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웃대, 피더스님
“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말을 내뱉고, 나는 다시한번 내 자신을 책망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건 자백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네가 말하는 소설가가 바로 나야.’ 라고.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박한, 조금은 미친것처럼 들리는 웃음. 아, 맞다. 이 여자는 원래부터 미친년이였지. 그래, 이 정도 웃음은 예상 범위 안이다.
“아저씨, 소설가 치고는 말을 너무 못하는거 아니예요? 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방금전의 내 목소리를 흉내내듯 그녀는 목소리를 내리깔곤 그렇게 말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웃음도 역시 빼놓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먹을 쥐고있을 뿐이였다. 목에 올라온 핏줄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
“연기하지마 이 미친년아. 너 나 알고있었잖아. 왜 이제와서 마치 지금 알았다는 듯이 연기하고있어? 그래, 나 네 말대로 소설가다. 그리고 또 네 말대로 백견은 내가 쓴 소설이야. 별로 놀랍지도 않지? 원래부터 알고있었으니까. 나한테 처음으로 전화걸었던 그때부터.”
“아저씨, 아저씨가 전에 나한테 그랬죠? 네가 탐정이냐고. 나 탐정 아니예요. 그런데 아저씨도 탐정 아니잖아.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저씨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건 나만 알아요. 아저씨는 그냥 계속 생각하고 의심만하면 되요. 절대 확신하지 말고. 알았어요?”
“신발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욕설이 새어나갔다. 확신하지 말라고? 개 같은 소리. 이 여자는 이미 내가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할만한 증거를 계속해서 뿌려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면 좋겠다는 듯이.
“정 사실이 알고싶으면, 내 전화를 받지 말아보던지. 나 이제 곧 아저씨한테 또 들려줄거예요. 사람 죽이는 소리. 그거 받지 말아봐요. 그럼 알게되겠죠. 내가 아저씨를 아는지 모르는지. 만약 내가 모르면, 아저씨는 그대로 이 게임에서 해방되는거예요. 근데, 만약 내가 아저씨를 알고있으면 아저씨는 죽는거야. 내가 찾아갈거니까, 찾아가서 죽일거니까.”
불쾌하다. 불쾌하고, 짜증난다. 이 여자는 정말 미치도록 짜증난다. 목가에 선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 이 여자는 날 잘 알고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절대 전화를 안받을리 없다는 것 조차도. 그래, 이게 바로 그 증거다. 자신이 나를 알고있다고, 나에 대해서 잘 알고있다는 걸 지금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는게 틀림없다.
“근데, 내가 지금까지 대화한걸로 추측해보는건데요.”
말을 끊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것 같다. 공기를 입 속으로 집어넣는 그 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내 귓가에까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전화 받을거거든.”
거봐, 이 미친년.
“아저씨, 그럼 금방 다시 전화할게요. 아까 말한 편의점, 지금 쓰레기통 거의 꽉 찼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언니가 쓰레기 버리러 나올거에요.”
한 마디 사이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였다. 주제가 다시 살인 게임으로 변함과 동시에,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다고? CCTV, CCTV가 있다. 있을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에는.
설마, 김지희가 예의 그 골목길까지 들어가서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없겠지. 편의점 입구 오른쪽 구석에는 편의점에서 나온 쓰레기를 모아두었다가 한번에 버리는 장소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CCTV가 있다.
이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는건가? 아니, 모를리가. 똑똑한데다가 이상하기까지 한 여자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옥에 가기 싫다던 여자가 생각을 고쳐먹은걸까? 그럴 리는 없고.
그리고, 그 순간. 내 독백같은 생각에 대답하듯,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CCTV, 고장났거든요.”
고장? 고장이라고? CCTV가 고장?
예상 외. 전혀 생각치 못한 변수. 아예 가능성이 없던 일은 아니였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을거라고도 생각치 못했다. CCTV의 고장? 말도 안돼.
“그럼 아저씨, 금방 다시 전화할게요.”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내 사고회로 마저 끊어버린 듯, 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꺼진 전화기를 들고있을 뿐이였다. 뇌가 빠르게 회전했고, 수많은 생각들을 내 눈 앞으로 끄집어냈다. 아니, 끄집어내려 했다.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나는 벗어두었던 점퍼를 걸치고 문을 거칠게 열었다.
듣기싫은 쇳소리가 귓가를 자극했지만, 표정을 찡그릴 시간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내 몸은 행동에 옮겼다. 계단을 두어칸 씩 뛰어내려갔고, 15초도 채 되지 않아 나는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그 곳의 CCTV가 고장나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있던거지? 외견으로 봤을때, 고장이란건 알아볼 수 있을만큼 손상되어있던가? 아니, 분명 어제 콜라를, 아니 사이다를 사러 가서 봤을때만해도 멀쩡했다. 외견상으로는.
그렇다면? 물건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카운터 옆에 있는 CCTV를… 아니, 편의점의 CCTV는 보통 일반인들이 볼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아르바이트 생 역시 CCTV를 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휴대폰의 어플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점장 이외의 인물이 CCTV를 확인하는 건 쉽지 않다.
혹시, 그 여자가 스스로 고장을 낸 건가?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떻게’ 라는 의문이 따라온다. 다소 거칠게, 둔기를 사용하여 CCTV를 때려부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여자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방법은 경찰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 소란스러운 이 동네에서.
“이거 진짜 뭐하는 년이야?”
아무튼 서둘러야 했다. 김지희가 위험하다. 어디까지나 살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나 자신이 위험해지기에 행동하는 것 뿐이였다.
지금 김지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됀다. 그 문장과 함께, 나를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현우 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경찰은 지금 나를 의심하고있다. 최초 목격자와, 똑같은 살해방법을 등장시킨 ‘백견’의 저자니까.
그렇다면 내 주변 인물들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부모님? 부모님은 모르겠지만 이 주변에서 그나마 나와 가까운 인물은 바로 김지희겠지. 그녀 외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나누지 않았으니까.
만약 여기서 김지희가 죽어버린다면, 그땐 정말 내가 위험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사건의 진상을 경찰에게 모두 설명한다해도, 내 말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최후의 발악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나를 불쌍한 눈초리로 바라보곘지.
‘절대 그래선 안됀다.’
표정을 굳힌 나는, 이 정도로 빨리 달려본 적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재빨리 두 발을 움직였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만 늦는다면, 김지희가 살인마의 손에 죽어버린다면, 얼굴을 때리는 이 바람에서 역겨운 비 비린내가 진동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기분이 드니까.
*
중학생이였을까, 아니. 고등학교 때 였음이 분명하다. 소설가를 꿈꾸기 전, 내 꿈은 체육관을 차리는 것이였다. ‘특공무술’. 남자가 너무 허약해서도 안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못이겨 억지로 시작했던 운동이지만. 의외로, 운동은 나에게 맞았다.
처음엔 그저 두려웠다. 남을 때리고, 남에게 맞기 위하여 운동을 배운다는 것이.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생각은 바뀌였다. 만화나, 청소년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남에게 맞지말고 남을 때리지말자’ 정도의 오글거리는 대사를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였다.
만화 주인공도 아니였을 뿐더러,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운동을 시작하게 된 청소년 드라마의 주연도 아니였다. 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이였다. ‘나만 지키자’ 그때의 나로썬 정말 최고의 대답이 아니였나 싶을 정도로 명쾌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의외로 내 몸에 맞던 이 무술을 계속하는 이유로써는 충분했다. 나이가 들면, 내 체육관을 차려서 제자를 받자. 돈을 받고, 무술을 가르치자. 그렇게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도중에 그 꿈을 접고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썬 정말 충분히 소질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다시금 머릿속에 되새기며, 나는 저멀리 보이는 편의점의 간판을 읽어내려갔다. 물론 내 신조는 ‘나만 지키자’ 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 뿐만이 아니라, 김지희의 안전까지 책임져야했다. 무엇 때문에? 역시 나 때문에.
김지희를 지키지 못하면 내 신변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김지희를 지키는 일 역시, ‘나만 지키자’ 라는 내 신조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였다.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주먹을 불끈 쥐고, 나는 서둘러 편의점을 향해 뛰어갔다.
여기서 끝내자.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살인마를 제압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하면 사건은 해결된다. 짧고 강렬했던 지난 일이 모두 마무리되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살인마를 제압했을때의 일이다. 이미 머릿속에서 다 잊어버린 무술을 어느 정도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 6년, 아니 7년? 무술에 대한 지식이 망각 곡선을 타는 시간으로썬 충분했다.
“신발, 그럼 어때?”
난 남자다. 상대는 여자다. 이기지 못할리가 없다. 상대의 무술이 프로급이라던가, 혹은 세계 여자 완력 대회 같은 곳에서 당당히 순위권을 차지했다던가 그런게 아니라면. 이런 젠장할, 나는 지금 이 상황에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거람?
발을 뗄 떼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은 아직 어둡지 않았지만, 편의점의 간판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이 너무도 눈부시게 내 눈을 비췄다. 편의점에 다다른 나는, 제일 먼저 카운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었다. 두 눈알을 이동시키는 그 순간.
일 순위로 확인하려던건 김지희였다. 하지만 내 눈은 전혀 다른 걸 비추고 말았다. 편의점의 오른쪽 쯔음에 서있는 검은 후드 집업. 그와 대조되는 하얀색 마스크. 분위기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 년이다. 바로 저 여자다.
“아오, 진짜 저 강아지.”
그 쪽에서 나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소리로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어쩌면 지금 온 몸에 감돌고있는 긴장감을 이런 방식으로 조금 떨쳐내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 다음, 나는 편의점의 내부로 시선을 옮겼다. 내 눈동자가 돌아가는 그 순간,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편의점의 문을 열고 나왔다. 손님인가? 손님이겠지. 의심이 너무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김지희는 카운터에 없었다. 편의점 내부의 쓰레기 통 앞. 그녀는 방금 나갔던 손님이 먹은거라고 예상되는 컵라면 껍데기를 쓰레기 통에 넣고, 봉투를 꺼냈다. 지금? 지금 버리러 가는건가? 문 앞에 널 죽이려고 기다리는 살인마가 있는데?
나는 서둘러 전화를 꺼냈다. 이 곳에 달려오면서 김지희에게 전화를 걸 걸 그랬다. 너무 당황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통화 기록을 뒤져 김지희의 전화 번호를 찾았다.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김지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화음이 두어번 쯤 들려왔고, 그제서야 나는 카운터 위에 올려져있는 김지희의 휴대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요즘 여자가 휴대폰을 몸에서 떼어놓던가? 늦었다. 그녀는 이미 양 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서 쓰레기 더미를 향해 오른 쪽 골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타이밍을 노리던 검은 후드가 골목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허겁지겁 골목길로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정말 갑작스럽게 칼로 찌를까? 등 뒤에서, 푹 하고. 설마, 내가 들어갔을때 김지희는 이미 죽어있는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설마 신발.
그 순간이였다.
“꺄아아아아악!”
불안한 생각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에 찬 물을 붓는건, 김지희의 비명이였다. 찢어질 듯한, 높고 앙칼진 비명. 찔린건가? 이런 신발, 제발.
내가 편의점에 앞 편에서 골목길로 뛰어온 시간은 어느 정도였을까. 5초? 혹은 7초? 나는 재빨리 골목길로 들어섰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상황을 확인하는데에 사용한 시간은 고작 0.5초. 나는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며 김지희를 바라보았다.
“오…오빠….”
찔리지 않았다. 멀쩡했다. 양 손에 들고있던 쓰레기 봉투는 그녀의 양 옆에 가지런히 쓰러져있었고, 그녀 또한 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상처는 없었고, 피 또한 없었다. 울먹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직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모든게 좋았다. 이 정도면 괜찮은 상황이였다.
검은 후드와 눈이 마주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김지희는 골목의 가장 안 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대 여섯 걸음 뒤에, 그 녀석이 서있었다. 검은 후드에 하얀 마스크. 오른손에는 날이 새파랗게 선 식당용 회칼을 든 채. 그리고 그 보다 또 대 여섯 걸음 뒤에는 내가 서있었다. 너무 힘을 쥐어 노랗게 변해버린 주먹을 쥔 채로.
눈이 마주쳤다. 후드가 뒤를 돌아봤고,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있었더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내 눈동자와 이 녀석의 눈동자는 일순간 교차했다. 신발, 아주 성기 같은 기분.
가쁘게 뛰던 심장이 일순간 정지하는 기분이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심장에 푹, 박힌 듯한 느낌. 하지만 ‘헉’ 하고 놀라는 소리는 마음 속으로 가둬두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다. 짧은 숨을 한번 가다듬고, 놀란 눈을 짓고 있는 후드를 바라보며 먼저 입을 뗀다. 언제나 나는 이 여자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렇기에 먼저 입을 떼는 게 지금으로썬 나에게 유리하다.
“얼굴 보는건 처음이네? 미친년아.”
후드의 동공이 더욱 커졌다. 나와 그 녀석은 일순간 침묵을 유지했다. 김지희의 울먹거림 소리만 제외하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이 여자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오빠… 뭐예요, 지금 뭔데. 어? 뭔데요!”
침묵을 먼저 깬 건 김지희였다.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물음을 무시 한 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유리한건가? 물론, 나는 무술을 배운 경험도 있고, 게다가 남자다. 하지만 그 쪽은? 저 여자의 오른 손에 들려있는 회칼은 아무리 생각해도 6,7년전에 무술을 배웠던 내가 어떻게 해볼만한 게 아니다.
죽을 수도 있다. 김지희가 아니라, 내가. 저 칼에 찔려서.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금 심장이 요동쳤다. 죽는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칼을 들고있을거라는 사실도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진짜 칼을 보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네가 전에 말했지. 난 남자고 넌 여자라서, 거꾸로 네가 험한 꼴 볼 수도 있을거라고. 근데, 그게 지금인 것 같다, 이 년아.”
허세. 허풍. 남자고 여자고 개뿔, 칼에 찔리면 뒤지는 건 똑같다.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죽는다. 신발. 상황 참 성기같다. 자신있게 뛰어들어와서 이게 무슨 꼴이람.
“오빠!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니깐요?! 예? 오빠? 이태호!”
김지희가 소리쳤다. 그럴만도 하겠지, 방금전까지 자신을 찔러죽이려고 했던 상대와 내가 대화하고 있으니까. 불안하고, 무서워서 죽을 지경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미친 살인마와 한 시라도 빨리 끝을 내야만했다.
“내가….”
말을 내뱉는 내 목소리가 떨려왔다. 긴장, 공포. 그리고 흥분.
“왜 여기에 나왔는 줄 알아? 네가 날 알고있다고 확신해서 그래, 이 개 같은 년아. 확신하지 말라고? 그래. 어디 한번 보자. 네가 날 아는지. 그리고 신발!”
침을 삼킨 나는,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내가 널 알고있는지.”
내가 아는 사람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해왔다. 전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조사하고, 나에게 이런 성기 같은 게임을 강제 참가 시킬 이유는 없었기에. 틀림없이, 어디선가는 나와 연관되는 사람일 것이다. 틀림없이.
내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여자의 하얀 마스크를 향해. 깊게 내려쓴 후드 모자를 들어올리고, 저 마스크를 벗기면 얼굴이 들어난다. 누구야, 대채 누구냐고 신발.
일순간 손을 허공에 멈춘 나는, 이미 커질대로 커진 살인마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덤덤한 척 하며, 아무렇지도, 긴장되지도 않는 척하며.
“신발,정말,정말 마지막으로 묻는다….”
생각해보면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건넬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마스크를 들어올리고, 얼굴을 확인해보면 될 것이였다. 하지만 왜 일까.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마스크를 들어올리기가, 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아는 사람의 얼굴이 나올까봐?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나올까와? 아니, 그런 것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나한테 온갖 감정을 가져다주었던 이 여자의 얼굴, 그 얼굴 자체를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게 누가 됐던. 그리고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 나 알지.”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일촉즉발의 그 순간, 나는 상대에게 정체를 묻는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던지면서도 역시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