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올림픽 개막
개-폐회식 없이 잡초 속 경기
인류가 최초로 전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언어와, 종교 정치 체제 차이는 이러한 통합을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 스포츠이다. 하나의 룰, 하나의 기준이면 어떤 차이도 극복할 수 있었다. 전 지구적 통합의 불완전성이 초래한 세계 대전을 '젊음의 피밭'이라고 한다면 완전한 통합이 만든 스포츠 대전 올림픽은 '젊음의 꽃밭'이다. 그리고 1백년 동안 그 피밭과 꽃밭의 두 의미를 가장 극적으로 부각시킨 것이 바로 한국의 6.25 전쟁이요, 서울올림픽이다.
미셀 테아토는 프랑스 파리 빵 가게 심부름꾼 소년이었다. 그가 출전한 마라톤 대회는 파리 도심을 빙빙 도는 코스. 뒷골목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당당히 1등 했다. 테아토는 그러나 우승의 의미를 몰랐다. 팜플렛에는'파리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 경기대회'라고만 씌어 있었다. 12년 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뜨거운 여름 날 어수선한 레이스에서 우승했다는 기억밖에 없다.". 메인 스타디움도 없었고 개회식-폐회식도 없었다. 육상 경기장은 블로뉴 숲 속, 버려진 경마장을 개조한 곳에서 열렸다. 잡초가 잔뜩 자라 발이 걸려 넘어지는 선수가 속출했다. 미국의 알빈 클렌츠레인은 60m 달리기, 110-200m 허들, 넓이뛰기 등 육상 4개 종목에서 우승한 파리 올림픽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손에 4개의 메달이 전달된 것은 폐막 2년 후의 일이었다. 1900년 7월 14일, 20세기 최초 올림픽인 프랑스 파리 올림픽(2회)은 그렇게 어떤 상업주의도 어떤 정치적 의도도 끼어들 틈 없이, 우정과 만남의 상징으로 열렸다.
20세기 후반을 살았던 한국인들에게 '올림픽'이란 단어만큼 극적이고 구체적인 세계화 기억도 드물다. 모스크바와 LA올림픽의 반쪽 대회를 청산하고 탈냉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서울올림픽을 주도하면서 한국인들은 국제 사회 중심에 훌쩍 뛰어들었다. 반세기 전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남의 나라 국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했던 '동양의 소국'이 식민 상태를 청산하고 내친김에 냉전까지를 끝장내는 화합의 마당을 만든 것이다.
20세기는 스포츠의 시대이고, 이를 이끈 견인차가 올림픽이었다. 마이클 조던이나 호나우두, 타이거우즈, 박세리의 인기와 부는 19세기 스포츠인들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산업-과학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 현기증 나는 20세기인들은 힘과 기를 극대화하면서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 드라마에 열광하며 카타르시스를 맛봤다.
스포츠는 사람을 순수하게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픽 기간 3개월을 '평화의 날'로 정해 전쟁을 멈추었던 것처럼, 20세기 올림픽은 전쟁·갈등·이해를 잠시 잊고 세계를 통합, 지구화(Globalization)로 가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었다. 여성이 처음 출전한 것이 파리 올림픽, 흑인이 처음 출전한 것이 4년 뒤인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었다. 최초의 비서구권 대회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최초의 아시아권 대회는 1964년 도쿄올림픽이었다.
히틀러가 나치 이념과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대대적인 선전장으로 개최했던 베를린올림픽조차 올림픽 역사에선 다만 한 단계 도약의 계기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누가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뛰고 찌르고 던질 수 있느냐를 가르기 위해 시작된 올림픽을 한편으로는 평화의 마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능력의 한계에 대한 도전의 장으로 만든 것은 20 세기적 인류가 마땅히 역사로부터 받아야 할 훈장이다. 그러나 아마추어리즘의 극치였던 올림픽 마당을 상업 광고의 시장터로 만든 20세기적 '과오'는 21세기엔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