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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치유10) 영혼의 정을 이루는 사랑의 본능

소검 |2014.06.03 23:19
조회 54 |추천 0

영혼의 정을 이루는 사랑의 본능

 

사랑의 본질은 심연의 중심에 있는 본성에서 이루어지며, 본성을 이루어야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본성을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진실한 사랑이 없다. 사랑을 찾고 이루기가 힘든 것은, 깨달음의 세계를 여는 것과 같이 힘들다. 깨달음을 통하여 각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지만, 각성의 세계에서는 각성을 알 수 없으며, 거기에 있는 것이 “자아”이다. 또한, 마음을 다스려 본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지만, 본성의 세계에서는 본성을 알 수 없으며, 거기에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용서가 필요없고, 사랑에는 후회가 필요없고, 사랑에는 아름다움이 필요없고, 사랑에는 미움이 필요없고 사랑에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본성의 사랑에서는 사랑만이 존재한다. 그 밖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것이 본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며, 그것이 절대적 사랑의 세계인 것이다.

 

각성의 세계에서 깨달음은 모든 이치가 하나로 이루어짐을 알게 되며, 본성의 세계에서 사랑은 모든 존재적 실체가 “사랑” 하나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즉, 각성은 모든 이치를 아는 것이며, 본성은 모든 사랑을 아는 것이다. 또한, 각성은 모든 이치가 자아에 있음을 알게 되고, 본성은 모든 이치가 사랑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각성의 이루어짐은 자아이며, 본성의 이루어짐은 사랑이니, 각성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전체에 개체가 존재함을 알게 되며, 본성은 “사랑”이라고 하는 개체에 전체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모든 빛이 무광의 이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깨달음이며, 모든 색이 백색에 녹아드는 것이 사랑이다. 어떠한 색을 더해도 변하지 않은 백색의 마음이 본성이며 그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백색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며, 사랑에 어떠한 색이 칠해졌다고 해서 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본성에 어떠한 색을 더해도 변하지 않는 백색일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인 백색의 마음을 이루는 것이니.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본성에서 이루어지며, 본성은 자아에서 이루어지고, 사랑이 자아를 떠나면 그 순간부터 사랑은 사라진다.

 

인간의 마음의 중심을 여는 것이 본성이며, 본성을 열고나면 그 안에 사랑이 있으니, 어떠한 색채도 녹게 하는 밝은 백색의 사랑이 있다. 자아는 하나이며 사랑도 하나다. 하나의 자아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며, 하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본성이다. 하나의 자아에 모든 존재적 이치가 존재하고, 하나의 사랑에 모든 실체적 사랑이 존재한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자아를 알게 될 때 모든 이치를 알게 되고, 자기 안에 실체하는 사랑을 가질 때 모든 실체하는 존재들을 사랑하게 된다. 자기 안에 실체하는 사랑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이러한 사랑에는 미움 자체가 없으며, 이러한 사랑에는 용서 자체가 없으며, 이러한 사랑에는 뉘우침 자체가 없으며, 이러한 사랑에는 차별 자체가 없으며, 이러한 사랑에는 아무런 색채가 없는 백색일 뿐이다.

 

사랑을 가장 사랑이게 하는 것은 “정”이며, 정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정은 무극차원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사랑이전과 사랑이후의 사랑이기에, 사랑이라 말하기전의 사랑이며 사랑이라고 말한 이후의 사랑이다. 그러나 정이 없는 사랑은 태극적 사랑이니, 태극적 사랑은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그것은 음이 양으로 양이 음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 태극의 이치인 것과 같이, 사랑에서 미움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이 없는 태극적 사랑은 항시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사랑이니, 그것은 언제 미움으로 변할지 모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극적 사랑이다. 사랑이 있기 전이나 후나 항상 변함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워하겠다는 말과 같으며, 만약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이치적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무극적 사랑을 태극적 사랑으로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즉 자식은 부모의 자식으로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와 마찬가지로 만약,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말과 같으며,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또한 그러한 이치적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의 본질

영혼의 본질로부터 사랑이 나온다. 영혼을 잃은 인간에게 사랑이 없는 것은, 사랑의 근원인 영혼을 잃었기 때문이니, 사랑을 강조하는 인간은 자신의 사랑을 잃었기 때문임을 알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애타게 부르짖는 것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사랑이 찾아지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찾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영혼으로부터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사랑이 사랑이며, 그렇게 하여 일회성 소모적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영혼에 있다. 신에게 별도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며, 남에게 베푸는 선행의 방식에 사랑의 분별이 있지 않다. 남에게 동정심을 일으켜 도우려는 것이 사랑이 아니며, 선행을 하는 것이 칭찬받을 일인지 비난받을 일인지 걱정하는 선행이 사랑이 아니며,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구분하여 여러 개의 종류로 나누고, 그 사랑의 차이에서 진실한 사랑과 부족한 사랑을 논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영혼을 잃은 인간들이 사랑을 왜곡하고, 사랑을 쪼개고 나누어서 사랑을 괴롭힌다. 사랑은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사랑은 자신과 모든 상대를 이롭게 한다. 동정심이 일어나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며, 칭찬받을 일인지 비난받을 일인지 걱정하지 않으며, 누가 시키든 시키지 않든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랑이며, 오로지 한 길에서 나와 하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사랑이니, 자신의 영혼부터 사랑하라.

 

사랑의 화합

사실적으로 사랑이라는 말은 필요가 없다. 가까운 상대로부터 이롭게 하는 삶이 사랑의 시작이며, 가까운 상대를 행복하게 하고 더 넓게 모든 인간에게 이롭게 하는 실천적 삶이 사랑을 베푸는 모든 것이니, 이러한 실천적 생활을 하지 않고, 가까운 상대부터 불편하게 하면서 입으로만 말하는 가식적인 사랑은, 자신과 상대 모두의 영혼을 속이려는 야비한 짓이다.

   가까운 상대부터 화합을 이루어 조화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며, 아웃과 사회에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와 인류에 화합적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가까운 상대부터 이간시키고, 아웃과 사회를 이간시키면서, 나라에 대한 사랑과 인류적 사랑을 부르짖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이간하여 인간세상을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사악한 사랑이다.

 

인간의 성품은 내면에 갖추어야 할 것과 외면에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중에 사랑은 내면에 갖추어야 하는 인간의 지고한 성품이다. 이러한 내면의 성품이 외면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은 가식이 된다. 상대를 이롭게 하는 삶 자체가 사랑이니, 말이 왜 필요하겠는가? 내면에 사랑이 없는 인간들이 상대를 속이기 위하여 사랑을 외면으로 나타내어 말로만 하는 사랑인 것이니, 그런 가식적 사랑에 머리를 쓰지 말고, 실천적 삶에서 상대를 이롭게 하려는 머리를 쓰는 것이, 자신과 상대 모두의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이며, 영혼을 밝게 하리라.

 

주체의 보완

인간은 그 본능으로부터 남에게 애써서 도움을 주려는 성품이 있다. 실의에 빠진 상대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거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물적ㆍ심적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불편한 삶에 도움이 되도록 부족한 것을 채워주거나 힘써서 도와주는 조력 등을 하며, 잘못된 것을 바로 가게하려는 권고를 한다거나 안내를 해주기도 하고, 남의 결함을 살펴서 고치도록 유익한 충고나 충언을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의 성품은 인간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는 소중한 인간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성품이리라.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 삶에서 자기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며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자신의 결점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무엇이 결점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도 쉽지 않으니, 그리하여 필요한 것이 상대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결점에 대한 보완에 대해서 이성을 가지고 바로 보아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보완일 뿐이라는 것이다. 보완적 도움이며, 보완적 대화며, 보완적 충고며, 보완적 위로가 되는 보살핌이어야 한다. 보완(補完)이란 기울어진 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며,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니, 그러한 결점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보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완의 주체가 당사자라는 것이다. 당사자가 보완의 주체가 되어 상대로부터 그것을 보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보완이며 도움이다. 당사자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취급하는 보완적 도움은, 도움 그 자체가 당사자로 하여금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존재감과 주체적 영혼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개인의 주체적 존재감과 영혼을 잃어버린 뒤에 어떠한 보완적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짓은 일종의 죄악이다. 인간세상에서 종종 이러한 우를 범하고 있기도 하지만 의도적인 범죄와 같은 행위를 하니, 상대를 돕는 다는 것이 상대의 결점을 보완하게 하기위한 도움이 아니라. 자기만족적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도움을 받는 상대는 주체적 삶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즉, 상대의 결점에 대하여 충고하려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상대에게 위로하려 할 때에는 위로에서 자신의 진실성을 확인해야 하며, 상대를 도우려 할 때에는 자기만족적 도움이 돼서는 안 된다. 인간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가 상대로 하여금 존재감을 잃게 만드는 것이며, 주체적 자아의 영혼을 잃게 만드는 것이니 그 위험성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 위험성에 대한 댓가가 상대는 물론 위선적인 자기자신에게도 더 위험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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