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생입니다. 휴학을 길게 했다가 이번 학기에 복학을 했습니다. 주변 분들께서 휴학한 이유나 휴학하는 동안에 어떻게 지냈는지 많이 물어 보셨습니다. 그냥 놀았어요 식으로 웃고 넘겼지만, 휴학 전에 우울증이 생겼고, 대인기피 증상이 있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겪은 추행과 강간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 먼저 겪은 건 사촌오빠가 한 수차례의 강간입니다. 당시 사촌은 17살이었고, 당시의 저는 7살이었습니다. 그 때 왜 가만히 있었냐, 왜 어른들한테 알리지 않았냐 라고 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말을 하면 엄마와 사촌의 엄마인 이모, 그리고 엄마 쪽 조카인 사촌이라 부모님의 사이가 혹시나 안 좋아지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만 모르는 척 지내면 시간이 갈수록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얼마 전까지도 사촌의 일을 가족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지나고나면 어릴 때 있었던 특별한 일 정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성인이 된 저의 피해의식은 전보다 심해졌습니다. 첫 경험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한다는 생각이나, 첫 경험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사촌오빠 이후에도 다른 사람의 추행이 있었고, 저는 그 때 몸이 굳는 느낌이 들고 무서워서 눈물만 나고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사촌오빠 때와 비슷한 일이 또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상대가 저에게 하는 행동이 성적인 행동이라는 분별이 생긴 최근의 일이었기에 충격이 좀 더 크게 왔던 것 같습니다. 괜찮아진 줄 알았던 어렸을 때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꿈에서 나타나고, 부모님께 사촌 일 말고 이 일은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알게 되면 속상해하실 것 같아 고민했지만 계속 숨길 자신이 없었고 가볍게 말해보려고 했지만 너무 무서웠다고 울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었고, 고소를 접수하고 새 학기가 시작됐습니다. 경찰서에 다녀온 지 한 달 쯤 지나자 검찰에 서 연락이 왔고 진술하는 동안 저는 신고를 왜 늦게 했는가, 왜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나, 상대방은 서로 좋아서 했다고 하는데 당신도 즐겨놓고 이제 와서 신고하는 것 아니냐. 와 같은 말들을 들었습니다. 타지에서 학교 다니면서 학기 중에 경찰서에 불려가 억울한 이야기를 듣고 다니는 딸이 걱정된 엄마는 마침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학교 선배인 조카가 있었고, 경찰서 '혼자 가기 힘들면 사촌오빠한테 같이 가 달라고 해라 챙겨달라고 말해놓을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7살 때 저를 강간한 그 사촌입니다. 대학을 와보니 같은 대학 같은 과 선배이고 같은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모르고 하신 말이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은 그 인간이 나를 제일 처음 강간한 놈이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 때도 말하지 못했고, 나중에 엄마가 그 사촌에게 우리 잘난 아들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는 그 이상 참기가 힘들어서 말하게 됐습니다.
엄마가 알면 집안 어른들 사이가 다 안 좋아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엄마가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 말하지 못했던 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언제 그랬냐고 되물으시더니 그렇게 어릴 때 일이면 이제 좀 괜찮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빠 쪽 조카였다면 당장 난리를 쳤을텐데 엄마 쪽이니까 아빠한테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겠다.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라. 라고 덧붙였습니다.
서운했습니다. 아빠한테는 미안하면서 나한텐 미안하지가 않은지, 동시에 엄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속상하게 해서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알고도 이모한테 한마디 하지 않고 잘 지내시는 걸 보면서 엄마한테는 이모와의 관계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고, 서운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고나니 여태 숨겼던 게 부질없다 생각됐고, 피해의식이 심할 때는 그 사촌을 생각만 해도 무섭고 두려웠는데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때 왜 그랬냐고. 어떤 말을 할 지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앞의 추행건 때문에 알게 된 성폭력 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심리상담을 받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된 건 저는 몸만 성인이 됐고 한동안 성폭력과 성관계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추행 당시가 무서웠다고 말하지만 아무 저항을 안 했던 걸 보면 사실은 나 스스로가 그 검찰 사람 말처럼 즐겼던 게 아닐까, 아 7살 때 나도 몰랐던 게 아니라 다 알면서 받아들인 건가? 알고 보면 내가 먼저 그럴 여지를 줬거나, 내가 하고 싶어서 해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니가 따라간 게 잘못이다 왜 사촌이랑 그 때 한 방에 있었냐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한 일을 계속해서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걸 알게 됐고, 1년 정도 상담치료를 계속 해온 이제는 강간의 원인은 강간범이며 강간은 강간범의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그 사촌의 일을 제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촌도 알고, 사촌의 엄마인 이모도 알고, 사촌의 동생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엄마와 저의 동생도 알고 있습니다. 사촌이 저의 엄마에게 저 몰래 찾아와 용서를 구했다고 하고, 그 이후에 자신의 모친에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게 한달 쯤 전의 일이었다고 하니, 추석 전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던, 외가가 불편해 참석하지 않은 저만 빼고 모두가 사이 좋게 즐겁게 명절을 보낸 이후에 제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대학 얘기를 다시 하자면 저는 휴학 중에 서울에서 지내면서 치료도 받고, 남들이 한다는 스펙은 많이 준비 못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대인기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이번 학기에 복학을 했습니다. 그 사촌은 서울에 취직 할 거라고 했던 터라 마주칠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랬는데, 그 사촌이 아직 같은 학교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박사과정이 끝나고 조교로 일하게 됐다고요. 8개월이 넘었다는 데 저한테 알려주는 가족이 없어서 저만 좀 늦게 알았습니다. 설마하고 엄마한테 물으니 누구한테 들었냐 이제 과가 다르니 마주칠 일 없을거다 만나도 니가 모르는 척 해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촌이 다음달에 결혼하는데 결혼식은 가야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저는 다시 집밖에 나가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한 동네 살고 같은 학교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아는 사람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뒤를 돌아봐야 하는데 혹시나 마주칠까 하는 생각만 들고 동네에서 비슷한 사람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듭니다. 최근에 이모와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일을 아는 척 할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처음에는 모른 척 하다가 나중에는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이런 일이 테레비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지 우리집에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라고 했습니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에는 저는 왜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일을 당할까요 왜 태어났지 싶습니다 살기 싫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라고 했지만, 지금은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촌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 때 나한테 왜 그랬냐 물었더니, 처음에는 모른 척 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도 성인이 되어서 알겠지만 나는 그 때 욕구를 참지 못했고 성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랬다 했습니다.
처벌을 할 수는 없을까 알아봤습니다. 친족에 의한 아동강간죄 처벌에 대해서 알아봤고, 지금은 미성년강간에 대한 처우가 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여성의 전화와 피해자 지원센터를 통해서 저는 일을 당했던 시기로부터 1년 내에 신고를 했었어야 처벌이 가능하다 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당시는 공소시효가 1년이었다고요. 7살에 강간을 당했으면 8살이 지나기 전에 신고를 했어야 일단 신고가 접수되는 게 당시의 법이고, 지금 형사로 할 수 있는 처벌은 없으며 원한다면 민사로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는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돈 받아서 눈앞에서 불태울 용의는 있습니다만, 고소과정은 그전에 한 번 해보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드는 품에 비해서 얻는 게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전에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사촌은 나랑 만나서 대화로 오해를 풀고 명절이면 친척들과 웃으면서 모이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걸 더럽고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건지, 다 알고도 서로 모른 척 하고 명절 잘 보내시는 우리집 어른들이 정상이고 그게 서운한 내가 너무 어리고 나약한건지. 나는 집밖에 나서기가 힘든데 박사 마치고 조교에 곧 결혼할 사촌 생각하면 쟤는 참 멀쩡하게 잘 산다 싶으면서 사람들이 쟤가 그랬던 걸 알아도 우리 가족들 처럼 다 서로 모르는 척 잘 지내 줄 지 궁금해졌습니다. 알리고 싶습니다. 이 일이 알려져서 당사자가 사회생활에 피해를 보거나 결혼이 파탄나기라도 한다면 더욱이 좋겠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와서 잘 사는 사람 신세를 왜 망치려고 드냐고 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부산에 있는 부경대에 다닙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