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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관한 진실


 
 
 네이트 뉴스를 보다가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비난적 댓글을 많이 보고 너무나 놀라 이렇게 글을 써보려 합니다.(학생운동 중심으로 써내려가겠습니다.)
 
 
1979년 당시 군부내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온건파에는 군의 공식적인 주류의 입장에서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 군부의 핵심 간부들이 있었고 강경파에는 '정규육사출신'의 소장파 고급 장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백운택, 전두환 등이 있었지요.
이때 강경파는 자신들의 제거가능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며 결국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극우 강경파 세력은 12월 12일에 기습적인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며 이는 성공하게 됩니다.
 
 
1212로 실권을 잡은 신군부세력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갖가지 특혜를 누리며 성장해온 정치군인들로서,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는 유신체제의 유지를 지지했던 극우강경파였습니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과 정치정세의 급변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을 뿐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에비해 70년대 내내 가장 활기차게 반정부 정치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던 학생운동은 보다 신속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서울대에서는 '조기개헌. 조기총선을 단행하라' 라는 유인물이 공개적으로 낭독, 배포되었고 조기개헌.조기총선을 요구하는 학내 시위가 있었습니다.
 
 70년대의 학생운동은 학원 민주화운동, 그리고 학내 민주화에 먼저 착수하게 됩니다. 이와더불어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내용은 생략할게요)
 
1980년 4월 30일 군부는 계엄사 전군 지회관회의를 열어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신군부세력이 무언가 야심을 가지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징후는 4월말 이후 점차 분명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전두환은 "현시점에 있어서 법이나 포고령을 위반했을 시에는 정치인이든 정치인이 아닌든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다스리게 되어있다. 포고령에 위반되는 자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관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0년 5월 정부는 계속되는 학생들의 민주화요구에 학원문제에 대한 일정한 양보를 내용으로 하는 수습책을 내놓는등 일련의 개량적 시책을 발효했습니다.
 
이후 학생들도 자신들의 투쟁의 초점을 학원 민주화, 지율화 투쟁에서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 투쟁으로 옮겨갔습니다.
 
서울대에서 시작된 이러한 방향선회는 다른 대학으로도 확산되었습니다. 5월 2~5일에 일제히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교내에서 계엄해제와 민주화일정의 촉진을 요구하는 시위, 강연등의 행사를 열었습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랐습니다. 외국어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중앙대 등에서 교수들이 각각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계엄해제를 촉구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계엄사의 통제하에 있던 언론들도 정치일정의 구체적 공표와 계엄해제 일정을 밝힐것을 촉구했습니다.
 
 
중간에 교내시위를 전면 금지하기로 했지만 13일 새벽에 걸친 격론끝에 가두로 총 진출하기로 전환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학생대중의 열기가 이미 학생운동지도부의 통제력을 넘어서서 끓어넘치고 있기 때문이며 13일 밤 연대생들의 야간시위는 바로 그것을 실증해줌.)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있었지만 아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할수 없었고 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집단이 없어 안전귀환을 보장받는선에서 타협을 보고 모두 각 학교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후에 열린 제 5차 회의의에서는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대국민홍보전을 계속한다는 방침이 나왔습니다.
 
 
 
시위가 가열된 5월12일 정상천 서울시장은 이날부터 비상근무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으며,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전국의 시도 공무원과 경찰공무원들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군의 압력을 받아들인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비상계엄안을 의결하였고,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16일 이전의 광주는 횃불시위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16일의 횃불시위를 마치면서 정부측에 시간을 주자는 의견도 있었고, 학생들모두가 지쳐있으니 시간을 갖고 다른대학과 보조를 맞추자는 의견이 많아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광주시내의 17일 분위기는 매우 한산했습니다. 이때 서울에서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가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화가 왔고 전남대학교의 총학생회지도부는 사태파악의 임무르 ㄹ맡은 일부만을 남겨놓고 긴급 대패합니다.  그리고 그날밤 자정을 전후해서 광주의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청년운동, 학생운동지도자 상당수가 검거당했습니다.
 
 
 
그리하여 18일 아침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하여 제즈를 당하게 된 학생들 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왔던 학생들에 의해 시위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일반 시민들은 군과 경찰의 폭력에 선뜻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처연한 투쟁과 그에 대한 공수부대의 만행은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던 살상행위는 시민들의 반응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이리하여 19일 오전부터 시위대의 주력이 학생에서 일반 시민대중으로 옮겨지고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투쟁이 질적인 비약을 보였습니다. 이날 오후부터 싸움은 민중들에 공세국면으로 바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518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혹은 아는데도 불구하고 폭동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많은 비난을 쏟아 붇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당시 외신들의 보도는 대부분 정부가 민주화를 막는다는 보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언론은 그때당시 계엄군들의 사상자 수와 광주 시민들의 사상자 수를 잘못 보도하는것은 물론이며 내용도 오보하였습니다.
 
 
 
1980년은 그리 먼시간이 아닙니다. 아직 광주에는 살아계신 생생한 증인들이 많습니다.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엔 희생자나 피해자가 너무도 많습니다.
 
모두가 폭동이라고 해도 저는 언제나 518에 대해 공부하며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댓글을 읽어나가던 중에 무력을 쓴 운동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댓글을 제일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무력을 썼다는 이유로 폭동이 된다면 프랑스혁명이나 영국의 시민혁명도 모두다 혁명이 아니라 폭동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닐까요?
 
 
518 당시의 무력은 공수부대에 의해 먼저 행해졌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시위대의 폭력도 어쩔수 없는것이였습니다. 무기를 들었지만 시위대의 무기는 고작해야 카빈소총 정도였으며 이때 계엄군들은 공수특전단으로 정규전과 동일한 수준이였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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