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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기독교가 잘못된 이유는 잠벌의 개념이 없어서임

|2008.10.12 01:04
조회 1,814 |추천 0

내가 원래 참 비판적인 사람이긴 한데 덧글보다가 식겁해서 또 쓰게 되네여.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참 잘못되었어요.

 

개신교에서는 죄를 지어도 예수를 믿고 회개만 하면 천국간다고 가르치나보죠?  강간을 해도 살인을 해도 그냥 뉘우치기만 하면 되니 참 속편한 종교입니다. 맘대로 죄를 지어도 상관없겠군요. 그렇다면 강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만 억울한게 아닐까요?

 

그것은 말도 안되는 거짓 부렁이죠. 물론 이것에 관하여 나름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믿는 거겠죠?

 

개신교에서는 성경구절을 절대시하며 문자 그대로 받아드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 멋대로 교리를 바꾸어 놓고 나름대로의 이유는 다 성경에서 그럴듯 하게 찾아내죠. 그래서 모순이 아주 많은 종교입니다. 유리할때는 성경구절을 들먹이고 불리한 성경구절은 싹 무시하고 의미를 바꾸어 버립니다. 전혀 무슨 기준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게 아니죠. 그냥 개인의 생각대로 중구난방 엉망진창 엉터리 가르침을 내세웁니다.

 

개신교에서 성경구절이란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쓰이니 어떤 잘못된 가르침이라도 성경에서 근거는 찾을 수 있습니다. 끼워맞추면 되니까요. 여기에 나름대로의 논리가 더해지면 바보같은 신도들 딱 속기 안성맞춤이죠

 

뉘우치면 모든 죄가 다 사라진다? 엄밀히 말해서 틀린 것입니다. 물론 죄는 다 용서 받을 수 있죠. 하지만 잠벌이란 것이 남습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돌아선 상태를 의미하죠. 

지하철 3호선을 타고가는데 내가 도착해야할 목적지는 도곡동입니다. 그런데 나는 대화동 방면의 반대편 차에 승차해 가고있죠. 잘못된 것을 깨닫고 다시 갈아탑니다.

 

회개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내 실수(죄)를 용서받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시점이죠. 하지만 그 상태가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는 절대 아니죠.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내가 잘못 타고간 만큼의 시간이 더 소비되겠죠. 내 죄만큼의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용서는 받았으나 내 죄의 댓가는 치루게 되어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해 내가 남의 돈 100만원을 훔쳤다고 합시다. 잘못한 것을 알고 뉘우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갚아야 할돈 100만원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고 회개를 하더라도 죄는 용서받을지 몰라도 죄를 짓는 순간 영혼에 새겨진 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댓가는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는 거죠. 살아서 그 죄의 댓가를 온전하게 치루지 못한다면 죽어서 연옥에서 형벌을 받게 됩니다. 형벌이라는 표현보다는 죄를 씻기위한 정화의 과정이지만 죄의 양만큼 고통이 따르게 되죠.

 

그래서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있을때 덕행을 쌓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내가 덕을 쌓고 내 덕행으로 좋은 씨앗을 뿌려 세상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면 내 허물도 상쇄되는 거죠. 덕행을 중시하는 것은 천주교 뿐 아니라 이슬람, 불교, 유대교등 다른 종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업의 논리로 이것을 설명을 하죠.

 

힌두교에서는 자신의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 현세에서 고행을 하는 성자들도 있죠. 이런 것이 이유 없이 생겨난 개념이 아닙니다. 고행과 자선과 덕행으로 죄를 씻기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천주교에서는 죄를 뉘우치기 위한 고행을 강조하지 않습니다만 내가 남에게 해를 끼쳤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것을 죽어서 연옥의 고통속에서 치루느니 현세에서 치루는게 백배 낫다는 거죠.

 

천주교에서  죄와 잠벌에 대한 개념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 향하고 올바른 삶으로 돌아선 순간 그동안의 죄는 모두 용서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용서 못 받을 죄는 거의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동안 지은 죄의 값은 고스란히 치뤄야 합니다. 이것을 잠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원래 초대기독교로 부터 전해오는 올바른 가르침 입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내가 남을 죄짓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상관 없는 것입니까?

 

만약 내가 남을 부추기거나 꼬셔서 도둑질이나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정작 나는 회개하고 깨끗해져 천국간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죽는게 낫다는 말입니다.

 

빠져 죽어야 하는 사람이 누군가요? 죄를 지은 사람입니까? 아님 남에게 죄를 짓게 한 사람입니까?

 

이게 무슨 이유때문인지 아십니까? 어떤 씨앗을 뿌려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나의 악행이 세상을 좀 더  악하게 하면 그 수당을 받게 되는거고 나의 덕행이 세상을 좀더 선하게 만들면 역시 그에 상응하는 수당을 받게 되는거죠.

 

내가 뿌린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설사 남의 잘못이라도 내 행위가 원인이 되었다면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뤄야 합니다. 남을 죄를 짓게하고 불행케한 그 죄는 실로 큰 것이라 연옥에서 치룰 댓가가 혹독하여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죽는게 훨씬 낫다는 표현입니다.

 

나만 회개하고 나만 용서받으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뿌린 행위의 씨앗들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나의 운명도 정해집니다. 결국 내가 아무리 내죄를 성찰하고자 해도 내가 죄값을 치뤄야할 알 수없는 죄들이 엄청나다는 뜻이 되죠. 

내가 무심코 심은 행위가 뿌리를 뻗어 걷잡을수 없는 파장을 몰고 온다면 그에 대한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겁니다.

 

나의 행위로 남에게 해악을 끼쳐 원망을 듣거나 원성을 사게 된다면 그것은 그대로 내게 돌아온다는 것이죠. 현세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죄값을 치루는게 낫습니다.

 

 

 

 

물론 현세에서 이 잠벌들이 모두 사해질 수 있습니다.

 

 

면죄부 사건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중세때 타락한 교회가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다고 하죠. 사실 면죄부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사부죠. 악랄한 프로테스탄트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왜곡시켜 아직까지도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는 돈을 받고 교황이 면죄증을 발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잠벌의 개념과 그 댓가를 치뤄야만 천국에 이른 다는 것을 주지시켜주고 올바른 신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신도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올바른 가르침을 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면 가르치는 자의 책임이 더 큽니다. 이것은 자선이나 덕행등으로 그리스도 앞에서 내 죄에 대한 희생을 봉헌하라는 의미죠. 절대 잘못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잠벌과 대사의 개념은 초세기  교회때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곡해서 받아드리고 왜곡시켰기 때문에 면죄부 사건이라 칭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께 향하는 그 시점에서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고 사해졌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죄에 대한 잠벌은 우리의 희생으로 치뤄야 하는 것입니다. 

 

 

전대사가 뭐야? 가톨릭 세례받을 때 모든 죄가 다 없어졌다고 배웠는데 전대사는 왜 필요하지? 아 골치아퍼. 그딴게 뭐야? 그리고 고해성사로 죄를 뉘우치고 사함 받았는데 전대사는 도대체 왜 필요한 걸까?

 

아마 천주교 신자들도 이런식으로 대사에 대해 개념을 못잡은 이들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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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루르드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특별 전대사를 내렸지만 정작 많은 신자들이 전대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대사에 대한 관심이 줄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전대사가 무엇인지 모르니 전대사를 받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그나마 전대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왜곡된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대사가 무엇이고, 이번 특별 전대사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두자.

 

전대사란?

 

대사(大赦)의 일종. 전대사는 대사 중에서도 죄에 따른 잠벌(暫罰)에서 전부 풀리는 ‘전면대사’를 말한다. 가톨릭교리서는 죄과에 대한 벌을 모두 면제받는 것을 전대사, 부분적으로 면제받는 것을 부분대사 또는 한대사라고 가르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71항).

 

어려우니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우리는 고해성사를 받고 뉘우침으로 죄가 모두 사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영혼에 새겨진 ‘아직도 남은’ 잠벌이 있다.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친 사람이 회개를 통해 죄는 뉘우쳤지만, 아직 돈을 돌려주지 못한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돈이 생기면 돌려주겠다고 늘 마음으로 다짐하고 결심 하지만, 정작 갚을 돈은 그렇게 쉽게 모이지 않는다. 죄도 마찬가지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한 영벌은 사함 받지만 잠벌은 여전히 남는다. 이 잠벌은 연옥에서의 고통을 통해 갚아야 한다. 전대사는우리는 이러한 잠벌을 한꺼번에 면제받기 위한 것이다.

 

전대사의 유래는?

 

전대사의 유래는 초기 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신자가 죄를 지으면 공동체에서 쫓아 내기까지 했다(1코린 5, 2~13). 하지만 죄인이 속죄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공동체에 다시 참여할 수 있었으며, 사도들 또한 교회 공동체가 죄인의 속죄를 위해 함께 용서를 간구할 것을 권유했다(야고 5, 16). 이후 속죄자(죄를 짓고 회개하는 자)는 교회가 정한 엄격한 보속을 실천하였고, 교회는 그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용서를 구했다.

 

이후 박해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배교했다가 참회한 신자들을 엄하게 단죄하기보다는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게 된다. 그리스도 앞에서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함으로써 그의 죄를 사함받고 다시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에 놓일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것이 고해성사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진다. (흔히 잘모르니 많이들 오해를 하는데 고해성사에 대해 자세한 개념은 여기 ☞영혼의 성약(고해성사의 이해) [도서] )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보속이 너무 엄격했다는데 있다. 초창기에는 보속이 엄하다보니 지키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다.

 

요즘의 약한(?) 보속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엄한 보속을 더더욱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보속을 잊거나, 미처 하지 못한 경우 그 영혼들은 연옥에서 잠벌을 마저 갚아야 한다.

 

(보속이란? 죄는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즉 죄는 죄를 범하는 사람 자신에게 내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나약해지게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그런데 죄는 용서를 받더라도 이런 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벽에 잘못 박은 못을 빼더라도 못이 박혔던 자국은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의 결과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고해사제는 고백자의 개인적인 상황을 참작하고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을 고려해서 그의 영신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보속을 줍니다.

보속의 종류는 기도, 자선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절제, 희생 등입니다.

또한 고백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자신에게 바람직한 보속을 자발적으로 정해서 고해사제에게 제안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해 교회는 살아 있는 신자들이 대신 보속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신자들에게도 기도와 성지순례 등 신심행위 및 자선 행위가 보속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대사는 이처럼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해 초세기부터 교회에 의해 내려온 것이다.

 

중세 때 ‘면죄부’ 역시 전대사?

 

중세 때 교회에서 일부 전대사가 남용 혹은 오용된 일이 있었다. 15세기 중엽, 전대사를 받기 위한 전제 중 하나인 이웃을 위한 선행, 자선행위가 간편한 현금 지급으로도 행해지면서, 한 때 전대사가 교회의 수입원으로 오인된 일이 있었다. 이때 일부 설교가들은 전대사의 효과를 과장되게 설명, 고해 성사표를 구원 보증표로 오해하도록 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 같은 일은 지금도 역시 일어나고 있는 만큼 주의가 필요하다.

 

대사는 단순히 현금이나 단순한 몇가지 선행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전제 조건들이 필요하다. 전대사를 면죄부로 잘못 오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제조건들을 알지 못하는데 따른 것이다(전대사의 전제조건 등은 아래에 서술). 교회는 사실 전대사의 오용에 대해 수차례 주의를 기울여 왔다. 실제로 교회는 이미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사 오용의 위험성을 경고한바 있으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 바오로 6세의 교서 ‘대사교리’(1967)에서도 재확인 됐다.

 

전대사는 면죄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무한히 풍요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옥 영혼을 위해 대리 기도로 대사를 얻어 줄 수 있다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자,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대사를 받으려면?

 

전대사의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우선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교회에서 파문처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 또 대사를 얻겠다는 의사가 있어야 하고 교회가 수여하는 대사의 취지에 따라 정해진 선행을 정해진 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이행해야 한다. 이와 함께 대사를 얻기 위한 일반 규정을 지켜야 한다(교회법전 996조).

 

그 일반 규정이라는 것은 이렇다. 우선 죄에 대한 모든 애착을 배제하고 교회가 지정한 선행을 해야 한다. 또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의 지향을 위한 기도 등 조건을 채워야 한다. 특히 이번 루르드 성모발현 150주년 특별 전대사와 같은 특별 전대사를 받으려면 그때 그때 교회가 정한 성당이나 경당에 참배해야 한다.

 

전대사의 필수조건 중에는 위에 언급한 대로 고해성사와 영성체, 그리고 교황의 지향과 함께하는 기도가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교황의 지향을 모를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교황의 지향을 모를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과 영광송을 바치거나 아니면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기도를 바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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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불교에서도 업의 논리가 있듯이 기독교에서도 죄에 대한 잠벌은 현세에서든지 내세에서든지 치뤄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천국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나마 저런 대사나 잠벌에 대한 교리등을 가르침으로 신자들이 죄의 허물을 벗고 좀더 구원에 다가설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만 개신교에서 아예 이것에 대한 개념들도 없으니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덕행은 필요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되고 배타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으니 그 종교가 가는길은 바르지 못하고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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