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안 와서 오랜만에 글을 써볼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오랜만이 아니네요. 며칠 전 새벽에 술김에 글을 올렸었죠. 술주정 하는 거 엄청 추하지 않나요. 제가 술 취해서 하소연 하는 거,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정말 딱 싫어하는데 제가 그랬네요.
W가 찾아오고 나서 며칠 간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냈었죠. 여자분께 몇 번 연락이 왔는데 제가 번번이 거절을 했어요.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예의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사실 제 마음 속 어느 깊은 곳에서, 이런 내 모든 과거와 품고 있는 생각들을 알게 되더라도 날 받아주는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안 지 오래되지도 않았던 그 여자분께 주절주절 털어놨던 거겠죠. 일말의 기대감을 미약하게나마 품고 있긴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여성분의 긍정적인 대답에 오히려 제가 당황해버려선 한 발 물러나 버리고 말았네요.
왠지 그 여자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묵묵히 들어주실 것 같았고, 비밀도 지켜주실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커밍아웃을 했던 건 아닙니다. 전 아직 제가 게이라고 단정 짓지도 않았고. 제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감정이지만 그 여성분께 담담히 풀어내니 이해해주시는 것 같더군요. 이해뿐 아니라 오히려 상관없다고 해주셨죠. 근데 제가 바보 같아서, 또 망설이고 있네요.
사실 W가 저희집에 찾아온 이후로 여성분은 제 안중에 없었어요. 죄책감이 싫어서 털어놨던 거지만 그 이후로 제 신경은 온통 W에게 가있었죠.
나름의 용기를 낸 건가, 싶더라고요. 얼마나 망설이다가 우리집에 왔을까. 용기가 안 나서 술을 퍼마시고 온건 아닌가. 얼마나 고민하다가 벨을 눌렀을까. 혼자 이런 생각을 했었죠.
올 추석 즈음에, 마지막으로 키스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더 이상은 W를 보지도 않을 것처럼 비장하게 적어놓고서는 W가 제 발로 먼저 우리집에 찾아와줬다는 사실만으로 제 확고했던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결혼하겠다는 W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했던 확신이요.
꼭 체한 듯이 제 가슴속에 답답한 뭔가가 걸려있는 것 같았죠. W와 대화를 한다고 해서 체증이 내려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가 용기를 내줬으니, 나도 용기를 내봐야하지 않나 싶었죠.
술 한 잔 하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다보면 풀리지 않을 듯이 엉켜있던 실타래도 조금씩 풀리지 않을까 싶었죠. 아니, 사실 엉켜있는 것도 아니죠. 마지막 남은 하나의 퍼즐조각을 어느 누구도 먼저 끼워넣을 용기가 없을 뿐인 거죠.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맨 정신으론 차마 연락을 못 하겠더라고요. 동료들끼리 간단하게 한잔 하고, 혼자 2차로 술을 퍼마시고 W의 집으로 갔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전화도 받지 않더군요. 집 앞이라고 문자를 남겼는데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죠. 그 날은, W가 집에 없는 건가, 차라리 잘 됐다며 안심했어요. 술은 마셨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떨고 있었거든요.
근데 다음날이 되도, 제 부재중 전화 기록을 봤을 텐데, 문자도 봤을 텐데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저와 연락하고 싶지 않은가보다 싶더라고요. 그냥 관두자며 체념하려는데, 목이 매이 듯 죄어오는 답답함이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여지껏 그냥 삼키고 삼켰던 말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해보려는데, 또 억지로 삼키려니 이번엔 쉽게 넘어가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며칠 전 또 찾아갔죠.
문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W의 집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전 확신했죠, W가 집 안에 있다는 걸. 그냥 느낌이 그랬어요. 다만 W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거였죠.
아마도, 술김에 우리 집에 찾아 왔던 그 다음 날, W는 혼자서 엄청나게 자책하고 후회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나는 그런 W의 행동이 무언가의 첫 단추라고 생각했지만, W에게 그 날은 실수고 돌리고 싶은 날이 아닌가, 싶네요.
속으로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제 멋대로인 W의 행동에 열도 받고,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제가 비참하기도 해서 폰으로 글을 썼던 건데, 다음 날 진짜 창피해하며 지웠죠. 너무 늦게 발견했더라고요.
글은 지웠지만 남겨주신 댓글은 하나하나 꼼꼼히 잘 읽었습니다. 글을 맘대로 지워버린 건 미안해요.
별 다른 이야기가 없네요. 저와 W는 진행형이 아니라서.
그냥 옛날 이야기 써볼게요.
스무살 때, 같이 부산 여행 갔던 무리 중 하나가 한 학기만 하고 군대를 가는 녀석이 있었어요. 그래서 여름방학 때 엄청 무리지어 다니면서 놀았었죠. 부산 여행도 그 때 갔던 거고.
같은 무리가 전부 매번 모이는 건 아니었고, 둘셋씩, 셋넷씩 보고 그랬는데 언젠가 넷이 만난 적이 있었죠. 저와 W와, 입대를 앞둔 친구와 또 다른 친구. 그 때 우리 넷은 다 여자친구가 없었고요.
클럽에 가봤냐는 얘기가 나왔죠. 한 명 빼곤 아무도 안 가봤더라고요. 그래서 그 한명이 오늘 가보자며 나머지를 부추겼죠. 저도 클럽이 괜히 무섭지만(?) 궁금하기도 했어요. 진짜 부비부비 그런 건 하는 건지, 정말 그렇게 예쁘고 쭉쭉빵빵한 여자들이 많은 건지 뭐 등등?
그래서 클럽엘 갔는데, 제가 처음 간 클럽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엄청 퇴폐적인 곳이었어요. 모든 클럽이 그렇게 노는 게 전혀 아닌데, 전 전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클럽이 그런 곳인 줄 알았어요. 대부분의 클럽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상상하시고 또 가보신 그런 곳일 텐데 제가 갔던 곳은 좀 많이 퇴폐적인 클럽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곳인지 자세히 설명하다가 다 지웠어요. 이 게시판은 19세가 아니라서. 어쨌든 거리낌 없이 서로 터치를 하고 스킨십을 하는, 그런 이상한 클럽이었어요. 클럽을 안 가봤던 저로선 엄청 당황했지만, 또 당황한 티를 내면 촌스러울 것 같은 거예요. 클럽 처음 와본 티내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죠. 넷이 들어갔지만 클럽에 들어가서는 그냥 다 뿔뿔이 흩어져 있었어요. 남자 넷이 모여 있는 게 더 촌스러운 느낌이라서.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하네요.
전 클럽에서 놀 줄도 모르고 춤도 출 줄 몰라서 바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어요. 담배냄새도 심하고 공기도 안 좋고, 신기하긴 했지만 뭐 그다지 재밌는 줄은 모르겠더라고요. 스탠딩 바에서 술 마시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자분이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거시더라고요. 엄청 섹시한 분이었어요. 키도 크고, 누가 봐도 예쁘고 화려하게 생긴.
뭐, 대화 내용은 생각 안 나지만, 저보다 연상이었고 나이를 밝히자마자 바로 말을 놓으시더군요. 제가 전혀 귀여운 스타일이 아닌데 귀엽다면서 같이 춤추러 나가볼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얼떨결에 따라 나갔죠.
제가 춤도 출 줄 모르고 그래서 더더욱 갈 곳 잃은 두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정쩡하게 있으니까 자기 허리에 제 손을 갖다 대더라고요. 그 클럽 자체가 그런 분위기였어요. 분명 처음 본 것 같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포옹하고, 키스하면서 춤추고. 허리에 손 두르는 건 기본이고 더 한 곳도 만지고 뭐 그런 곳이어서 전 그게 원래 클럽 문화인 줄 알았었죠.
보이지 않았겠지만 얼굴은 시뻘개져서는, 혼자 긴장해서 침 꼴깍꼴깍 삼켜댔죠. 고작 스무살의 남자였지만 그 당시의 전 미숙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죠. 초짜 티를 내고 싶지도 않아서 능숙한 척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아마 다 티 났을 것 같지만.
간간이 귓속말로 대화를 하면서 춤을 춘건지 어쨌든 몸을 움직거렸죠. 그렇게 한동안 있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손짓으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했죠.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손짓을 보니 갔다가 여기로 오라, 뭐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길래 알겠다고 하고 전 잠시 자리를 옮겼죠.
클럽이 엄청 덥더라고요. 그래서 에어컨 앞에서 더위를 식히며 몇 분 있다가 다시 아까 그 자리에 향했죠. 내가 있던 그 자리에 있는 W를 보았죠. 한 네다섯 걸음 앞에 W가 어떤 여자랑 같이 춤을 추고 있는 건지 어쨌든 붙어 있더군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함께 있던 여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W는 키가 커서 잘 보이더라고요.
W를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지더군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W를 보고 있는데 W도 저를 발견한 것 같았죠. 우뚝 서서 W를 보고 있는 저는 꽤나 클럽과는 이질적이게 느껴졌는데, 절 보고 있는 W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클럽에 잘 녹아있는 것 같더라고요. W와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들었는데, W가 키스를 하더라고요.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전 순간 나를 못 봤던 건가? 눈이 마주친 게 내 착각이었나, 했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키스를 하면서 다시 저를 보더라고요. 우리는 똑똑히 눈이 마주쳤죠.
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모르는 여자와 키스를 하더라고요. 전 몇 초간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제 눈 앞에서 키스하는 W를 보고 있었죠. 그러다 정신이 들어서 뒤돌아 도망치듯 클럽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곧장 집으로 갔어요. 집으로 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리더군요. 그 때는 확실히 느꼈죠. 나 보라고 저러는 거다.
그냥 클럽문화에 젖어서? 그 흥분을 못 이겨서? 술에 취해서?
절대 그럴 리가 없죠. 제가 W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이유들로는, 생전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키스한다는 게 설명되지가 않더라고요. 그냥 나 엿 먹이려고,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부산 여행을 다녀온 뒤라, 예전보다는 조금 내 진심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알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내 말,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모래사장을 거닐었던 시간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단순히 호기심에서 키스했던 게 아니란 걸 은연중에 말해주고 있던 거 아니었나? 나만 그렇게 느꼈나..
하긴.
키스하고 난 뒤에 W는 다른 여자를 사귀었고. 나 역시도 수능 끝나고 고백하고 싶었던 여자애가 있었고. 그러고 보면 우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다른 이성이 존재했었던 건데, 고작 내 눈앞에서 키스 하는 걸 봤다는 사실 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을 수 있나.. 싶더군요.
집에 오자마자 폰 꺼놓고 잤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같이 클럽 갔던 친구들이 전화를 몇 통이나 남겨놨더라고요. 제가 말도 없이 사라져서. 근데 W한테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더군요. 놀랍지도 않지만.
벌써 새벽 네시네요. 근데 왜 잠이 안 올까요. 고2 때 이야기 하나 더 쓰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봐야겠습니다.
체육대회 이후 언젠가 반에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당시는 제가 살짝살짝 W에게 터치했을 그 즈음이었어요. 키스마크 남긴답시고 심하게 굴기 전.
저랑 W는 워낙 친했을 때라 당연히 옆에 앉아서 영화를 봤었죠.
잔잔하고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던 건 기억나는데 지금은 내용도 제목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런 영화를 보고 있었죠. 감동적인 이야긴 건 알겠지만 제 취향이 아니라 좀 지겨워하고 있었죠. 그래서 영화에 오로지 집중하지 못하고 잡생각을 하고 있었죠.
체육대회 때가 떠올라 영화보다 말고 W를 쳐다봤어요. 제 시선이 느껴질 법도 한데 꿋꿋이 영화를 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영화를 보다가 다시 W를 쳐다봤죠. 절 봐주지 않길래 의자에서 등을 떼고 살짝 W 쪽으로 몸을 기울였죠. 그 정도면 W의 시야에 제가 들어올텐데도 무시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용히 야, 하고 불렀죠. 그제서야 힐끗 절 쳐다보더군요. 제가 뭐라 시덥잖은 말을 걸었는데 대충 대답해주고는 다시 앞을 보더군요.
그래서 그냥 약 올릴 겸? 장난 칠 겸? 더 뚫어져라 W를 쳐다봤죠. 제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는지 고개를 돌려서 절 보더라고요.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제가 아마 나갈래, 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젓더라고요. 그러곤 다시 영화를 보더군요. 전 그때쯤엔 이미 영화엔 흥미가 떨어져있었어요. 그래도 억지로라도 보자 싶어서 영화를 보다가 도저히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다시 W를 쳐다봤죠. 그 땐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그냥 W를 보고 있었죠. 그러자 W가 저를 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제 고개를 돌리더라고요. 근데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W 손을 덥썩 잡아버렸죠.
이상하게, W도 손을 빼지 않더라고요. W의 오른손을 제 오른손이 겹치듯 잡고 있어서 자세가 어정쩡했죠. 제 왼쪽 허벅지 위에 W의 손을 잡은 채 제 손을 올려놨죠. 손 놓을 타이밍을 놓치니까 더 손을 못 놓겠더라고요.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점점 긴장을 하게 돼서 제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저 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봤죠.
얼마쯤 지났을까, W의 시선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W를 쳐다보면서 엄청 멋쩍게 손을 놨던 것 같아요. 니 손이 여자손 같아서, 라고 했는지 부드러워서, 라고 했는지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네요.
제가 쓰는 시덥잖은 글들 챙겨서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면서 조언이나 위로 해주셔서 매번 정말 감사합니다. 요새 엄청 춥죠. 얼마 전엔 첫 눈도 내리고. 감기 조심하시고 머지 않아 또 만나요.
* 아 그리고 항상이란 닉네임으로 저에게 써주신 글. 마음이 따뜻해지더라고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저를 걱정해주시고 또 위로해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