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면서 저의 위치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보혈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비판적인 기독교인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합리적, 보편적인 길에서 벗어난 기독교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진화론을 지지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며, 보수적이지 않고 진보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겁쟁이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도망치다가 고래에게 잡혀먹힌 요나처럼, 마지막까지 별에 별 변명을 다 하며 도망치던 모세처럼 겁쟁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덧글을 달아도 저는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해해 주세요.
미신과 우상숭배라는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일 것입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 봅시다. 교회에는 '부흥'이라는 이름 아래에 온갖 시끌벅적한 예배가 판을 칩니다. 자리에서 일어 서라, 손을 들어라, 율동을 해라, 찬송을 크게 불러라, 기도를 할때 목소리를 내어 크게 외쳐라, 주님을 외쳐라.
만일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길가에서 전도하는 기독교인을 생각해 봅시다. 공공장소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이리저리 오가면서 미친 사람처럼 이상한 말을 하면서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믿어야만 천당에 간다. 나는 믿으니까 천당에 간다. 너희들은 믿지 않으니 지옥에 간다. 나의 천당길을 위하여 이 소음공해의 피해를 입어라. 뭐, 이런 것들.
이 글은 이러한 행동에 어떤 신앙적 배경, 즉 미신과 우상숭배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기독교적으로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따, 너를 위하여 어떤 우상도 만들어선 안 되고 그것을 경배해서도 안 된다."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우상숭배의 규칙이니까요. 이 십계명 중 두번째 구절은 쉽게 '조각상'이라는 의미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기초적인 모습이니까요.
이 구절에 속은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흔히 다들 아는 패악들입니다. 단군신상을 파괴한다든지, 불교의 부처상을 파괴한다든지, 타 종교의 성지에서 난동을 부린다든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배척한다든지. 그러면서 그걸 믿음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겠죠. 기억하십시오. 예수는 남을 사랑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십계명으로 돌아가지요. 이 십계명의 첫번째 부분은 "하늘의~ 땅 위의~ 땅 아래의~"라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이든 그것을 섬기면 우상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한 가지 의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혹시 성경을 섬기고 있지 않나? 나는 혹시 교회를 섬기고 있지 않나? 나는 혹시 목사를 섬기고 있지 않나?
혹자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설령 이 땅 위의 모든 교회가 무너진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 없이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정말 아닙니다. 개신교는 기존의 천주교가 가지고 있던 평신도-사제-하나님이라는 구조를 부정하고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며 독립된 세력입니다. 즉 목사 또한 우리와 같은 평신도이며,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사제입니다. 혹은 사제여야 합니다. 그것이 개신교입니다.
이러한 반성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의 태도를 가다듬고 진정한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십계명의 중요한 두번째 부분, "너를 위해서"라는 부분입니다.
"신은 만들어질 수 있는가?"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저서, '만들어진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며, 또한 일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이건 도킨스가 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일 것입니다. 그는 과학의 입장에서 종교가 인간 지성에 끼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해악에 동의하며, 앞으로 종교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종교는 앞으로 설 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문제로 돌아가, 만들어진 신에 대해서 고찰하도록 합시다. 만들어진 신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고대 신화의 세계로 돌아가 보죠. 첫째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끌어 내리기 위해 필요했던 신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 북구 신, 이집트 신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들은 폭풍, 홍수, 지진 같은 각종 재난, 생로병사와 같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신들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인간 이성이 성숙하며 사라진 신들이죠.
이러한 자연신의 자리에 구약성서의 야훼를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야훼는 가끔 자연신으로서의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홍수 설화에서 특히 이러한 면모가 드러나죠. 이건 아마도 성서가 하나의 완전한 책이 아니라 여러 판본에서 따온 이야기의 결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야훼는 자연신이라는 한 가지 점으로 압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이에 대해선 좀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둘째로 인격신의 자리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후반부, 일본 신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신화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재밌으니까요. 이들은 인간과 독립하여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신에게 좋게 보이는 인간에겐 상을 주고, 따르지 않는 인간에겐 벌을 줍니다. 말하건대, 이것 또한 우상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신의 자리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려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야지 제사에도, 경배에도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인간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라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면? 신의 입장에서 우리가 하는 찬양은 조롱의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맛있는 것보다 구정물을 더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선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전이나 종교제사나 사제계급이 파탄나게 되니까요.
야훼는 어떨까요? 야훼는 자연신의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신의 면모가 더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에서 '짓고서 보기 좋았다.'라고 감정을 드러낸 부분이나,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십계명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야훼 또한 우상이 아닐까요?
성서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성서의 야훼는 인간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요구하고 실망하면서도 기다리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의 모든 부분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요구하나 인간은 항상 그 길에서 벗어납니다. 구약 전체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응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사야서처럼 '가장 경배가 왕성하고 제물이 풍족했던 시절'조차 주님은 히브리인들에게서 고개를 돌립니다.
큰 교회, 많은 제물, 크고 화려한 부흥회, 큰 소리의 찬양과 기도, 신이 기뻐하실 것 같은 모든 행동들. 그러나 여기에는 올바른 신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허망하며, 위선적입니다.
이제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신을 믿는다는 거죠. 앞에서 살펴보듯이 이러한 기복신앙은 미신이자 우상숭배입니다. 신을 '자신의 복을 들어주는 신'으로 필요에 의해 만들고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 또한 이러한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조차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신'으로서 하나님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금은보화도, 세상의 영광도 다 필요 없으니 하나님만을 원한다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가슴속에 그리는 하나님의 모습,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국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선택의 믿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금은보화도 주지 않아.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주지도 않아. 죽은 뒤에 천국으로 보내주지도 않아. 그러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뭐지?" 그러게 말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겁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이 이유 아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은 자. 그 자가 바로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주제에서 벗어나니 할애하도록 하죠.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죠. 네. 교회라는 장소에서 미쳐 날뛰는 장면 말입니다. 혹은 지하철에서 고성방가하며 전도라는 이름의 공해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니 신도 나에게 보답을 주세요.'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명백하게 말하건대 이들은 우상숭배자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위에서 다 말했습니다.
오해하면 안 될 것입니다만, 저는 그러한 행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으리으리한 교회, 화려한 부흥회, 부끄러움을 모르는 희생정신에 주님이 없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만일 주님이 그 행동 안에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 믿습니다.
모든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감동으로 행해진다는 말은, 그것이 필요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 외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행해지는 무언가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십자가의 보혈, 그 복음은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이것입니다. '어떤 신이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여기까지만이 진정한 복음이자 이것만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니 너는 믿어야 한다.'는 복음도 아니고 전도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결코 강요나 고성방가가 아닌 상대방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건내야 할 부끄러운 물건입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불완전함도 극복하지 못해서 어떤 신이 자신을 바쳐 죽었다고 합니다. 이게 자랑할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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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뒤늦게 생각이 나서 조금 추가합니다. 진정한 신은 우리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재물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사람들의 믿음이 없으면 사라지는 신이 있다고 합시다. 이 신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에 의존하는 자입니다. 이런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습니까?
또한 재물을 바칠 것을 원한다는 것은 그 신에게 재물이 없거나 혹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진정한 신에게 한낱 재물이 부족하거나 혹은 필요할 수 있겠습니까? 재물로 믿음의 크기를 측량한다는 소리도 멍멍이가 짓는 소리입니다. 신이라는 자가 자기 신도들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여 재물을 많이 받아야 비로소 그 믿음을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진심으로 말하는데, 믿음을 강요하거나 혹은 재물을 바치는 것이 신앙의 증거가 된다는 사람을 보시면, 혹은 자기 자신이 그렇다면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