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 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을 맺고 휴전선을 정하였다. 하지만 1·21 사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 대청해전, 천안함 침몰 사건, 연평도 포격 등 휴전 협정 이후로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있었다. 전쟁으로부터 60년가량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한과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형성된 정치적, 사회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 비극적인 전쟁이 어떤 배경에서 발생했으며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를 다룰 것이다.
I. 한국전쟁의 배경과 기원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성립되던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이미 민족분단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48년 8월과 9월에 서로 각기 다른 체제 아래서 남북한이 성립되며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되었다. 남북한의 정치지도자 모두 통일만이 민족의 유일한 활로라고 믿었지만, 모두 자신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양측은 이를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한다는 신념을 강하게 가졌다. 다시 말해 남북한은 서로 자기 쪽의 체제를 상대방에 확장하는, 상대방의 붕괴 내지는 소멸이라는 조건 아래서만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내쟁적인 성격을 띠며 양국관계가 불안정화로 전개되면서 마침내 남북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구조 성립이 한국전쟁의 한 원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북한의 남침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 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 북한의 남침은 선제고 전면적이었으며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었다. 과거에 한국전쟁의 기원을 다루는 가설에는 스탈린 주도설, 한미 공모설, 중·소 음모설, 내란 확전설 등이 있었지만,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소련의 비밀문서 등의 공식자료들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 공개된 여러 공식 자료들과 증언, 회고록 등을 보았을 때 북한이 소련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쟁을 주도적으로 구상하고 준비해 나간 쪽은 소련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또한, 북한 내부의 군사력투쟁이 한국전쟁 발발에 어느 정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런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려면 더욱 많은 자료의 발굴과 증언들의 청취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이 왜 전면남침의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김일성파와 박헌영파의, 또는 북로동파와 남로당파의 권력투쟁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의 입장과 논쟁을 권위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더욱더 자세하게 밝혀낸다면 이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I. 한국전쟁의 전개양상과 성격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쟁은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전개양상에 따라 전쟁의 국면을 다섯 개로 나눌 수 있다. 북한이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제1기(1950년 6월 25일~ 9월 중순),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시작으로 국제연합군이 반격하여서 한·만 국경까지 진격하여 북한 정권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제2기(1950년 9월 중순~10월 하순), 중국군이 참전과 국제연합군이 후퇴하던 제3기(1950년 10월 하순~1951년 4월 초순), 국제연합군의 재 공세가 이뤄지던 제4기(1951년 4월 초순~1951년 6월 중순), 화전 양양 속에 휴전협상이 이뤄지던 제5기(1951년 6월 중순~ 1953년 7월 27일)로 이렇게 전쟁을 다섯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분량이 제한되어 자세한 내용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 보고서에서는 이 전쟁의 성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이 전쟁은 ‘제한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전투행위는 한반도에만 국한되었으며, 미국과 소련 및 중국의 성역이 보장됐다. 미군은 일본이, 소련은 시베리아가, 중국은 만저우가 성역으로 보장되어 각각 폭격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국지전이 자신들 사이의 직접적 대결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국지전이 중국으로 확전되는 것을 경계했다. 공격목표물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전쟁 초기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목표물에 한정하여 폭격했고 점차 산업적 목표물로 확대했다. 그러나 한반도와 소련의 접경지대 그리고 한반도와 중국의 접경지대에 대해서는 폭격을 금지했다. 중국도 남한에 대해서는 거의 공중 폭격하지 않았다. 추구하는 목적 역시 매우 제한적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결국 전전 원상에 따르는 상태의 회복에서 전투행위를 정지시켰다. 한편, 미국은 힘의 행사에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북한은 전력투구의 총력전이었다고 분석하는 예도 있다. 1950년 10월에 미국이 38도 선에서 진격을 정지하지 않고 북진하여 대한민국에 의한 통일을 시도하려 했었음을 볼 때, 이 전쟁의 목적 추구에 제한이 있었다는 통설에 부분적인 이의 제기한다. 한국전쟁은 ‘제한전’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의견이 나뉠 수 있지만, 제한이 있던 전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III. 한국휴전협정의 성립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을 맺고 휴전선을 정하였다. 사실 한국전쟁 기간에 서방 쪽과 공산 쪽 그리고 중립진영으로부터 갖가지 휴전안들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시 참전국가들은 남북한 어느 한 쪽에 의한 군사적 통일을 원하지 않고 전쟁 전 원상의 회복을 추구했다. 그래서 국련군이 북진해 38도 선에 접근했을 때나 중국군이 남진해 38도 선에 접근했을 때 휴전안이 제기됐던 것이다. 한국휴전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의 영향력 역시 절대 가볍지는 않았지만, 남북한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전전 원상의 회복이라는 선에서 정전을 원하는 강대국들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휴전협정은 전쟁 전의 원상회복 선에서 성립되었고, 한반도 분할 선을 38도 선에서 휴전선으로 옮기는 것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쟁의 시기에 열강이 이미 남북한의 어느 한족에 의한 무력통일을 지지하지 않고 전전 상의 회복을 지지했다. 이 기본시각은 그때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효하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한반도의 현상변경을 지지하지 않고 현상유지 원할 것이다. 그 당시 휴전안들을 검토하면 오늘날의 시점에서 또는 앞으로 국제사회가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IV. 한국전쟁의 영향과 결론
이 전쟁이 그 발발로부터 이미 60년 이상 지났다. 이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많이 사라졌고 전쟁 이후의 세대가 크게 자라났다. ‘6.25 미체험세대’는, 이 전쟁을 전쟁의 참극을 잊지 못하거나 여전히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세대와 달리, 한편으로는, 훨씬 더 많은 자신감과 자주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 세대는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 민주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이 있는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이미 한국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6.25 미체험세대’는 공산주의와 김일성•김정일 체재의 비인간적 성격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북한 공산체제의 독재적 성격, 그리고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욕망을 과소평가하며 때로는 북한문제와 대한민국의 안보문제와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으로 접근하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위험할 수 있다. 미국의 통계로는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 중 85%는 민간인이다. 소련의 통계를 보면 북한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가 됐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단언컨대 비극이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민족 전체에게 이 전쟁의 상처고 치료되어야만 한다. 한민족이 진정으로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전쟁의 상처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치료하느냐에 대해 남북한 공동의 이해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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