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5절에서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개역개정: 요한계시록2장5-7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
교회에 대해서 주님께서 당부할 때, ‘그때 그’로 나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 우리가 성경 볼 때 앞에 있는 걸 다 잘라내고, 거두절미하고 다 잘라내 버리고 이 대목만 눈에 확 띄어 들어오면 환희, 감격, 감동, 고마움 그 자체입니다.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하리라.」
최종적으로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전에 주님께서 어떠한 고생을 하시고 어떠한 시련을 당했든 간에 이런 절차 저런 절차를 거치고 왔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뭐냐, 우리에게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도록, 먹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하셨다는 겁니다. 결론만 보면 정말 고맙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런 고맙고 기쁘고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는 교회 나올 마음이 전혀 없을 거예요. 축구에서 ‘슛! 골인’ 이 골인된 기쁨이 있어야 될 줄 압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게 한다는 것은 이것은 교회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만들어낸다든지 공장에서 생산한다든지 그러한 제품은 아니다 말이죠. 사람 손에 의해서 이것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자 하는 사람, 또는 먹게 된 사람은 반드시 무엇을 더 생각하게 돼 있느냐 하며는, 도대체 생명을 얻는 생명나무 과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돌아오게 되었는가, 내가 먹게 되었는가, 앞서 있는 그 과정을 모른 척 할 리가 없습니다. 집에 택배회사가 와서 택배 전해줘도 누가 보냈는가 보는 것이 상식인 것처럼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해줬다면 도대체 누가 이렇게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셨는가,
그 분에 대해서 모른다 하는 것은 이거는 앞뒤가 안 맞은, 생명나무 과실을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돼버려요. 생명나무 과실이 집에 있는 보물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하고, 일평생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확실하시다면 누가 이걸, 어떻게 해서 주어졌는가를 반드시 그걸 고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게 돼 있어요.
방금 전에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생명이라 하는 것은 죽음보다 강해야 생명값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죽음보다 강해야 비로소 그걸 생명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나무 과일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말은 곧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는 말과 병행해서 사용해야 되요.
이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말을 함께 사용해야 그걸 옳게 생명을 믿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 나에게 왔다, 라는 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 무서워서 살아가잖아요. 죽음이 두려워서 살고 죽음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마는, 연기시키기 위해서. 점점 더 지연시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죽음아! 조금 있다가 오너라!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지금 죽으면 나 억울해서 못살아! 이런 식으로 산다 말이죠. 그런데 사람에게 억울하다는 말이 하나님께 대상이 안 됩니다. 사람이 만약 억울하다면 지하철에 불 지르는 그러한 사태가 벌어지죠. 사람은 첨부터 죽음과 친하고 죽음과 친하고 죽음 속에 매이기 때문에 사람이 늙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이걸 가지고 억울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당연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런데 생명나무 영생의 과일을 먹게 된다 할 때 ‘고맙습니다.’ 하는 말이 나와요.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생명나무 과일이 고맙스빈다. 라고 되고 그 뒤에 따르는 태도는 뭐냐면 ‘더 이상 죽는 것을 무서워하며 이 세상을 살지는 않겠습니다.’ ‘죽는 것 무서워서 이 세상에서 기죽어 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자유 분망함이 그 뒤에 나오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생명나무 과일을 주겠다는 이것은 결국 이 말씀 한 마디가 우리가 성도로서 이 남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 그 원칙과 기준을 한꺼번에 다 이야기해주는 셈이 되는 거예요. 이게. 생명나무 과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러면 누가 주시는가? ‘주어 먹게 하리라’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교회 머리 되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낙원에서 추방된 입장에서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는 것은 교회밖에 없는데 그 교회가 교회에서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려면 조건이 있는데 그 교회가 어떤 교회여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엮어져 있는 교회라야 생명나무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이 들어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엮어 질려면 어떤 교회는 아니어야 하느냐 하면, 사람과 사람에 의해서 엮어진 교회는 일단 아니어야 됩니다. 일단 배격해야 되죠.
주님과 엮어져야 될 것을 사람과 사람의 단결력이나 협동심 이것 가지고 엮어진 교회 같으면 20년 100년 다녀도 그거는 지옥 불을 맛보게 할 뿐 생명나무 과일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죽게 된 다음에 다른 동네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예수님과 엮어진 교회냐 사람과 엮어진 교회냐 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그것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리고 자기 피를 흘렸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흘렸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도 나옵니다. 남편 된 자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드린 것같이 하라. 이렇게 해서 교회는 어떤 행동이 나와야하느냐 하면, 바로 이러이러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시고자 피를 흘렸단다, 라는 피 흘리심의 고마움과 용서하심이 구석구석 피어나는 교회가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생명나무 과일을 줄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사람에 의해서 엮어지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하면 구석구석 내가 열심히 일했다, 헌금했다, 전도했다, 기도했다, 낙타무릎 되었다 사람의 행위가 구석구석 박혀있는 교회는 지옥 가는 교회입니다. ‘너 몇 명 전도했나?’ ‘열 명’ ‘당신은 했나?’ ‘난 10년 동안 한 명도 못했다,’ ‘저리가’ 이런 교회. 그런 식의 인간 대 인간의 행함과 행함이 경쟁이 되는 교회 같으면 그거는 교회가 아니올시다.
교회라는 것은 이미 ‘완성태’ 예요. 완성된 상태입니다. 어떻게 완성됐느냐 하면, 이미 2천 년 전에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통해서 시간을 초월해서, 이천 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그때도 강도가 용서받듯이 이천 년 후의 우리들도 그 십자가 피로써만 용서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가 참된 생명나무를 줄 수 있는 교회예요.
그런데 인간의 모든 행위라든지 노력이라든지 열성이라든지 그런 것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이건 교회가 아니라 이방종교에서나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당신이 기도의 응답을 못 받은 것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 이거는 내가 만들어도 그리 만들어요. 제가 교주라도 그런 식으로 만들겠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상관없이 주님께서 만들어진 교회는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주님께서 맹세하신 약속하신 바를 움켜쥘 수 있는 교회여야 됩니다. ‘생명나무 과일을 주겠다.’ 라고 했고 그 조건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이기는 자에 한한다. 이 세상 살면서 예수님을 믿을 거냐 사람을 믿을 거냐 이 싸움에서 우리는 항상 사람에게 기댈 가능성이 많죠.
하지만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줄게.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줄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진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야말로 생명 값을 하는 거죠. 생명이란 말을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장담을 하고 ‘나도 주를 위해 죽겠습니다.’ 장담해도 그것은 믿음일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 와가지고 설교하면서 ‘제가 이 교회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제가 이근처에 묘지를 아예, 사놓을게요. 어떤데서 돈 많이 주고 오라해도 저는 가지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해도 믿음이 영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거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 말이 진짜 믿을만하다면 요한계시록 부록에다가 아무개 목사 어느 교회 있다, 그것도 포함됐을 겁니다.
성경책은 예수님만 믿을 분이지, 예수님 약속을 믿어야지 가까운 일가친척이나 식구들이나 목사 이런 사람을 믿다가는 낭패 당한다는 이야기가 여기 나와 있어요. 오늘 본문이야기가 뭐냐 하면, ‘니골라당의 말을 믿지 마라’ 이 말이죠. 나는 그것을 미워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니골라당. 오늘 본문에 니골라당 나오니까 어감이 약간 니글니글해요.
술 취해서 흔들흔들 거리기도 하고, 니골라당, 이름 듣기만 해도 미워하고 싶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당시 에베소교회에 니골라당이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니골라당이 여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15절에 가도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버가모교회도 니골라당의 그러한 교훈, 이단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니골라당의 그 교훈을 주의하라고 주님이 역사하는 교회에서 주님이 이야기했고, 만약에 니골라당의 정체를 모르게 되면 주님께서 어떤 취지로 당부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니골라당에 빠질 가능성도 있어요. 니글니글하든 뭐든 간에 니골라당의 정체가 뭔가를 우리가 알아내야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님께서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시는 겁니다.
하게 하시면서 ‘옛다, 먹어라’ 하시면서 주면 될 테인데 이런 것 주의하고, 이런 것은 아니야 세상 적이야, 라고 분리하고 가려내는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당부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생명나무 따 먹을래요, 딴 소리는 안 들을래요,’ 라고 하면 안돼요. 생명나무 과일이 어떤 절차와 어떤 험난한 고개를 넘어서 왔는가를 진짜 생명나무 과일에 고맙게 여긴다면 주님께서 어떤 수고와 어떤 경종을 울리는가를 그것까지 한꺼번에 다 아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영생만 얻을 거야, 성경은 안 봐,’ 이러시면 곤란해요. 그게 그렇게 고맙다면 아 주님께서 어떤 고생을 하셨구나, 라는 것도 같이 동참할 줄 알아야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시가 되겠지요.
니골라당 말 자체는 니골라당이라는 사람 자체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게 사도행전 5장6절에 보면 나오는데,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님을 세웠습니다. 일곱 집사님을 세웠는데 이게 교회에 문제의 소지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처음에 일곱 집사님을 초대교회 가나안, 팔레스타인 땅에 세웠는데 일곱 집사님의 그 성향이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라 이방나라, 아주 못되게도 그 나라를 침범한 종족의 후예들이죠. 그러니까 36년 동안 일제시대 때, 대구에 교회 하나를 세웠는데 교회 중직들이 전부 다 일본 사람들이 ‘나까무라 집사’ ‘후지타와 집사’ 이런 식으로 일본사람들이 집사가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토박이들이 살짝 기분 나쁜 거예요. 와, 이거 기분 대게 나쁜 거예요. 그때부터 교회에 분당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깨져버립니다. 교회 구성요소가 일본 사람 헬라인 좌파가 있고, 토박이 한국 사람인 우파가 있다면, 좌파 우파는 첨에는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돈 문제, 그 당시 교회가 밥도 못 먹는 사람이 많아가지고, 사업 자금 없어서가 아니라 끼니를 못 잇는 사람이 많아가지고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데 서로 이쪽편이 많이 가져가는지, 저쪽편이 많이 가져가는지, 많이 가져갈까봐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불신하면서 만날 티격태격 싸우는 거예요.
구제 받는 사람이 ‘왜 나는 쌀에 보리쌀 섞는데?’ 이러고 ‘언제 섞어? 안 섞었어!’ 저쪽은 쌀만 주고 여기는 보리쌀도 섞고 누구 차별하나?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그것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은, 공자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친구 세 사람이 같이 가도 한 놈이 대장질 한다.’고 둘이 같이 있다는 것은 성립이 안돼요, 어느 조직이든.
반드시 거기에 대칭 됐다가 비대칭적으로 하나는 위에 있어서 시비를 하고 대장되겠다고 나오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누가 대장됐는가? 바로 토박이 유대인들이 정권을 잡고 여당 해버리고 저쪽으로 야당을 천대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까무라파 이 사람들이 살짝 기분 나쁘잖아요. 기분 나빠 가지고 ‘너네 아니면 교회 없나? 우리도 교회 한다.’ 해가지고 교회를 하면서 그냥 나오면 차별화가 안 되니까 기존의 본토박이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 율법관에 대해서 다른 것을 가지고 이슈꺼리, 한 마디로 우리는 이렇게 새롭다는 신상품을 만들어가지고 교회에서 차고 나가버렸어요.
그 신상품이 뭐냐 하며는, ‘율법대로 살지 않더라도 구원이 됩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젠데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구약 다음에 신약이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게 아니고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를 인정하는데, 역사상 구약 다음에 신약이 있으니까 구약을 알고 신약을 알아야 될 건데 이게 반칙을 해가지고 붕~ 날아 바로 신약을 해버리면 어떤 경우가 생기냐 하며는, 구약 자체가 무용지물 돼버리고 오히려 구약은 신약을 반대하는 거추장스러운 책이 되니까 그건 아예, 볼 필요도 없고 보지도 말자, 는 쪽으로 나가는 유대인들이 우右 라는 말입니다.
구약도 신약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별로 없었으니까.- 구약 성경에 의한 메시아가 예수님이지 구약 같은 건 안 보고 구약 율법은 다 버리고 나는 예수님께 영생하겠다, 이렇게 해버리면 구약성경은 폼으로 있는데 이거 왜 있는데, 집에 내버리지 왜 가지고 와, 이런 쪽으로 해서 구약에서 괜찮은 것, 고상한 것, 십계명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것은 다 지켜야 구원받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은혜로 믿지만 예수님께 영광 돌리고 사는 것은 구약 성경대로 살아야 됩니다. 라는 쪽으로 나오는 것이 그 당시 토박이들의 교회 신앙고백 형식으로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나까무라파 외부 헬라인들이 나가면서 그 중운데 니골라당도 포함됩니다만 어떤 생각을 가졌냐 하면, 유대인이 구원받고 유대인에 부족한 것이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헬라인이고 한국 사람이고 나까무라고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구원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며는 구약 성경의 모든 규례를 예수님이 다 지켰기 때문에 규약성경의 규례를 새삼스럽게 또 돌아서서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 지켰다는 것에 대한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수가 있다 그 말이지요.
다 이루었는데. 그걸 돌아가서 다시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공로를 흠집을 내는 짓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양쪽 말을 들어보면 둘 다 그럴싸하지요. 그럴싸하지만 사람이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객관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정책적인 권력과 힘의 논리, 자기 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나오기 마련이거든요.
나까무라파(헬라파)들이 구약 교회를 튕겨나가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잘 먹고 잘 살아랏!’ 우리는 여기에 전도하지 않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하겠다. 하지만 너희들 고리타분한 유대인으로 행세하지 않으면 기독교신자가 아니라는, 유대인으로 행세해야 구약성경을 완성한 형태라는 것을 받지 않고 성령께서, 누구든지 올 수 있으니까, 헬라인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을 전개하겠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개별적으로 무엇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선택했느냐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찬송가98장에 보면 가사가 이렇게 돼 있어요. 아까 불렀던 가사인데,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사아를 내가 알기 전 메시아가 날 사랑했다는 것을 언약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봤는데 나간 나까무라파는 뭐냐면, 주 예수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한, 하나님이 예정된 사람은 유대인뿐만 아니고 우리가 그동안 몰랐지만 숨어있는 예정된 사람이 이방인 가운데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뭘 모르냐, 구약성경을 모르는 가운데 있다 이 말이지요. 구약성경을 모르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그걸 지키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본 거예요.
다만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셔서 저 우주 꼭대기까지 올라가 계시기 때문에 우주 꼭대기에서 지상에서 자기 택한 백성을 건져낸다는 것은 똑 같은 거리 똑 같은 능력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본 겁니다. 니골라‘당’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니골라 라는 네 명의 집사가 초대 교부들 책에 나오는데 그 네 명의 집사들이 그런 쪽으로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나중에 사도바울과 약간 다르지만 아무튼, 그거에 대해서는 하자가 없어요. 성경대로 옳은 겁니다. 맞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먼저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복음을 그들이 알아듣는 희한한 일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 잠시 제가 말씀드리고 시은 것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이게 과연 가능한 얘기입니까?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으면, ‘설마 그럴 리가’ 기독교라 하는 것은 인품이 좋아야 되고 이웃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그러는 것이지 기적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당나귀가 말하는 거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 설마 그럴 리가... 하잖아요. 설마 당나귀가…
당나귀가 말하는 것도 안 믿어지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도 안 믿어지고, 홍해가 갈라진 것도 안 믿어지고 자기가 자기 맘대로 골라잡아요. 그러면. 동대문시장입니까? 골라, 골라? 당나귀가 말했다는 것이 실제로 있었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의 인간이 예수님을, 영생 줄 자, 생명나무과일을 준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당나귀가 말하는 것 이상의 기적적인 요소가 품어내는 능력이라는 것을 본인이 그걸 믿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내가 알아서 믿는다, 이러면 안돼요. 당나귀가 말하는 것을, ‘설마 그럴 리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 ‘에고 그럴 리가…’ 정말 그럴 리가 할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이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영생 주려고 피 흘리신 그 메시아다. 이게 믿어지는 것이 그 이상의 놀라운 기적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이 말입니다.
개나 소나 아무나 교회 와서 믿는 게 아니고. 그러면 요즘 사람이 ‘나 물 위를 걸었다.’ 그러면 ‘미친눔’ 그러고 ‘나 예수 믿는다’ 그러면 정상이다, 이런다 말이죠. 물 위를 걸은 것이 미친놈이라 한다면 ‘나 이제 예수 믿기로 했어’ 라고 해도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되요.
그 정도로 같은 레벨에서 하는 이야기고 같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일곱 집사들이 외친 겁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구약 빼놓으면 예수님 믿는다, 그런 뜻이 아니고 기적적으로 물 위를 건너 온 것처럼 이방인들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하늘나라라는 천국으로 출애굽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구약과 동일한 능력으로 주님께서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헬라파들은 그 사실을 믿고 증거 한 겁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대목에 그게 나와요. 사도바울이 아무리 유대인들에게 전해도 그들이 듣지를 않으니까 이사야 6장에 나온 말씀대로 드러납니다. ‘내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들을 배척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다.’ 라고 보는 겁니다.
이게 전도 현장에서 나와야 되죠. 이것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당나귀가 말 하는 것처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현상 하나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전도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말빨 센데 왜 안 믿나? 이러지 마시고, 아냐 이건 있을 수 없어, 예수 믿는 일은 있을 수 없지, 라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해볼 때 나까무라파 헬라 전도인들이 하는 그겁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니골라’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니골라당에 대해서 이야기 안 했습니다. 니골라 라는 말은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이방인들이 예수 믿겠다고 나오니까 그때부터 갑자기 자기가 좋아하는 사도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경쟁체제에 들어간 거예요. 야...인간은 참 못됐죠?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파벌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하는 말이 「심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물주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인간들이 백날 설쳐봐야 그건 아무 소용없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시다 이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는 누구한테 세례 받았기 때문에 그쪽파, 나는 누구한테 세례 받았기 때문에 저쪽파.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적이 없다,‘ 라고 하면서 중요한 말 나오죠. 하나님의 구원은 내가 어느 파에 소속돼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뭘 해야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너를 꽂힐 때 너는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십자가의 능력만 바라보는 특이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거죠.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도 나옵니다. 제가 설교 첨에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세운 교회만이 생명나무 과일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들이 세워진 교회 같으면 여기서 각 파벌끼리 경쟁의식을 부추기죠. 일부러 부추긴다고요.
제가 봉화 어느 교회 집사로 있으면서 -저도 집사 다 해봤습니다.- 봉화읍이니까 집사로서 신앙을 붙들기 위해서 자꾸 경쟁체제로 몰아넣어요. 그래서 새벽기도 1여전도회에서 몇 명 나오고 2여전도회에서 몇 명 나오고 남전도회에서 몇 명 나왔냐, 어떤 교회 보니까 그래프를 그려가지고 교인들 출석부 만들어 몇 명 빠졌는가 교인들 보라고 체크합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자기 집에다 커튼 뒤에다 헌금 판을 그려놓고 어느 집사 헌금 얼마내고 십일조 얼마내고 그걸 해놨다는 거예요. 이게 경쟁체제예요. 출석부 해놓고 체크해보면 빈사람 많을 걸요 우리교회에.…^^* 이게 하나의 폼이 먹히네, 십자가가 먹히네, 몇 명 모았는데? 마치 보험회사에서 하는 것처럼 ‘몇 명 모았는데?’ 수성구지역에서 몇 명오시고…?
손님 모시기 경쟁체제로 들어가서 ‘니골라당’이 생겼는데 니골라당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뜻에 의하면 개종이 필요 없대요. 개종改宗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개종할 필요가 없고 무슨 소리를 해도 우리 파派에 속하면 다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제는 막가자는 얘기예요. 막가자는. 이게 니골라당이에요! 이게.
니골라당의 흔적이 바로 2장15절에 보면 니골라당은 그 당시 우상 숭배하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장려했다는 것이 니골라당의 교회라는 겁니다. 니골라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만 수용을 한다면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사세요!’ 그렇게 방종체제로 나가서 사람 하나 모집하는데 혈안이 돼 있는 식의 경쟁적으로 나갔습니다.
‘쟈크 엘룰’이라는 유명한 법학자가 이런 소리 했습니다. 언제부터 기독교에서 복음이 사라졌냐 하며는, 사람 하나 꼬드기기 위해서 구제에 나설 때부터 이미 교회는 복음이 날아 가버렸다는 겁니다. 얼마나 예리하게 보는지,… 사람 하나 꼬드기기 위해서 구제에 나설 때, 라면주고 이웃사랑 한다고 돌아다닐 때, 그때부터 교회에서 복음은 날아 가버리고 그 교회는 권력집단이 되었고 그 권력집단의 오야붕이 목사라는 힘으로 걸쳐 있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렸다 할 때는 예수님이 피 흘리기까지 어떤 시련과 고난을 굽이굽이 오면서 겪었는가 그것도 함께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나 십자가 좋다 신난다’ 이러고 돌아다닐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왜 피를 흘렸느냐 말이죠. 우리에게 잔소리 하면 될 일인데. ‘하지마!’ ‘이러지마!’ 저러지마! 잔소리만 해 대면 될 건데 왜 피를 흘립니까?
그것은 잔소리 한다고 해서 잔소리 해봤자 우리는 파당만 만들고 자기 행동의 정당성만 내세울 뿐이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자기의 우월감을 자기의 또 하나의 계파를 만드는 그 짓하는 것이 우리 주특기예요. 주특기 됐다고요.
네 파는 몇 명이고 우리 파는 몇 명이고 우리 힘이 있다 여당하자. 이런 식이 된다 말이죠. 나중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면, 그런 사람이 만약에 천국 간다면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시위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 물러가라! 하나님 물러가라!’ 대호할 수가 있어요. 대모는 지상에서 충분합니다. 천국이 개판돼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만약에 예수님께서 잔소리 해버리면 잔소리 가운데서 몇 개 지켰는가? 너 몇 개 지켰나? 나 세 개밖에 못 지켰다. 이게 패가 갈라지지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그 앞에서 잘했다, 나는 참 잘났다, 나는 저보다 낫다, 라는 소리를 입을 다물게 만들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공로 없이는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그게.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문지방에 피가 없어야 마땅합니다. ‘ 이 집은 너무 착하니까 피 안 발라도 돼, 그냥 넘어가줄게 이스라엘 사람이데!’ 이럽니까? 아닙니다!! 출애굽할 때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집트사람이든 문설주에 피가 없으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용서라는 게 없습니다.
야곱이 에서한테 장자죠? 그러니까 훌륭했습니까?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해가지고 나중에 새벽되어 얻어터지고 난 뒤에 ‘그동안 내가 죽음의 자리에서 야곱으로서 살았구나, 이제는 야곱으로서의 사람은 주님 앞에서 끝났고, 이스라엘로 살아야 되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내가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들어와서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서 움직이는 나. 이것이 이미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게. 얼마나 공평합니까, 주님께서.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사는 목사에 연연하지 않고 장로는 장로에 연연하지 않고 집사는 집사에 연연하지 마시고 교회가 뭐냐 하면 주님께 뒤통수 딱 잡혀가지고 주님의 용서와 피에 의해서 감사하면서 그걸 그대로 증거 하는 그러한 모임과 집단. 그럴 때 그것을 교회라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니골라당! 니골라는 문제없어요. 니골라는 나까무라가 문제가 아니고 그걸 하나의 당으로 삼았다는 거예요. 당으로. 그것은 뭐냐, 당이면 회원 수가 있어야 되는데 회원 수가 없으면 당은 엉망 아닙니까, 니골라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니골라당’ 이것은 바로 자기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의 아픔도 모르고 용서해주신 그 은혜도 모르고 그냥 방정식 하나 외우는 것처럼 천당 가려고 방정식 몇 개 외우고 돌아다니는, 그런 얄팍한, 속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있으면서 얄팍한, 주님 생각 안 하면서 주님 이용하려는 그러한 파들은 주님께서 그 귀한 생명나무 과일을 줄 턱이 있습니까?!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우리가 해낼 수 없는, 당나귀가 말을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듯이 천국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생명나무까지 내다볼 수 있는 혜안과 지혜를 주신 그 예수님의 은혜에 여러분들은 감사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