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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

스푸트니크 |2015.11.15 18:06
조회 17,107 |추천 54

우연히 이 채널에 들어와서 게시글 중에 제 닉네임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에 좀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느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절 기다린다는 글을 보고 오랜만에 글을 써볼까 합니다.

 

과거 이야기 말고 최근 이야기를 해볼게요.

 

 

 

몇 주 전에? 부산가기 전에, 친구 녀석 하나가 주말에 만나자길래 약속을 잡았죠. 전 둘만 보는 줄 알았는데 친한 동생이라며 여자분을 한명 데려왔더군요. 그래서 셋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게 됐죠. 알고보니, 친구녀석이 저와 그 여자분을 이어주려고 자리를 만든 것이더군요.

 

그래서인지 친구놈은 은근슬쩍 술자리에서 빠지고 여자분과 저 둘이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죠. 나이가 저보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더라고요. 여전히 이성에게는 낯을 꽤나 가리는 성격인데도 여성분이 어색하지 않게 말도 많이 해 주시고 리액션도 잘 해주셔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었죠.

 

 

그럼에도 저는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된 상태라 여자를 만날 마음이 없었기에 조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전화번호를 먼저 물으시길래 가르쳐드렸죠. 사실 제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안부인사를 하자 싶어서 헤어진 그 날은 연락하지 않았는데 밤 늦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평일 저녁에 식사 한 번 하자구요.

 

조금 망설였지만, 용기내서 물어보신건데 카톡으로 거절하기엔 너무 매너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소개해준 친구한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만나기로 했죠. 만나서 밥 먹고 한강에서 맥주도 한 캔 하면서 대화를 좀 나눴죠. 말도 조근조근 하시고 성격이 상냥해서 함께 있는 동안 저도 기분 좋더라고요. 대화도 잘 통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 두세 번을 더 만났죠. 비록 두세 번 다 여자분이 먼저 만나자고 하셨지만 저도 싫지는 않더라고요.

 

 

그렇게 다섯 번째 만났을 즈음에 바를 가게 됐는데, 사실은 제 친구한테 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 한 번 본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기억에 없었거든요. 친구한테 제 얘기도 많이 듣고, 그래서 꼭 다시 보고 싶었다고. 전 기억을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죠. 괜찮다고 웃으시는데 유난히 예뻐보이더군요.

 

그러면서 자기 어떠냐고 수줍게 물으시는데, 제가 좀 많이 당황했죠. 물론 그저 남녀 간에 친구하자고 이런 식으로 만나지는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었거든요.

 

 

그래서 전,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데 아직 온전히 정리를 못 해서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는 게 섣부른 것 같다고. 다른 사람 마음에 품고 누군가를 사귀는 건 너무 못할 짓인 것 같다고,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질질 끌어서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렸죠.

 

눈치채고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못 잊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고. 다시 그 여자(W를 여자라고 생각하고 계셔서 그렇게 물으셨겠죠)를 만나고 싶으신거냐고 묻길래 그건 아니라고 했죠. 앞으로 만날 일 없고, 그 사람은 곧 결혼한다고.

 

 

조금 성급한 건 알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저와의 사이가 더 흐지부지 될 것 같다고, 친구도, 친한 오빠동생도 아닌 사이가 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괜찮다면 자기 만나면서 마음 정리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여자분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한참을 머뭇거렸죠. 과연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내가 다른 사람을 아직 못 잊고 있다고 말했는데도 만나보자고, 자기를 만나면서 정리하면 어떻겠느냐 물으니 솔직히 흔들리더군요. 저도 그 여자분, 싫지 않았거든요. 아니, 함께 있는 시간은 즐겁고 조금 설레고 그랬던 건 사실이죠. 다만 그게 좋아하는 감정 그리고 또 사랑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니었던 거죠.

 

 

섣불리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좀 더 신중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괜히 상처주고 싶지 않다고요.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세요, 라면서 웃으시는데 귀엽더라고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꾸밈없이 표현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요.

 

 

그 뒤로도 몇 번 더 만났죠. 제 선택에 부담 줄 생각 없다고, 그냥 편하게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보고 싶어서 그런거라고. 만나면서 저도 조금씩 평범하게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사실 처음 만나고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꽤나 빨리 가까워져서 잘 맞는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며칠 전에, 초인종이 울리더라고요.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하며 인터폰 화면을 보니, W가 있더군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 했죠.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곤 애써 담담한 척, 너가 어쩐 일이냐며 문을 열어줬죠. 평일이었는데 W는 이미 술에 취해 있더라고요.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을 내밀면서 같이 한 잔 하자더군요.

 

 

거실 테이블에서 술상을 펴고 둘 다 말없이 술잔만 들이켰죠.

 

 

왜 왔냐고 안 물어봐?, 라고 하길래

왜 왔는데. 라고 물었죠.

 

물어보라고 해놓고선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더라고요. 저도 딱히 W가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어요. 그저 W가 우리 집으로 왔다는 사실이 중요했죠. 잘 왔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진 않더라고요.

 

결혼날짜는 잡혔냐 물을까말까 고민하다가, 무의미한 질문에 저만 더 괴로울 것 같아서 그 질문도 삼켰죠. 그러니 딱히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 때, 제가 부산갔을 때의 이야기를 썼던 게 기억나더라고요. W가 날 알게 된 걸 후회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더군요. 제가 부산에서의 이야기를 적지 않았었다면 W와 그런 대화가 오고갔었던 것도 잊고 있었겠지만.

 

수 년 전에 듣지 못했던 대답이니, 지금이라도 들어보려고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죠.

 

 

너 예전에 날 알게 된 거 후회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 나?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죠. 근데 W가 덧붙이더라고요.

기억은 안 나는데, 후회하는 건 맞아.

 

 

예나 지금이나 W에게 저라는 존재는, 참 돌리고 싶은 과거의 한 조각인가보다 싶었죠. 부산에서 진실게임 할 때 너가 그렇게 말했었다고 설명해줬죠. 기억이 나는지 안 나는지 별다른 표정변화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왜 후회하느냐고 물어봤죠.

 

둘 다 술을 마시면서 눈도 안 쳐다보고 술잔만 보면서 마시고 있었는데, 그 때 W의 시선이 저에게 향하는 게 느껴지길래 저도 고개를 들어서 W를 쳐다봤죠. 몇 초간 저를 빤히 쳐다보더니 W가 애매하게 대답하더라고요.

 

 

난 니가 신기하다. 후회를 안 한다는 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우리가 부산에서 했던 그 진실게임? 그리고 모래사장에서 걸으며 나눴던 몇 마디의 말들이 떠오른 것 같더라고요.

 

 

나는 너 때문에 인생이 엉망이 됐는데.

라고 읊조리더니 술에 취했는지 거실 테이블에 엎드리더라고요.

한 쪽 팔을 쭉 펴고 엎드렸는데 제 가까이 뻗어져있는 W 손이 보이길래 무의식중에 제가 W의 손을 잡아버렸죠. W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자마자 W가 제 손을 홱 뿌리치더라고요. 자기를 좀 가만 놔두라고요.

 

전 좀 웃겼죠. 제 발로 우리 집에 찾아온 게 누군데, 자길 가만 놔두라니. 오히려 들쑤시고 엉망으로 만드는 건 W, 네 쪽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렇게 몇 십분, 멍하니 엎드려 있는 W를 보고 있었죠. W가 잠이 든 것 같아서 침대로 옮겨줬죠. 아무래도 다음 날 바로 출근을 하려면 옷이 구겨지면 안 될 것 같아서, W 옷을 갈아입히려고 단추를 푸는데 다시 또 W가 제 손을 신경질적으로 치우더라고요.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너 재수 없다고 진짜 잔인하다고, 잠결에 하는 말인지 취중진담인지 그런 소릴 하더군요.

 

 

잠들어버린 W 옆에 앉아서,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린 건 네가 아니라 나인 것 같다고 혼자 중얼거렸죠. 자고 있는 W의 얼굴을 보는데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묵혀뒀던 감정이 터져 나오다 못해 줄줄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죠. W의 얼굴이 만지고 싶어서 자꾸 W의 감은 눈 위로 손을 흔들어 정말 자고 있는지를 확인했죠. 겨우 얼굴 만지는 건데도 들킬까봐 두렵고 망설여지더라고요.

 

술에 취해서 깊게 잠든 W의 숨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안심이 돼서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만지고 W는 듣지 못할 고백을 하며 주절주절 떠들어댔죠. 이런 저런 이야기 떠들다가,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는 말 한 적 있나? 라며 혼자 묻고,

없는 것 같네, 혼자 답하고.

 

그리고 좋아한다, 말하려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말이라고, W는 듣지도 못하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군요. 차마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왠지 말하는 순간 지금껏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만들어가고 있는 도미노가 한 번에 무너져버릴 것만 같더라고요.

 

 

그래서 말 대신 제 손길로 마음을 표현했죠. W의 손을 주물럭거리고, 볼도 잡아당겨보고 귀도 한번 만져보고 입술도 만져보고 그랬죠. 자고 있는 W를 보면서, 속눈썹이 길다는 게 이런건가 보네, 생각했죠. 살면서 한번도 누구 속눈썹에 관심 가져본 적도 없어서 속눈썹이 길거나 짧거나 이런 게 뭔지도 몰랐는데 W를 보니, 알겠더군요. 속눈썹이 길어서 그런지 자는 모습이 참 예쁘네, 싶더라고요.

 

 

자고 있는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본 적도 없을뿐더러, W의 얼굴을 마음 놓고 쳐다본 적도 거의 없었는데 며칠 전에는 정말 마음껏 W의 얼굴을 감상했죠.

 

예쁘네. 행복하다. 참 좋네, W. 슬프다.

 

이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곤 언제 잠들었는지 W 옆에서 엎드려 잠든 것 같은데, 6시 좀 넘어서 눈 뜨니 W는 없더라고요. 쪽지 한 장 안 남기고 가버렸더라고요. 씁쓸하고 허전하고. 참 W답다, 싶었죠. 또 날 흔들어버리고 내 마음만 들쑤셔놓고 넌 훅 사라졌네, 싶더군요.

 

 

 

그리고 하루 이틀, 그 여자분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죠. W가 결혼한다는 글을 썼을 때, W의 미래 배우자한테 너무 못할 짓 하는 거 아니냐는 댓글이 많았었는데, 그 글들이 기억나더라고요. 그 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 내 상황이 됐을 때도 똑같이 하면 난 진짜 몹쓸 인간이다 싶었죠.

 

나한테 마음 없는 남자가 품고 있는 상대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걸 알아도 똑같을 거 같냐, 뭐 이런 댓글이 떠올랐죠.

 

 

자기를 만나면서 마음 정리하라고 했던 그 여자분도, 제가 좋아하고 있었던 사람이 남자였던 걸 알았다면 생각이 달랐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숨기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더군요. 진솔하게 터놓고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 만났죠. 그러니까 엊그제죠. 칵테일 한잔 하면서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죠. 제가 할 말이 좋은 말이 아니란 걸 눈치채셨는지 표정이 어둡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였고, 그 사람이 곧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며칠 전에 만나게 됐고, 만나고 보니 내가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됐단 걸 알았고, 이걸 알면서도 우리가 계속 만나는 게 너무 못할 짓 하는 것 같고 결국 상처만 주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정말 죄송하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왠지 모를 죄책감에 마음이 너무 무겁더라고요. 진작 정리했어야 할 관계인데, 며칠간의 그 설레고 폭신했던 감정들이 좋아서 제 판단력이 흐려졌던 거죠.

 

 

자연히 W 생각이 났죠.

정말 너는 끝까지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구나. 언제까지 훼방 놓을래, 싶더군요.

어쩌면 이번에, 잊은 척 W를 가슴에 묻어두고 새로운 시작을 해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했던 약간의 기대감이 무색하게, W는 절 흔들고 다시 절 끌어내렸죠. 진짜 잔인한 건 내가 아니라 W가 아닌가.

너는, 내가 절대 그저 행복하게 살도록 두고 보지 않으려는 존재 같다, 싶었죠.

 

뭐 그럼에도, W를 알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변함없지만요.

 

 

 

제 말이 끝나고 한 동안 아무 말 없으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그래도 제가 괜찮다고 하면,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거예요?

라고 하시더라고요.

 

여기에서 괜찮다고하면, 이란 뜻은, 내가 남자를 좋아하고 있음에도 사귀자는 건가? 싶더라고요.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니면 지금처럼 그저 지인으로 잘 지내자, 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싶었죠.

 

 

그래서 네? 라고 되물었죠.

저보고, OO씨는 그 친구분이랑 다시 사귀고 싶은 거예요? 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사귄 적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다고 말씀드렸죠. 그럼 된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전 또 멍청하게 네? 하고 되물었죠. 제 사고로는 도통 여자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요.

 

마음 정리 안 된 거 알고 있고, 그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크게 상관없다고 하시더군요. 자긴 여전히 대답 기다리겠다고. 그게 엊그제 이야기죠.

 

 

 

근 한 달 동안 꽤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네요. 어쨌거나 저는 이렇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제 글이 뭐라고, 기다려주신다니 참 감사하기도 하고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네요. 자주 쓰지 못해서. 그리고 달가운 내용이 아니라 기다릴 만큼의 즐거운 글이 아닌데, 싶어서 움츠러드는 것도 사실이고요.

 

 

언젠가, 앞으로 더 이상 글을 못 쓸 것 같은 날이 올 때는 마지막 인사는 할게요. 자주 쓰지는 못 할 수도 있으니 괜히 기다리며 힘 빼지는 마시고요. 그럼에도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수54
반대수3
베플마음|2015.11.15 19:05
되게 기다렸어요 다음번에는 스푸트니크님에게 꼭 좋은소식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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