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이명박 대통령이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곤욕을 치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은 유체이탈 수준을 넘어 과연 스스로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국민 상당수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직의 최고수장임에도 자신이 거느리는 공무원 조직을 ‘官피아’로 비하하고, 공직사회의 ‘적폐’를 지적하면서도 자신 또한 그 적폐의 일부분이고, 크든 작든 그 적폐를 만… 드는 데에 일조했다는 인식과 반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안전행정부,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등이 사실은 자신의 팔다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관들을 해체하거나 축소하는 데에 있어서 비통함과 장렬함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국가안전처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겠다고 하면서도 국무총리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헌을 전제로 이원집정부제를 하겠다는 건지, 책임총리제로 운영하겠다는 건지, 지금과 같은 위상의 총리인데 단지 국가안전처에게만 특별한 위상을 주겠다는 건지 대단히 혼란스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헌법이 규정하는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생각하는 총리 간 상당한 간극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지요.
국무회의 및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장면을 보더라도 무엇인가 어색한 구석이 많습니다. 미국 백악관 회의와 영국 내각 회의 장면을 뉴스를 통해 수도 없이 많이 본 우리 국민이지만, 이들 선진국 각료회의에서 느껴졌던 친근감과 편안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헌법은 미국식이고, 민주주의 전통은 영국식이지만 마치 완전히 다른 회의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가장 황당한 것은, 대통령이 정부의 수반이라는 인식을 그의 언행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의 일탈도 자신과는 상관없고, 검찰의 일탈도 자신과는 상관없고, 심지어는 KBS 보도통제 의혹을 받고 있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일탈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국정원도 별개고, 검찰도 별개고, 자신이 수족으로 직접 임명한 비서까지도 별개라면 과연 본인의 위상과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대통령만이 문제인 것도 아닙니다. 총리로 내정되었다가 낙마한 김용준 지명자도, 성추행 스캔들로 물러난 윤창중 대변인과 이남기 홍보수석도, 국민 앞에 죄송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고 “대통령에게 송구스럽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 대신 사과를 한 김기춘 비서실장도 “대통령에게 송구스럽다”는 말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34일 만에 나온 것도 국민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해경의 잘못도 대통령의 잘못이고, 안행부의 잘못도 대통령의 잘못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총리만 국민에게 사과하고 대통령은 국민 앞이 아닌 장관들을 앞에 놓고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뒤늦게 마지못해 특별 기자회견 형식으로 사과했습니다.
이렇게 사유를 하다 보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왕정시대 절대군주의 정체성과 위상입니다. 대통령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대통령을 모시고 보필하는 참모와 각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그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앞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이 청와대 코앞까지 갔음에도 끝내 자신이 직접 만나지 않고 자신의 참모를 대신 보내 말을 전하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지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권자이고, 그것이 법률과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각료도, 참모도, 관료집단도 국민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왕정국가에서는 황제가 주권자이기 때문에 각료도, 참모도, 관료집단도 오직 황제의 눈치만 보게 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권자인 국민이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고 갈아치울 수 있지만, 왕정국가에서는 역모나 쿠데타가 아니고는 황제를 비판할 수도 없고 갈아치울 수도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국정원은 절대로 댓글과 여론조작을 통해 선거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검찰은 절대로 권력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습니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공영방송이 절대로 권력자를 위한 불공정보도와 여론조작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시키는 사람과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죠.
이 같은 상황에서 해경을 해체한다고 우리의 현실과 미래가 달라질까요? 안행부와 해수부를 축소한다고 우리의 현실과 미래가 달라질까요?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총리를 새롭게 임명한다고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그래서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을 바꾸고, 그를 모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법률을 뜯어고치고, 제도를 혁신적으로 바꾸더라도 여왕이 통치하고 신하들이 여왕을 절대군주로 떠받드는 시대착오적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하 청와대 참모진들이 모두 퇴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이, 여왕이 다스리는 왕정국가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떠받드는 대통령 중심 민주국가로 바뀔 수만 있다면 해경을 해체할 필요도, 안행부와 해수부를 축소할 필요도, 국가안전처를 신설할 이유도 없습니다. 국민은 왼쪽 다리가 가렵고 아프다고 하는데, 의사가 자꾸 어깨를 수술하고 팔을 절단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말로 우울한 블랙코미디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해외 방문외교를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국민 앞에 서서 그동안 자신이 잘못 인식해왔고 잘못 처신해온 부분들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고, 이를 철저하게 개선하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성 있는 조치일 것입니다. 해경을 해체하는 것도, 안행부와 해수부를 축소하는 것도, 국가안전처를 신설하는 것도, 신임 총리를 임명하는 것도, 내각과 참모를 일신하는 것도 모두 그 다음에야 논의될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 이진우 창조경제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