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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쓴 시 몇 편

꽃눈 |2014.11.14 05:48
조회 229 |추천 0
  꽃을 떨어트리는 바람도 날리는 꽃들이다

땅을 뒹굴어 갈색으로 변한 바람을 보며
하얗게 질린 꽃은
흙으로 돌아가면 잎으로 다시 날 것을 모른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또 자라 꽃을 피울 것을 모른다

떨어지는 것은 바람에만 맡겨야 한다
팔이 없어서
그만 놓아버리지도 못 한다

차라리 누군가의 손에 꺾여 가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은 바람이 된다.





  용천사(湧泉寺)

대웅전 밑
허리께 오는 작은 둘확 두 개
하나에는 물이 차 있고
하나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물 위에는 연보라 빛
부레옥잠 꽃 한 송이 피었다
나는 빈 돌확 안에 들어가
찬 바람을 견디다가
피는 꽃이고 싶다






  매화

꽃잎을 보며 너의 손톱 같다며 웃는 그대는 이제 없다





  지하도

달의 어두운 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쓰고 싶다
잠들어, 내 영혼은 집에서 빠져나와 담티역 지하도를 건너 구치소 어디쯤을 헤메고 있다
거기서 누군가를 찾는지 몰라, 그도 내 꿈을 꾸고 있을까 몰라
토끼 같은 눈을 감고, 자고 있다





  벼꽃

시발!
농부들 욕 들어쳐먹어가며 피워놨더니
나랑 똑같은 유전자 가진 게 몇 억 개

시한부 인생,
무덤 밭에 구슬붕이는 술이라도 쳐먹지!

농약을 들이키며
조금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광기에서 멀어져가




  만짐

새벽에 자꾸 깨는데 어찌하면 좋겠냐는 나의 말에
정신과 의사는 나가서 좀 걸으라고
새벽 다섯시에요?
그래

나는 해도 안 뜬 시각, 나가서
그날 처음 한 알 먹었던 섬망을 찾아 헤메다닌다
어제 저녁먹고 나서 먹었던 약 기운이 가시고
내 광기의 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질 무렵
나는 신천 위 다리 한가운데 쯤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
내 폰이 6시 반 알람을 울린다
이승열의 Why We Fail
대구은행역에서 경북대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잘 못하는 화장이나마 하고 그날 입을 옷을 찬찬히 고르기 위해 나는 6시 반에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차가 쌩쌩 지나다녀 알람 소리는 잘 안들리고,
나는 폰을 귀에 가까이 대고, 내 일상이 걸었던 음성 메세지를 듣는 것처럼, 알람을 듣는다

아침에 잘 못 일어나서, 사칙 연산을 해야 꺼지는 알람을 스마트폰에 설치했다던, 휴학하고 약대 입학 시험을 준비하던 과 동기
그리고 너의 알람은 무엇이냐는 말에, 이승열의 Why We Fail 이라고,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어서 좋다고, 농짓거리 하던 날이

나는 내가 지나온 다리, 차갑고 검고 음각된 다리 이름을 확인한 뒤에,
얼른 폰으로 이 시를 입력한다,
희망교



  쇠창살

너는 나를 볼 수 있고
나는 너를 볼 수 있다

네가 안에 갇힌 건지
내가 안에 갇힌 건지

공간의 분리는
곧 완전한 분리로 이어질까

문이 따지고 네가 내 쪽으로 오면
우리 둘 다 갇히게 되는 걸까
둘 다 자유가 되는 걸까

애초에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감옥은 평화고 밖이 전쟁터이므로

너와 나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죄수이거나 간수인 채로
영원히 겹쳐질 수 없을까

네가 늑대 인간으로 변신해 쇠창살을 뜯어내는 상상을 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성을 잃은 너에게 곧 물려 죽고 말 것이다

애초에 너와 내가 존재하기도 전에도 쇠창살은 있었고
삶은 로맨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쇠창살 너머로 너를 본다
마주 보는 눈빛만으로는 불충분하냐고





신천

그래도 오늘도 살았다
신천은 빠져 죽기에는 너무 얕아서.



  실험

캄캄한 밤 자다 일어나내가 아닌 이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컴퓨터를 끄지 않고 누워있었다 불도 켜지 않고 모니터도 끈다 어둠 속에 앉아 타이핑한 이 글을 보려면 그대에겐 빛이 반드시 필요하다 글을 쓰는 데에는 빛이 필요없지만 읽는 데에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아니면 점자 프린터와 예민하고 훈련된 손끝이나 이제 방 안의 사물들의 윤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니터는 완전한 암흑이고 검은 키보드의 글자판 또한 여전히 암흑이다 그대가 이 글을 읽지 않는다면 이 글 또한 영원히 암흑 속에 있을 것이다 빛이 어둠을 밝히나 어둠은 빛을 끌 수 없다 당연한 진실이다 나는 어둠에서 뭔가를 길어올려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빛, 여백의 하얀 빛에 ㅁ무언가를 전해주고 싶다그러나 이 것은 실험일 뿐이다 애초에 빛이 없었다면 글을 배우지도 타자 치는 법도 몰랐을 테니까 어둠은 왜 빛을 끄지 못하냐고, 투정



  다시 봄이 온다면...

매화가 져버려서 다행이다
매화를 닮은 향기가 나던 그대가
더이상 생각나지 않아서
다시는 매화가 피지 않길
그대 향기를 잊어버릴 수 있게

목련도 져버려서 다행이다
목련 같은 웃음을 짓는 그대가
더이상 떠오르지 않아서
내년에 다시 목련이 피어도
그땐 목련을 봐도 그대가 생각나지 않으리

벚꽃도 져버려서 다행이다
벚꽃처럼 떨어지던 그대 눈물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거짓말, 벚꽃이 설령 다시는 피지 않는다 해도
그대의 울음은 잊혀지지 않으리

동백도 져버려서 다행이다
동백처럼 시뻘건 피를 흘리다 죽어버려라
동백은 내년에 다시 피겠지만
그대는 돌아오지 않으리

애초에 그대가 나를 저버린 건
꽃이 져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네




절념(竊念)

손 탈까 차마 만지지도 못하는 꽃눈을
쌓이지도 못하는 풋눈이 희롱하네 속절없어

속절없어 봄이 오고 개화한 목련은
그 풋눈 비슷한 색





  마지막 시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나는 게 아니고
펜으로 쓴 꽃과 바깥의 진짜 꽃 사이의 거리는 무한대인데
왜 시를 쓰는가

나의 펜, 그대가 읽는 문자 사이의 무한대의 거리
그로 인한 오해와 곡해에 비하면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이 얼마나 가까운가
펜을 놓고 그저 그대를 품에 안는 게 낫다


기억과 망각


기억,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의 대화를 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반갑지 않던 말 많던 동창
기억, 가장 친하고 오래되고 소중한 친구가 우리가 처음 만난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생일 선물로1000원짜리 양말을 줬다는 기억
망각, 가장 친하고 오래되고 소중한 친구와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기억, 어린 시절 아무리 무거운 걸 들고 가도 짐을 들어주지 않고 빈 손으로 걷던 아버지의 무정함
망각, 날 처음 보던 날 아빠는 무슨 말을 했고 어떤 눈빛으로 날 바라봤는지
망각, 처음 바다를 볼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망각, 내가 처음 썼던 일기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망각, 처음 하얀 눈 내리는 것 봤을 때 어땠는지
잿빛 눈 쌓인 것 봤을 때는 어땠는지
기억, 예전에 살던 동네 카페 카푸치노 잔의 하얀 농담
신경써서 맞춘 듯한 카푸치노의 그 온도
이 시를 당신은 기억할까 망각할까



시어


꽃집을 지나치지 못하고 정신없이 바라보는 너에게
내가 꽃인데 뭐가 더 필요하냐고 질투하고



'너'가 너라는 걸 네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시를 쓰면서 네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날카로운 첫 키스

눈이 펑펑 왔던 그 때 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죠
삭월세 방을 놓고 부모님은 맞벌이 나가셨고 동생은 눈싸움을 하러 나갔고 집엔 할머니와 내가 있었죠
셋방을 보러 당신이 왔고, 할머니께 물 한 잔을 부탁했고,

그 사이, 우리는 첫 키스를...
어린 나는 놀라서 당신의 혀를 깨물었죠
당신은 태연하게 나를 내려놓고, 당신의 그것을 꺼내서 한 번 만져보라며, 이거 좋은 거라며

십삼사년이 지나 대학생과 교수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었죠
종강 파티에서 나는 과가 안 맞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최소한의 알바만 하며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당신에게 물었고
당신은 이혼한지 오래라며, 돈 쓸 일이 옷 사고 책 사는 거 밖에 없다고
며칠 후, 신년 벽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선배가 견습 공무원 추천 때문에 성적이 필요하다며, 내 성적인 a-와 그 선배의 성적인 b+를 바꿔줄 것을 청했어요
공정하지 못하다는 나의 말에,
나도 20년 전 같았으면 불러서 싸대기를 때렸다고, 그치만 한 번 적선한 셈 치고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고
내가 너희들 성적을 좋게 준 이유가 뭐겠냐고
세 단계씩 높게 줬는데, 원래대로 낮게 바꿀까
그게 공정한 거 아니냐고

나는 알았다고, 바꿔 드리겠다고 대답하고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어요
새벽 두 시에 문자를 보냈죠
'교수님, 성적 교환은 제가 손해였다고 말하면 됐었어요.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위선이었어요.'
괴로워하다 당신에게 전화했더니, 당신은 원래대로 바꿔줄테니,
내 수업도 듣지 말고 사람들하고도 어울리지 말라며 큰 소리를 쳤죠

나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길에 울었고, 꽃이 아파왔어요
당신은 선배와 나에게 말했죠, 귤 먹어라.
근데 귤을 먹었으면 그걸 해야지.

이를 닦아야지.
굳어있는 내 얼굴을 보고, 당신은 얼굴 피라며.


  초생이 그믐에게

당신은 내게 말하셨지요
나처럼 살라고

나는 당신을 꿈꾸지만
당신과 다릅니다

그러나 망원경 속에서,
오늘도 어느 천체물리학자가 딸에게 선물한
망원경 속에서
나는 당신입니다

중학교 신입생 때,
천체관측동아리의 첫번째 모임에서 선생님이
맨눈으로 보는 달과 망원경으로 보는 달의
차이를 맞히면 문화상품권을 주겠다고 하셨는데요

제 자랑이지만,
제가 단 한번 망원경으로 달을 보고 맞혔지요
좌우가 바뀌어 보인다고

오늘도 지구의 그 많은 망원경 속에서
나는 당신입니다

언젠가 나는 당신이 되겠지만
그 모습은 과거와는 또 다를 것입니다
매일 다른 구름이 나를 입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눈이 내립니다
새벽녘에, 기온이 너무 낮아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길이 얼면 사람들이 다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이 되었을 때
날씨는 어떠할까요
그 때 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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