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강호에 부는 바람, 천무 / 天武 [5]

은하철도 |2004.01.20 19:45
조회 605 |추천 0

대이노사 (大耳老師)



5.


노인은 별안간 뒤로 몸을 쑥 빼면서 우뚝 섰다.

“흠,  도대체 너의 사부가 누구냐?  요리조리 빠지면서 도망이나 치는 무공을 전수해 준 너의 사부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솔직히 네가 펼치는 무공은 옛날에 이미 죽은 무림인의 신법과 약간 흡사한 곳이 있도다.  그러나 그 송장이 네 사부일리는 만무한 일이고, 흠흠,”


“호호,  그것은 알아서 뭣하시게요?   남의 물건이나 뺏어서 자기의 물건이라고 우기는 어르신께 어떻게 저의 고매한 사부님의 대명을 알려 드리겠어요?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는 노부님은 존성대명이라도 있으신가요?”


“흐흐,  너에게 내가 누구라고 말한다면 알겠는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들인데,  헤헤,”


“마찬가지입니다.  호호호, 제 사부님을 누구라고 말씀드리면 노부님께서 어찌 알겠습니까?  저의 사부님은 도둑질한 물건이나 약탈하는 노부님을 알리 없을 것이 분명하니,  호호호.”


노인은 분통이 터지듯 대갈일성을 지르며 금나수법으로 자야의 곡지혈을 잡으려 손을 뻗혔다.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자야의 곡지혈이 제압당하려는 순간, 날카롭고 단단한 강기가 노인이 펼친 손의 소상혈을 정확하게 노리고 날아왔다. 


손등이 후끈하는 순간에 얼른 손을 거둔 노인이 바라보니 패물함을 앞에 두고 서 있던 고영이 가운데 손가락을 튕겨서 강기를 날린 것이었다.  노인은 내심 놀라며 이런 애송이가 무서운 강기를 단지 손가락 하나만으로 발산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림을 통 털어도 이렇게 강한 내공을 지닌 사람은 흔하지 않다.  손가락을 튕기는 강기란 대단한 상승무공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십팔 세의 소년으로 보이지 않는가,


“으흠, 무서운 강기로다.  도대체 너희들의 신분을 알 수가 없다. 너희의 사부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말해 보아라.”

대이노사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야는 허리를 살짝 틀면서 애교가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계신 분은 제 오라버니입니다.  저의 이름은 자야라고 하며, 오라버니는 고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자신의 성함도 밝히지 않는 분에게 우리 사부님의 존성대명을 알려드릴 수 있겠습니까?”


“헤헤,  그래?  그렇다면 알려주지,  나는 천하를 주류하여 견문을 넓히며 살아온 대이노사라고 한다.  꼭지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내 이름이나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군. 헤헤,”


고영과 자야는 크게 놀랬다.  황노인이 꼭 찾아서 강호의 견문을 의지하라고 했던 대이노사가 아닌가,

“호호,  노사님, 참으로 이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노사님의 견문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렇듯 도둑질한 물건이나 약탈하여 자기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그 명성에 합당한 행동은 아닙니다.  호호,”


“뭐라고?  너처럼 어린애들이 내 이름을 들어보았다니, 참으로 우습다.”

“정말입니다.  저는 노사님의 존함을 듣고 너무도 놀랬습니다.  그러나 노사님도 제가 누구의 제자라는 것을 아시면 더욱 놀랄 것입니다.”

“그런가?  흠...... 그러면 네 사부님이 누구인가 얼른 말해 보아라.”


자야는 패물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에 제 사부님이 존함을 듣고 노사님께서 놀래면 저기 있는 훔쳐온 패물을 표국사람에게 돌려 드리고,  반대로 놀래지 않으신다면 패물을 노사님이 가지셔도 되옵니다.  호호, 어떻습니까?”


“허허, 이런 일이 다 있나?  남의 물건을 제멋대로 흥정하다니,  그 물건은 내 물건인데, 남의 것을 가지고 멋대로 흥정하면 못쓰느니라. 흠흠......”

“그렇다면 싫습니다.  제 사부님이 누구인지는 밝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사실 대이노사는 패물이 탐나기 보다는 두 명의 애송이가 더욱 궁금했다.  겨우 무공의 걸음마에 있어야 할 애송이들이 구사하는 무공은 빙산의 일각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펼치는 무공의 뒤에는 대무공의 기틀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대이노사는 자기의 견문을 믿었다.  설마하니 누구라고 하여도 놀랄 일이야 있겠는가,  평생을 강호를 떠돌아 다녔는데,


“흠, 좋다.  네 사부가 누구인지 밝혀라.  내 얼굴에 조금이라도 놀랜 빛이 보이면 저기 있는 나의 패물을 표국사람에게 그냥 선사하겠다.  흠흠,”


자야는 끝까지 자기의 물건이라고 우기는 대이노사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살랑살랑 앞으로 나서더니 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였다. 

“노사님, 소녀의 절을 받으십시오.  소녀는 노사님의 옛 친구인 황노인의 손녀딸인 자야이옵니다.”


대이노사는 황노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싹 변했다.  입을 크게 벌리더니 자야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물었다.

“황노인?  그 친구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네가 바로 황노인의 손녀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기 서 계시는 오라버니는 바로 천봉자의 아들인 고영이라고 합니다.”

대이노사는 또 입을 딱 벌리더니 고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천...... 봉자!  천봉자 고욱을 말하는 것인 즉, 천봉자라는 말이 분명하렷다?”

대이노사는 얼른 고영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세심히 살폈다.  천봉자의 얼굴을 쏙 빼어 닮았다.  틀림없는 그의 아들이었다. 


대이노사는 뒤에 서 있던 왕정포를 향하여 말했다. 

“헤헤, 오늘은 내가 옛 친구의 손녀딸을 만나서 기분이 좋다.  나의 패물을 그냥 너희들에 넘겨줄 테니 고맙게 받도록 해라.  헤헤,  고영아, 그 패물을 모두 왕정포에게 넘겨주고, 버릇없는 맹도곡의 혈도를 풀어주어 줄행랑을 놓게 해라.”

대이노사는 흡사 자신의 물건을 나누어 주듯 말하는 것이니, 자야는 배꼽을 쥐고 깔깔거렸다. 


왕정포는 읍하며 고영에게 다가갔다.  고영이 내 주는 패물을 들은 함을 받아들고 다시금 공손히 말했다.

“인사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표국의 물건을 되찾게 해 주어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함을 받으며 왕정포는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품에서 청동으로 된 표국의 증표를 꺼내어 고영에게 내밀었다.

“이 증표는 표국의 우두머리들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든 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증표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표국에서는 표두로서 대접하여 명령을 받들 것입니다.”

고영은 극구 사양했지만 왕정포의 간곡한 말에 증표를 받아 넣었다.



다음날 대이노사와 고영, 그리고 자야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이노사는 고영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황노인이 자네에게 나를 찾아보라고 한 뜻을 짐작하겠네,  당분간 나하고 강호를 주류하면서 지내세,  많은 견문을 넓히는 기회가 될 걸세.”


장난기가 가득했던 대이노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영아가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겪을 것이다.  우선 죽림장의 혈투부터 자세히 너에게 말해주겠다.”

대이노사는 한참동안 눈을 감았다.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림장의 혈투가 일어난 이유부터 너에게 말해야겠다.  우선 자혈검에 얽힌 사연인데, 오백 년 전에 반조와 무해대사의 사건 말이다.  그 당시에 소림사에서는 자혈검을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으로 대단한 무공의 귀재에게 그 검이 넘어갔으니, 바로 지금의 신오무교를 세운 오추을이라는 분이다.”



평암(枰巖)의 대결,

이백 년 전에 오추을(梧鎚乙)이라는 무공의 귀재가 있었다.  오추을과 소림사방장인 경혜선사(景慧禪師)가 평암이라는 곳에서 자혈검은 놓고 대결을 벌렸다.  당시에 강호의 신동으로 명성을 날린 오추을은 21세의 청년이었고, 경혜선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강호의 일인자였다. 


갓 태어나자마자 산속에 버려진 오추을은 원숭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  동물의 단단한 내공과 민첩함을 두루 갖춘 오추을은 스스로 무공의 핵심을 터득하는 총명함을 보였으며, 강호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고수들이 한명씩 그의 손아래 쓰러져갔다.  당돌한 오추을은 반조가 무해대사에게 도전장을 던지듯 소림사의 문전을 두드렸던 것이었다.


강호의 제 일인자를 찾아 왔다는 오추을의 당돌한 말에 경혜선사는 미소 지었다.  더구나 오추을은 삼백 년 동안 보관되어 내려온 자혈검까지 요구하며 소림사 앞에서 버티었다.  나한십팔수의 고수들이 오추을을 상대하였지만 거칠고 단단한 그의 무공에 패배했다.  팔십이 넘은 노구를 끌고 나타난 경혜선사는 오추을에게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자신을 꺾으면 자혈검을 내 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추을은 강호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오추을은 흔쾌히 승낙했다.


소림사 부근의 평암에서 두 사람은 격돌했다. 

수많은 강호의 고수들과 승려들이 평암으로 몰려들었다.  강호의 일인자인 대원로와 바람처럼 나타난 신동간의 대결은 모두의 흥미를 자아내기 충분한 것이었다. 


오추을의 무공이 동물의 동작에 뿌리를 두고 있듯이 소림사의 무공도 역시 달마조사가 동물의 움직임을 간파하여 창안하였다.  경혜선사는 첫눈에 오추을의 무공이 소림사의 무공인 달마18수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오추을의 무공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쫓지 못하는 신속함이 있었고, 먹잇감을 향하여 전력 질주하는 표독함이 있었다. 


삼백 년 전에 벌어졌던 반조와 무해대사의 대결은 양생과 살생의 격돌이었다.  그러나 오추을과 경혜선사는 기(氣)와 혈(血)의 부딪침이며, 인성(人性)과 야성(野性)의 대결이었다. 


오추을은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호랑이의 발톱과 원숭이의 재빠른 신법을 구사했으며 경혜선사는 반야신공과 나한십팔장으로 맞섰다.  특히 혼원장공(混元掌功)을 펼치면 오추을은 당황하였다.  다른 무공과 다르게 혼원장공은 무척 부드럽고 비단처럼 자신을 감싸왔다.  대찬 힘으로 밀어붙이면 혼원장공은 같이 부딪치지 않고 그 힘을 끌어안듯 흡수했다.  그때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경혜선사는 평생을 통하여 이렇게 격렬한 공격을 당해보지 못했다.  눈으로 오추을의 빠른 움직임을 간파할 수 없었다.  열손가락이 모두 사나운 발톱이 되어서 날아왔으며 내지르는 주먹과 발길질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 같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평암의 결투는 끝났다.

오추을은 집요하게 달려드는 혼원장공과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에 의하여 깊은 내상을 입었으며, 경혜선사는 한쪽 어깨가 으스러졌다.  오추을이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는 순간에 경혜선사는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나무아미타불...... 실로 아까운 무공의 귀재로다.”

축 늘어진 어깨의 아픔을 참으며 오추을의 곁에 앉은 경혜선사는 그의 혈도를 몇 군데 찍어서 검붉은 피를 다 토하게 했다.  그리고 소림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묘한 효력을 가진 영단을 오추을의 입속에 넣었다.  혼미한 오추을의 정신이 맑아지면서 경혜선사의 자비로운 미소가 보였다. 


“선사님의 무공을 탐하여 넘본 저의 죄가 큽니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어도 한이 없으니, 머리 숙여 백배 사죄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지도 못하고 사죄하는 오추을을 내려다보던 경혜선사는 말했다. 

“너의 무공이 심히 신날하고 표독하지만, 대해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힘이 넘친다.  어찌 목숨을 버려서 그 무공의 싹을 짓밟으려 하는가?  나는 이미 송장으로 떠도는 나이지만, 너는 청청한 하늘일지니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오추을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비로움이었다.  경혜선사는 자혈검을 오추을에게 주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무림일파를 창시하여 검을 잘 보관하라는 부탁을 했다.  이는 오추을의 무공에 대한 공인과 같았다.  강호에서 그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오추을은 경혜선사의 자비로움에 백배 감사하고는 자혈검과 함께 신오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