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
그동안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희생자는 23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23명의 숫자는 언제부터 고정화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 숫자는 일제측의 기록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3.1운동뿐만 아니라 일제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계나 학자들은 축소하거나 왜곡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일하게 제암리사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측은 당시의 제암리사건을 다음과 같이 왜곡 축소하고 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84)
이러한 일제의 왜곡 축소된 제암리사건에 대한 진상은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각종 사료를 조사한 결과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따라서 제암리사건에 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는 사건 담당자인 일본군 측의 보고자료와 언더우드85)․테일러86)․스코필드87)․노블88)․로이즈89) 등 기독교 선교사들과 외국인이 현장 조사한 증언 및 보도내용, 그리고 희생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일본측의 자료는 사건을 축소하거나 왜곡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외국인의 자료는 현지 주민을 통한 현장조사라고 하지만 통역과 기록과정에서 오류가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전동례, 김순이 할머니의 경우 60여 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을 기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사료적 한계가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숫자는 해방 후 1959년 정부에서 건립한 순국기념비에 의하면 23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희생자의 숫자는 기록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12명 정도의 기독교인과 25명 정도의 한국종교인(천도교인 25명)을 불러모았다.90)
② 살해당한 기독교인수는 12명인데 그들의 이름은 입수되었고, 그들에 더하여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살해당한 남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왔었다. 한 여인은 40세가 넘었고 다른 한 여인은 10세였다. 이들 시체들은 교회 밖에서 불 수 있었다.91)
③ 언더우드 :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한국인 : 약 30명92)
④ 그가 설명한 사건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 그도 역시 몇 명이 피살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30명 정도로 보았다.93)
⑤ 이 사건은 헌병과 군인이 이 마을에 들어가 명령을 내릴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여 저지를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50여 명 정도가 되었다.94)
⑥ 명령대로 교회에 모인 인원은 30여 명이었다고 하는데 병정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한 후 교회에 들어가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군도와 총검으로 모두 해치웠다는 것이다.95)
⑦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집 안에 있던 여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결과, 살해된 기독교인은 12명이라 하며, (중략) 교회 안에서 살해된 나머지 남자들은 천도교인이며 25명이었다고 한다.96)
⑧ 약 30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섰을 때 병사들이 소총으로 그들에게 사격을 개시했다.97)
⑨ 모든 기독교 신도와 천도교 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98)
⑩ 30餘名의 敎人이 敎堂에 會集하여 何事가 有한가 疑惑하는 中 (중략) 堂內에서 死한 者 二十二人이요 庭內에서 死한 者 六人이라.99)
⑪ 예수교도 및 천도교도 있음에 알고 4월 15일 부하 11명을 인솔 순사, 순사보와 함께 동지에 이르자 예수교 회당에 집합한 교도들의 반항을 받자 사격으로 대항 사자 20명, 부상자 1명을 내고100)
⑫ 군대 협력으로 진압하고 폭민의 사망 32명, 부상자 약간명101)
⑬ 사상자 20명 확실, 부상자 1명은 도주 행위불명102)
⑭ 야소교회당에 교도 30여 명 집합, 불온한 상태로 해산명령에 불응하며 폭거로 나오려고 하자 발포, 死者 約 20명, 負傷者 1, 2명103)
⑮ 천도교도와 야소교도 25여 명이 야소교회당에 집합, 전부 사살104)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암리사건의 희생자는 기록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국인이 현장을 취재하고 보도한 것으로 ①부터 ⑨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측의 기록으로 ⑪에서 ⑮까지이다. 이 두 종류의 기록에서 외국인의 기록에는 희생자의 수가 대체로 30명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제측의 기록은 20여 또는 25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희생자 숫자의 차이는 일제측이 고의로 희생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하는 의도 분명하게 엿보이고 있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외국인의 취재기록 중 증언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국인의 취재는 현장중심이지만 증언한 사람 역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제암리 주민이고, 다른 하나는 제암리 인근 마을 주민이다. 이것은 취재자료의 정확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본 자료 중 ①, ②, ⑦은 제암리 주민이 현장 또는 주변에서 본 상황을 증언한 것이며 ③, ④, ⑤, ⑥은 제암리 인근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이는 제암리사건을 주변으로부터 듣고 전언한 것이다. 이 전언한 것은 현장 또는 주변에서 본 상황보다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수는 37명이 가장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 37명의 희생자는 기독교인이 12명, 천도교인이 25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주서울 미총영사 앨런 홀쯔버그가 4월 23일과 5월 12일 미국무장관에게 두 차례 보고한 것이다.
-출처 네이버 카페 가우리 학문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