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웃대, 피더스님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 너머에서 김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어투로 나에게 물어왔다. 물론 그건 ‘여보세요’ 가 아니였다.
“뭐예요, 방금 전화했으면서.”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대답을 꺼낼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해야하지? 무작정 전화를 걸긴했는데,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요즘 나와 얽혀있는 복잡하고 스릴감 넘치는 살인 게임의 목표물에, 네가 당첨되어 버렸다고 할까? 아니지 아니야, 이건 마치 내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잖아. 그럼? 미치광쟁이 싸이코패스가 언제 널 죽이려들지 모른다고 말해야하나? 이건 너무 직접적인데.
“오빠?”
생각이 미처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지희는 나에게 다시금 되물었다. 뭐가 이렇게 급한거람. 아니, 오히려 지금 급한건 바로 난데.
“아, 그게… 지희야 오늘도 편의점에서 일하지?”
“네? 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물어보시네요. 지금도 편의점이예요.”
이런 바보 자식. ‘일하지?’ 가 아니라, ‘일 해?’ 라고 물어보는게 더 자연스러웠을텐데. 소설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어휘구사력이라니.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그래? 그럼 몇 시쯤에 끝나지?”
“8시… 갑자기 이건 왜 물어보시는거예요?”
8시라, 이제 곧 겨울로 접어드는 지금 시기로썬 충분히 어두워질만한 시간이다. 이대로 김지희와 약속을 잡아야하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그래. 예를들면 백화점이나, 놀이동산. 혹은 극장. 아니, 극장은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왔을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의 배에 칼이 꽃혀있었다는 설정은 영화나 드라마, 미스터리 추리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였다.
“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열심히 일하라는 차원에서 물어봤어.”
역시 나란놈의 머리통은 내 생각보다 더욱 더 멍청한 것 같았다. 열심히 일하라는 차원이라니. 지금 누구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생각나는 변명이라곤 이런게 전부였다.
“네? 오빠 오늘 진짜 이상해. 어디 아파요?”
“아니, 어우 야.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다 안 깬거 같다. 미안, 내가 지금 정신이 조금 몽롱해서. 그래, 그럼 알았어. 이만 끊는다.”
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더 말이 많아지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싸이코패스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는 존재. 게다가 지희는 여자였다. 반드시 나와 떨어지게 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예를들면 화장실이라던지.
어느 쪽으로 보나 밖보다는 안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컴퓨터 책상 위에 박아놓은 벽시계를 살폈다. 하얀 테두리에 하늘색으로 도배되어있는 아기자기한 시계였다. 분명히 무슨 사은품 같은 걸로 받았던 것 같은데.
현재 시각은 오후 두 시. 어라, 생각해보면 나는 잠에서 깬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일어나서 지희와 두 번 통화를 하고, 미치광이와 한 번 통화를 했다. 세 통 다 통화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였는데. 어떻게 두 시일 수가 있는거지.
사실상 평소 생활 패턴을 중요시하는 성격은 아니였다. 하지만 언제나 일어나는 시간은 한결 같았다. 아침 8시. 물론 십 여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었지만 대략적인 시각은 언제나 그 쯤이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오후 두 시에 기상이라니. 어제 일이 정말 어지간히도 피곤했었나보다.
앞으로 여섯 시간 후. 김지희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편의점으로 향하자. 그리고 집 까지 바래다주자. 아무리 살인마가 제정신이 아니라고해도 감옥에 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있지 않은 이상, 무턱대고 편의점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가할 리가 없다.
‘저 감옥가는거 별로 안좋아해요.’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다. 앞으로 여섯 시간 동안, 그녀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안전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설마 그 사이에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겠지? 남자 아르바이트 생과는 달리 그녀는 담배도 피지 않는다. 담배를 피기위해 편의점 밖에서 어슬렁 거리는 일 또한 없었다.
쓰레기 봉투를 버리기 위해? 아니, 생각해보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든 담배를 피러 나오든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편의점의 CCTV 는 그 편의점 주변에도 일부 설치되어 있었고, 입구와, 그 편의점에서 쓰레기를 처리하는 곳에는 분명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녀는 안전했다. 적어도 8시 까지는.
자, 그럼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할까. 그녀를 안전하게 집 까지 에스코트 해주기엔 여섯 시간이 남았다. 그럼 그 동안 나는?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서 지금부터라도 근육을 키워놓을까? 아니, 지금부터 시작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나는 소설가였고, 소설가는 글을 써야했다. 나는 냉장고의 문을 열어 사이다 병을 꺼내었다. 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 째로 들어 입 안에 들이붓자, 달달한 레몬향이 입안에서 톡톡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이다도 썩 괜찮네.’
그 다음에 나는 곧바로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는 끄지 않았었기에 모니터만 작동시키면 됐다.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불빛이 들어왔으며, 이윽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내가 그 도화지에 글자를 적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려던 그 순간이였다.
- 퉁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왼 쪽으로 돌려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현관문의 정 가운데에는 알 수없는 무늬가 그려져있었는데. 만든 이는 분명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려고했던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촌스럽기만 했었다.
무늬의 윗 부분과 가운데 부분과 맨 아랫 부분에는 불투명 유리가 장식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는 인터폰이 없는지라, 외부에서 사람이 오면 나는 이 유리로 밖을 내다보곤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조심조심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머릿속에서 ‘설마 그 여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곧바로 부정했다. 그 여자가 내 주소를 알고있는 것도 확실치 않고, 만약 알고있다고 해도 지금은 날 만나러 올 생각이 없을거라는 건 누가봐도 알 수 있었다. ‘이따 전화받아’ 라고 내뱉은 그녀의 말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누가?
불투명 유리라서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체격으로 봤을 때, 상대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것도 두 명. 두 명?
“누구세요?”
문을 열지 않은 채로, 나는 의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를 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밖에서는 굵직한 남자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예리한 느낌의 목소리.
“이태호씨 되십니까? 경찰입니다.”
경찰이라고? 내가 신고를 했던가? 무의식 중에, 신고를 한 건가? 아니지, 아니야. 그런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경찰이 찾아오는건 당연한 일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최초 목격자가 아닌가. 내 통화 상대가 죽인 바로 그 시체의.
일순간 나는 당황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아니,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은 이미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시체의 최초 목격자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뻔 했었다. 어젯밤 일의 임팩트가 너무 컸었기 때문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버튼을 누르자 도어락의 잠금이 풀리는 기계음이 울렸고,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문 밖에 서있던 경찰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경찰은 먼저 내 눈 앞에 자신의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자신들에 대한 경계심을 먼저 없애려는 듯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가장 눈에 띄는 한 단어를 나는 저도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읽었다. ‘강현우’, ‘박태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두 명의 형사 중, 더 나이가 많아보이는 남자가 내게 물어왔다. 방금 신분증 본 참이라 이름은 알 수 있었다. 강현우. 나는 아주 잠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두 사람은 ‘실례’ 라는 인사를 내게 건네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단어라는 건 나도 알고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세 사람이 앉을 의자가 우리 집에는 없었다. 있는거라곤 글을 쓸때 사용하는 컴퓨터 용 의자 하나. 두 사람 중 젊은 쪽, 그러니까 나와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박태현이란 남자는 의자가 없다는 사실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강현우 형사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할 얘기가 있다며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멈춰세우고, 나에게 바닥에 앉기를 권하는 터라, 내가 더 당황할 따름이였다. “커피 드릴까요?” 그렇게 말한 나는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식탁을 가져와 나와 형사 사이에 미묘한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쓰지않던 커피포트에 물을 따랐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일이였다. 집에 방문한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것. 나는 지금 내가 마치 미스터리 소설 속에 들어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소설 속에서도 경찰과 증인이 만나는 장면에선 언제나 이런 형식적인 단어들이 가득 등장한다.
커피 두 잔을 그들의 앞에 올려두곤, 나는 커피를 입에 가져다대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기곤, 커피잔을 들지 않는 두 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한테는 무슨 일로…? 뭐,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기는 하지만요.”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박태현은 서둘러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기 시작했다. 강현우라는 인물은 그가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게 경찰들간의 계급이라는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강현우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폐를 끼친 건 아닌지.”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의 어투에서 진심이 전해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질문이라는 걸까.
“아뇨, 괜찮습니다.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긴 했는데. 막상 잘 써지지가 않아서요.”
사실 글을 쓸 시간도 없었지만, 아직도 내 방 안에서 켜져있는 컴퓨터의 화면에는 깔끔하게 비어있는 A4용지 크기의 원고지가 자리잡고 있을 뿐이였다.
“아, 직업이 소설가라고 하셨지요? 사실은 저도 선생님의 책을 읽어봤습니다. ‘백견’, 형사와 범인의 두뇌싸움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더군요.”
이건 진심? 아니면 역시 의무적?
“이거 참, 현직 형사님께서 칭찬을 해주시니, 기쁜데요.”
그렇게 대답한 나는 커피 잔을 다시한번 들어올렸다. 시선을 흘깃 돌려 박태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런 영양가없는 대화 속에서도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있었다. 뭐든지 적는게 그의 일인건가. 그거 참 힘들어보이는 일이군.
“사실 제가 형사가 되려고 마음 먹었던 것도 어렸을 적에 읽었던 형사 소설의 영향이 큽니다. 어찌나 재밌어보이던지. 그런데 막상 형사가 되고나니 소설을 읽는 것 만큼 재밌고, 스릴넘치지만은 않더군요. 가끔은 저를 이 길로 들어서게 만든 가가 형사 (주: 일본 미스터리 추리 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 시리즈의 등장인물) 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하하.”
“아, 그 형사라면 알고있습니다. 제가 그 작가의 팬이거든요.”
여기까지 대화를 마친 후, 형사는 처음으로 커피 잔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부수적인. 아니, 형식적인 대화는 끝난걸까.
그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알고있었다. 나는 어제 쓰레기 봉투 더미 아래에서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최초 목격자라는 명분으로 경찰서까지 동행했지만, 경찰에선 아직도 궁금한게 더 남아있는 모양이다. 물론, 경찰은 지금 모르고있는게 너무 많다. 내가 단순히 최초 목격자가 아니라는 점이 바로 그랬다. 나는 목격자가 아니였다. 그보다 더 깊은, 이 사건의 뿌리에 연관되어 있는 중요인물.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 길이 없지. 커피 잔을 기울여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나는 잔으로 내 얼굴을 어느 정도 가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분명 내 머리는 좋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만큼은 올바른 답을 권해주길 바랬다.
모두 다 털어놓을까? 엊그제 걸려온 그 전화에 관해서도, 그 여자에 관해서도, 내가 어젯밤에 했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전부, 남김없이? 그렇다면 여섯 시간 후에 있을 김지희의 신변 또한 경찰 쪽에 부탁하면 된다.
“아까 말하셨다시피,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이태호씨가 발견하신 시체에 관한 질문입니다.”
복잡하게 흔들리던 생각을 뚫고, 강현우 형사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나는 일순간 움찔하곤, 천천히 들고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제 경찰서에서도 설명했던 것 같은데요.”
그러자 형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 미소가 대채 무엇을 뜻 하고있는지 나로써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 나는 이 사람들을 완전히 믿고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내가 경찰을 혐오하는건 아니였다. 경찰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다거나, 경찰에 의해 해를 입은 적이 있는 것도 아니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찰과 연관되어 본 적은 없었으며, 내가 경찰의 시스템에 관해 아주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건 전부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을때 주워들은 것 뿐이였다.
하지만 왜 일까, 나는 경찰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로써도 정확한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부패한 경찰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물론, 모든 경찰이 그런 것은 아니고. 단편적인 이미지로 전체를 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 대채 이유가 뭐지? 경찰이였던 내 친구가 사건에 휘말려 죽은 것도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래, 강현우 형사의 말 처럼 현실의 경찰이란 영화나 소설 같이 스릴넘치고 재미있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정도로 결론을 내려두자. 요컨대 나는 경찰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경찰이란 위험한 직업을 좋아하지 않는 것 뿐이다.
“구체적인 설명이라는 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어제 말씀드린게 정말 전부입니다. 저는 멍청하게 콜라를 떨어뜨렸고, 아주 우연히 콜라가 그 쓰레기봉투 더미로 굴러들어갔습니다. 전 단지 그 콜라를 꺼내기위해 봉투 걷어내다 시체를 발견한 것 뿐이구요.”
맞는 말이였다. 내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지만, 어제 내가 그 시체를 발견한건 정말 우연일 수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을 겹친 운명. 그 운명을 만들어낸건, 내가 뜯어진 봉투 손잡이의 임시적인 해결 방안이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재대로 듣지 않았다는 점이겠지.
“일반적으로, 굴러간 콜라를 집는데 쓰레기더미를 해쳐야할 상황은 필요치 않을거라고 생각됩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입니다. 애시당초 콜라가 떨어진 이유가, 봉투의 손잡이가 끊어졌기 때문이거든요. 굴러간 콜라를 집어들고 전 콜라를 집은 바로 그 장소, 그러니까 쓰레기봉투 앞에 서서 다시 콜라를 봉투에 넣었습니다. 한 쪽 손잡이라도 무게 중심을 잘 맞추면 들고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무게 중심이 잘 맞지않아 콜라를 다시 흘려버렸고, 봉투를 들고있었기 때문에 콜라가 쓰레기 더미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게 말하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강현우 형사의 눈을 일순간 마주쳤다. 마치 갑작스런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나와 그는 서로 먼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강현우 형사가 먼저 시선을 돌렸고, 그제서야 나는 손에 쥐고있던 커피 잔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콜라는 얼마나, 그러니까 몇 병을 구매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뜬끔없는 질문, 아니 이런 질문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형사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의무라도 있는 듯 싶었다. 그게 아니면, 중요한 질문을 내던질 틈을 만들고 있다거나.
“기억할 것도 없습니다. 두 병이였어요. 1.5L 페트병으로 두 개.”
“보통 혼자 사는 사람들이 콜라를 두 병 씩이나 사가지는 않을텐데. 그렇게 마시는 이유라도 있으신겁니까?”
“이유라… 굳이 이유라고 한다면 살이 찌기 위해서라고 대답할까요.”
“살이 찌기 위해서 말입니까?”
형사가 내게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하지만 그의 어투완 달리 표정은 너무나도 일관적이였다. 일관적인 무표정.
“네, 전 어렸을때부터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였거든요. 너무 마른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살을 찌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살을 빼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분명 좋은 말을 듣진 않을겁니다. ‘살이 잘 찌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봐라.’ 라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죠.”
농담인가? 가벼운 조크? 아니, 농담을 건네는 거라면 자신도 약간 웃음을 지어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던 말든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어께를 가볍게 들썩이며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체질이란건 서로 다 다른 거니까요. 형사님은 어느 쪽 체질이신지 궁금해지네요.”
“아, 전 뭐 평범합니다. 많이 먹으면 찌고, 적게 먹으면 빠지죠.”
당연한 소릴.
“그보다, 책상 위에는 콜라가 아니라 사이다가 놓여져 있는데. 어제 사셨던 콜라는 아직 냉장고에 들어있는겁니까?”
책상? 젠장, 내 뒤에는 내 방 문이 그대로 열려있는 채 였다.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방 안의 모습을 살핀건가? 아니, 대채 언제? 나는 지금까지 그와 대화하면서 그의 시선이 내 뒷편으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절 형사 일을 하면서 생긴 그의 기술인걸까. 이럴줄 알았으면 방 문을 닫아둘 걸 그랬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방 안의 모습을 보인다는건 생각보다 썩 유쾌한 일이 아니였다.
“콜라는 한 동안 마시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니, 뭐 마시지 못하는 거겠죠. 콜라를 바라보기만해도 그 시체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악몽을 꿀 정도니까 말이죠.”
물론 악몽은 시체가 아니라, 그 싸이코패스에 연관된 일이지만.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현우 형사는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 옆에 앉아있는 박태현 형사는 여전히 수첩에 무언가를 빼곡히 적을 뿐이였다. 그가 사실은 벙어리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런 의심을 가득 품은 채, 박태현 형사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던 그 순간, 강현우 형사가 내게 물어왔다.
“그런 것 치곤 꽤나 침착하셨던 것 같으신데요.”
“네?”
그 질문의 의미를 나는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이 형사는 어제, 시체를 발견한 그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쓰레기 더미를 해치고 시체를 발견하셨을 때 말입니다. 그 당시 다른 목격자들에게 질문해봐도, 선생님이 아주 침착하셨다고 대답했거든요. 사람의 다리가 뻔히 보이는데,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쓰레기 봉투를 하나하나 치워가셨다고.”
젠장할, 꼭 비명을 질러야만 놀라는 것이 되는건가?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었는데. 물론,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체를 발견했음이 아니라, 시체의 정체가 말이다.
“저도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시체를 본 건 처음이였으니까요. 그래서… 소설가로써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전 비명 대신 욕으로써 심정을 표현했었지요. 조용하고 강력하게.”
“아,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살면서 욕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설가라고 하셔도 사람이니까요.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만나왔던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형사는 잔을 들어, 커피를 전부 마시곤 말했고, 나는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무표정만을 유지하고있던 그의 표정에 변화가 일자, 나 또한 침을 꿀꺽 삼킬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백견’ 을 집필하셨을 때, 소설 속 범인이 저지르는 살인의 구상은 어떻게 떠올리셨는지 대답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백견?’
이 형사가 지금 그걸 물어오는 이유를 나로써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분명 강하기 들어왔다. 하지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 또렷히 알 수는 없었다. 대채 무엇이? 무엇이 이리도 걸리는 걸까. 백견과 이 시체에 대채 어떠한 연관이 있는거지?
“백견의 구상은 대채….”
“특히, 작 중에서 등장하는 세번 째 살인의 구상에 대해서 말입니다.”
세번 째. 문득 머릿속에 단어가 울려퍼졌다. 백견의 세번 째 살인이 대채 무엇이었을까. 내가 쓴 소설의 내용이 기억 나지 않는다니. 이건 말도 안됀다. 아니,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였다. 오히려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마치 머리가 일부러 방해하고 있는 듯한 기억.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시간에 흘려보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내 머리가 일부러 이 기억을 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형사의 말이 총알이 되어, 기억을 감싸고 있던 막을 꿰뚫었다. 머릿속에, 소설 속 글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체….”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왜 그걸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지? 우연? 아니, 우연이 아니다. 우연에, 우연에, 우연을 거친 운명. 그래, 이건 운명이다. 나는 대채 왜 이 사실을 잊고있었을까.
“네, 선생님께서 쓰신 소설에 등장하는 살해방법과 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