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 사건 제보자의 진술 신빙성이 인정되며, 지휘체계를 갖춘 조직이 존재한 사실도 인정된다. RO는 내란음모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 이석기 의원이 총책”
지난 17일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해 ‘내란 음모’ 혐의 따위를 인정해 징역 12년을 선고했습니다. 현직 국회의원에 내란음모 혐의가 적용된 것은 1966년 한국독립당 김두한 의원 이후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내란음모 혐의가 인정된 것은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34년 만입니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2004년 재심을 통해 결국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아직 2심과 대법원 판결이 남았지만, 대한민국 사법부는 다시 한 번 ‘정치판결’을 내렸다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내란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먼저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당시 군에 침투한 남로당의 핵심 프락치로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또 1961년 5월 16일 일으킨 군사반란 역시 ‘법적’으로 내란죄가 아니지만, ‘역사 법정’에서는 내란죄로 처벌 받아야 합니다. 법적으로도 박정희는 처벌받아야 합니다. 5·16 군사반란 당시 군형법을 보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한 자”는 “수괴는 사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무기징역도 없는 사형입니다. 무엇보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은 1996년 대법원에서 내란수괴죄로 처벌 받았습니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 북한과 빨갱이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 새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정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내란입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15일 <한겨레>에 기고한 <각하들도 피하지 못한 내란의 추억>제목글에 우리 역사에서 진짜 내란은 4번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짜 내란은 여순반란 사건과 5·16 군사반란과 유신 친위쿠데타와 5·17 군사반란이 있었을 뿐이다. 5·17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 내란범은 자신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광주항쟁을 내란으로 몰았고, 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4번 내란에 박정희는 무려 세 번이나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정도면 내란 전문입니다. 이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같은 글에서 “박정희는 내란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내란 전과 3범을 기록한 인물”이라면서 앞에서 예로 들었던 “1948년 ‘여수·순천 사건’과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은 역사의 법정에서 볼 때 내란”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군정 연장을 위해 최주종에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라 권한 것까지 포함하면 내란 전과 4범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내란 전과 4범인 박정희는 내란범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자신과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킨 동지들도 있습니다.
“그 자신이 내란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별을 단 것이 박정희이지만, 가장 많은 별을 달아준 것도 박정희였다. 처음에 박정희로부터 내란죄 별을 하사받은 자들은 이른바 ‘반혁명사건’에 걸린 박정희의 ‘혁명동지’들이었다. 명목상 쿠데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로 해병 제1상륙사단장으로 있으면서 5월16일 새벽 박정희와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넌 김동하, 혁명검찰부장으로 수많은 ‘반혁명분자’를 잡아들인 박창암, 박정희가 민정이양 공약의 족쇄를 벗어나기 위해 내린 친위 쿠데타 지시를 거부한 최주종 등이 박정희로부터 내란죄 별을 하사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으로 군이 진정될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반혁명사건의 대부분은 박정희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실제로 병력을 동원할 계획을 세운 것은 1965년의 원충연 대령 사건 딱 하나뿐이다.”
대단한 박정희입니다. 목숨을 걸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동지들을 내란범으로 몰아간 박정희. 권력은 부모 자식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지만. 특히 최주종이 눈에 들어옵니다. 박정희가 군사반란 후, ‘민정이양’을 약속한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대통령이 됩니다. 얼마나 대통령이 되고 싶었으면 민정이양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란 친위 쿠데타’를 지시했을까요. 이를 최주종이 거부했습니다.
<월간조선> 편집장을 지낸 조갑제씨는 지난 2012년 5월 14일 <조갑제 닷컴> ‘위기일발! 박정희 의장의 울릉도 방문’에 제목 글에서 최주정 참모장이었던 백행걸 대령이 쓴 회고록 <미완성의 성취>에서 이런 비화를 소개했다고 밝혔습니다.
내가 그의 참모장으로 부임하기 얼마 전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하게 된 박정희 의장의 부름을 받고 밤중에 청와대로 갔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은 군정 연장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사전에 짜인 각본에 의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달라는 지시 겸 부탁을 하였다. 박 의장에 의하여 구상된 쿠데타 계획은 최주종 장군이 지휘하는 제 8사단 병력이 친위 쿠데타 부대로 출동하면 제 5사단(당시 경기도 포천 일동에 주둔)으로 하여금 진압시키고, 쿠데타 주모자 역할을 맡은 최 장군은 체포 후 우선 안전하게 미국으로 빼돌렸다가 추후 책임지고 재등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비장한 각오로 이 지시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더 이상 군이 정치에 이용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조갑제씨는 이 같은 내용에 대해 “기자는 ‘박 의장이 최주종 8사단장을 불러 친위쿠데타를 일으켜달라는 주문을 했다’는 요지의 글을 회고록에 남긴 백행걸 장군에게 그 근거를 물었다. 백 장군은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 최주종 장군(1998년 작고)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했다”면서 “기자가 ‘최주종 장군은 믿을 만한 분이냐’고 했더니 백 장군은 ‘작년에 타계하여 대전 국립묘지에 묻힌 그분의 묘비명을 내가 썼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군사반란에는 가담했지만, 군인이 정치권력을 잡는 것은 거부한 것입니다.
최주종이 거절하자 박임항, 김동하(해병사단장 출신), 박창암(박창암·혁명검찰부장)등 함경도 장성과 함께 반反혁명 혐의로 구속합니다. 물론 최주종은 곧 무혐의로 풀려나, 군수기지사령관에 부임합니다. 아무튼 이후 박정희는 내란범을 만드는데 실력을 드러냅니다. 그가 철권통치 18년 동안 만든 내란들이 무엇인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