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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6)

리드미온 |2004.01.12 12:10
조회 21,947 |추천 0

"그러니까......아..... 미국에 가게 된 계기를 말을 안했군. 얘기가 좀 길어지겠다....."

 

민준의 얘기는 아무리 길어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안락한 의자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또 비어 있는 와인잔을 채우면서 해주는 얘기라면 얼마든지 듣고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다. 차라리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면 좋겠다. 혹은 되돌이표라도 찍혀 있어서 얘기가 끝난 후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더라도 처음 듣는 표정으로 맞장구도 쳐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십대 중반의 한 남자가 아무런 목표의식도 없이 살고 있었지.....아르바이트 시작할 때 말야...그때 우연찮게 아는 형이 2개월짜리라 복학생을 구한다고 해서..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어.....복학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지..."

 

그때 보았던 민준의 초라한 모습이 그런 내면의 생각때문이었을까...나는 여직원들이 '잘생겼다' '멋있다'라고 민준에 대해서 얘기할 때 혼자서만 '아냐...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 않아?'이런 가벼운 얘기로 무시하곤 했었다.

 

"그 때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데 정신이 확 들더라고.....네가 좋아서도 아니고, 시간 많아서도 아니다...도덕적 책임감..때문에 이러는 거다...제대로 일해라..."

 

내가 저렇게 말했던가?

말을 한 사람보단 들은 사람이 더 기억하는 게 많은 법인가보다.

그래, 내가 생각해봐도 멋있는 말 같았다.

분노도 열정의 다른 표현이라면 난 그때만 해도 분명 지금 보다 식지 않은 열정이 있었다. 놀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면 분노해서 불러다 놓고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 변화를 지켜보는 열정이라도 갖고 있었다.

한해가 지날 때마다 누군가 내 열정에 찬물을 한 트럭씩 끼얹고 있는 것처럼 식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놀고 있는 부장이 한 달에 한번 월급 때가 되었을 때 나보다 일도 덜하고 많이 받는 것 같아 약간 분노를 느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러드는 정도의 분노와 또 그만큼의 열정만 남이 있는 것만 같았다.

 

"정신이 확 들더라....그리고 나이 먹으면 아무도 주변에서 건드리지 않잖아. 그래서 그런지 자기 성격이 어떤지도 잘 모른 채 늙어가고...날 그 때 그렇게 건드려준 네가 고마왔다는 거지...."

 

그래서 민준이 변했던 건가? 내가 그렇게 따끔하게 말해서?

하지만 그 한 마디 때문에 3년 만에 호텔로 부르는 것은 아직도 이해가 안되었다.

 

"아냐, 그 때 난 네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이것도 자존심인가? 아님 겸손인가? 괜히 가만 있어도 될 것을 그런 말을 덧붙여서 배수진을 쳐두어야 하는 안심이 되는 이 기분은...오히려 그런 말이 더 자신을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아닌지...

 

"그 때부터 너 되게 멋있어 보였어...나란 놈이랑은 비교가 안되어 보였지...여자라도..내 인생의 모델이면 어떨까도 생각해봤어...어떤 모습때문에 너한테 반했는지 아니?"

 

가만....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아침에 민준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민준'과 나는 절대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것보단 '3년 전에 우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 의미 없던 3년 전의 관계마저도 열정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연인의 만남처럼 바꾸어 버리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때 같은 팀에 있어서 거의 2달을 매일 본 셈이니 마음만 먹으면 한 쪽에서 일방적인 관찰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다만 나의 무관심이 민준의 존재를 3년 동안 잊어버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미국 본사에서 왔을 때....너 프리젠테이션 했었잖아...영어로...."

민준이 말을 하니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날도 역시 스타킹 때문에 곤혹스러웠었다.

여자들의 직장생활은 항상 패션이 마지막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았다.

미국 본사에서 직원들이 온다고 해서 밤샘하면서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다 해놓고 아침에 정장을 입고 출근하려는데 도대체 맞는 색깔의 스타킹이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바지로 된 정장을 다시 찾아 입었다.

꼭 외부 행사를 준비하면 모든 업무 준비를 마치고 자신의 치장도 제대로 맞추어야만 비로소 일이 제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결심했지....미국 가야겠다....복학도 필요 없다..."

"그래서 결국 나 땜에 미국 갔다는 거야?"

 

그런데 3년 만에 이렇게 돌아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었다. 영화에서도 한 십 년 쯤 지나 이미 애도 낳아서 큰 후에야 돌아와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며 그 때 잡지 못한 아쉬움을 한맺히게 남기고 끝나는 것이 관례인데....

 

"그 때부터 내 인생은 행운의 여신이 나타난 것 같았지...랭귀지 스쿨 다니면서 쉽게 아르바이트도 구하고....몸은 고달펐지만 즐거웠어....그리고 미국 대학에 시험 봐서 붙었어.. 다시 1학년부터 시작이지만...다시 시작한 인생이라 생각하니 즐겁기만 했지...그러면서 막연히 언젠가 너 한번 만나야지 생각했었다..."

 

누구든 그렇게 인생에 자극을 주거나 혹은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가?

그렇다면?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멋있는 말...아니 내가 듣기에 듣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인생의 방향을 잡을 만큼 누군가에게 조언도 못들어본 것 같았다.

다들 시집가라는 것이 무슨 최대의 충고처럼 떠들 뿐이었다.

 

"그런데....12월 30일...그러니까 작년....며칠 전이지만 말야....라스베가스에서 잭팟을 터뜨렸어...."

잭팟?이라고?

순간 나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민준은 너무나 차분하게 말하고 있어서 되묻기조차 어색했다.

잭팟...이라면 나는 계산도 못하는 돈일 텐데....그럼.....벼락부자?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꿈꾼다는 '로또'의 주인공이란 말인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의 놀란 표정을 보더니

 

"하하하하....놀라지마...몇십 억은 아냐....50만불 짜리였어."

50만불이라...그러니까 1불에 1200원이라고 치면....역시 나는 숫자에 약해...계산이 안된다..

대략 6억쯤? 아니다..60억인가? 휴우..모르겠다.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돈..이라고 생각해두자...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돈을 가지고 날 만나러 왔다고?

이럴 때 영화라면 어떤 배경음악이 흘렀을까? 하이든의 놀람교향곡? 아님 베토벤의 운명?

분명 발라드의 우아함은 아니다. 극도의 혼란과 긴장감이 팽배한 이 상황....

 

"어차피 평생 먹고 살 돈은 못되고, 내가 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지."

 

하느님.....제발....꿈이라면 깨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꿈이라면 조금만 더 있다가 깨게 해주세요~~~

절 이대로 여기서 깨우면 저도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에 덧붙인 '신은 진짜 죽었다'라고 2편을 써서 절대 무신론자의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전에 그런 말 했었어. '돈이 많으면 주말에 런던 같은데 가서 뮤지컬 보고 오고 그랬음 좋겠다'고...그저 여행에 한맺힌 사람처럼 구질구질하게 몇 달씩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세상 모든 곳이 언제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면서 말야."

 

내가 민준과 함께 있을 때 그런 말을 했었나 보다. 그런 생각은 자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로 돈이 많다면 요즘 같은 세상에 인터넷으로 예약이 되니까 보고 싶은 콘서트나 뮤지컬이 있으면 주말에 한국의 콘서트를 보러가는 것처럼 가뿐하게 말이다.

 

대학 때 1달간 유럽 배낭 여행을 다니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돈은 없고 많이 봐야 하고....그런 강박관념에 중간에 집에 가고 싶어도 1달을 버텨야 하는 그런 인내심을 경험하면서 돈이 많으면 그냥 짬짬히 시간 내서 여러 번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런던에서 난생 처음 본 '오페라의 유령'이란 뮤지컬에 반해서...

돈이 많으면 주말에 런던의 뮤지컬 예약해서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로 다녀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넌 별로 나에 대한 기억이 없지?"

여전히 민준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런 개념도 나한테는 새로웠어. 세상을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그래서 내가 물었었지 어떤 뮤지컬이 보고 싶냐고...'오페라의 유령'이라고 하더라..."

 

그럼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주말에 런던으로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자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나의 오버일지도 모른다....

뭐 그런 소원을 들어주려고 생각해봤다...쯤?

주말에 표를 구해줄테니 혼자 다녀오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정도만이라도 분명 나에겐 로또만큼의 감격스런 일이다.

 

마주 앉아 있던 민준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컴퓨터 쪽으로 갔다.

 

"아까 찾아봤었어. 런던의 허메저스티 극장에서 하더라고"

민준에게서 이름을 듣고 보니 그 극장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본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토요일 7시 30분... 이거 어때?"

혹시 민준이 리츠칼튼 호텔의 유령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30대 여자를 현혹해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고 피를 빨아먹는 드랴큐라?

 

그렇지 않다면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

거기다 나는 수세기 동안 소설과 영화에서 지향해온 다소곳한 여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말한마디 하지 않아도 고생 한번 안해도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민준...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할 것 같다....

민준이 컴퓨터로 예약하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내 인생이란 시나리오에 만약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는 장면이 있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릭, 달콤쌉싸름한 30살(7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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