따르게 한 뒤 바예지드가 보는 앞에서 겁X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그 수모를 잊지못해 그때부터 황후를 두지 않았다. 궁궐의 모든 여인은 공식적으로 술탄의 노예였다.) 신하들은 과거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하며 술탄을 말렸다. 여기에는 과거 록셀리나를 샀던 이브라힘 파샤도 있었다. 그러나 술레이만은 고집을 꺾지 않고 마침내 록셀리나를 황후로 맞이했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후렘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록셀리나는 후렘황후라 불렸다.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술레이만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여인이었지만 그 전에 다섯 아들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녀의 장남 메메드는 어린시절 죽었고 그 외에도 네 아들이 있었지만 술레이만과 그녀는 막내인 지한 길을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굳힌 후렘은 이전부터 권력을 버리고 지방으로 내려간 마하데브란과 그녀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무스타파를 노리고 환관들과 비밀정보요원들을 보내 감시하게 한다. 이후 그녀는 술레이만에게 무스타파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했다.

 

화가 난 술레이만은 무스타파를 공격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무스타파는 진짜 반란을 일으켰고 그 지방에서 존경 받았던 그를 돕기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무기를 들어 반란은 3년간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나 패배한 무스타파는 살해당했고 마하데브나는 이스탄불에 끌려가 노예가 되고만다. 이때 후렘황후를 샀었던 이브라힘도 함께 죽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하던 아들 지한 길은 존경했던 형이 어머니의 손에 죽자 죄책감을 못이기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시체를 본 후렘황후는 크게 슬퍼했다고 전한다. 이후 그녀는 또 다른 후궁의 아들인 바예지드(그는 그리스 방면 주둔 사량관으로 아버지를 도와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를 모함해 그 또한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권력욕은 그녀를 점차 병들게 만들었고 복수심도 발동해  과거 자신을 납치했던 크림칸국을 자주 침공해 그곳의 몽골인들을 정기적으로 학살하였다.

 

그러나 술레이만은 후렘황후를 사랑했다. 그녀는 아들들을 죽인 죄책감에 휩싸였어도 그 원인인 후렘황후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마저 떠나면 자신은 살아있는게 아니라는 말을 신하들에게 자주 했다는 그에게 운명의 시간은 마침내 다가오게 되었다.

 

 1561년 후렘이 병고에 시달리며 세상을 떠난 뒤 술레이만 1세는 측근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의기소침해졌다. 더군다나 1565년 몰타 섬 공격에서는 술탄의 군대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있어 아들이라고는 후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 셀림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인심 또한 무스타파를 그리워 하고 후렘을 천하의 악녀라고 수근대고 있었다. 술레이만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집단처형까지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후렘에 대한 악명만 커지고 있었다.

 

술레이만 1세는 1566년 헝가리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나섰다. 재위 46년 만의 13번째 원정이자 페르시아 원정 이후 12년 만의 친정(親征)이었다. 그러나 술탄은 통풍으로 다리를 절며 소화기능도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9월 중순 술탄의 군대는 헝가리의 시게르바트 성을 어렵게 점령했다. 그러나 술탄은 이미 9월 5일과 6일 사이 병영에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시간 전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일기를 썼다. “요새는 저렇게 불타고 있는데, 승리의 북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구나.”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 후렘옆에 묻어줄것을 유언으로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술탄이 된 셀림 2세는 유언대로 술레마니아 자미에 술탄과 황후를 놔두었다.

 

 술레이만의 후계자가 된 술탄 셀림 2세(제위:1566~1574)는 재상 메매드 파흐 쇼콜루의 도움으로

유럽 여러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었고 인도네시아 바다에 있던 포르투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무슬림국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술고래라는 별명답게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그의 죽음도 술을 마신 후 목욕을 하려다가 미끄러 진후 머리를 부딛쳐 사망하였다.

 

 술레이만 대제와 록셀라나 황후를 함께 그린 그림

 

 

 

 

 

 

추천수9
반대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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