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요리를 하다보면 오랫동안 보관하기 어려운 재료가 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생크림은 이런저런 요리에 자주 쓰이는 재료인데 일단 개봉하면 신선도가 금방 떨어지는지라
아예 그 자리에서 홈메이드 아이스크림(http://blog.naver.com/40075km/220913186344)을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하도 자주 만들다보니 이제는 5분에서 10분이면 재료를 다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설탕 반 컵을 떠놓고, 달걀 노른자 두 개를 거품기에 까넣은 다음 설탕의 절반 분량을 부어서 휘핑하고,
달걀이 크림화 되는 동안 우유 한 컵, 생크림 한 컵, 나머지 분량의 설탕을 냄비에 붓고 불 위에 올립니다.
바닐라 빈을 반으로 갈라 냄비에 긁어 넣고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잘 저어준 다음, 크림화된 달걀 노른자에 조금씩 섞어주면 끝.
이렇게 만든 아이스크림 재료를 냉장고에 식힌 다음 아이스크림 기계에 넣고 돌리면 완성이지요.
맨날 바닐라 아이스크림, 초코 아이스크림, 간혹 녹차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다가 이번에는 좀 고급스러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홈메이드 아이스크림 외에도 추가로 바닐라 빈, 설탕, 슈가파우더, 복숭아, 라즈베리가 필요합니다.
라즈베리 한 컵에 슈가파우더 한 컵을 붓고 핸드 블렌더로 갈아줍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산딸기 (복분자딸기) 역시 라즈베리의 일종이지요.
예전에는 산딸기를 딸기의 짝퉁 정도 되는 과일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딸기는 과일이 아니라 채소에 속하고
산딸기야말로 나무 열매인 관계로 진짜 과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복숭아는 눌러봤을 때 무르지 않고 잘 익은 것으로 준비합니다.
칼집을 내서 비틀어 반으로 자른 다음 설탕과 물을 1:1로 섞어 끓인 시럽에 넣고 요리합니다.
여기에도 바닐라 빈을 한 개 잘라서 넣습니다.
워낙 여기저기에 "바닐라빈을 잘라서 넣어줍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다보니 바닐라 성애자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데,
다 오리지널 레시피에 나와있는 거라 좀 억울한 생각도 듭니다.
복숭아가 다 익으면 건져내서 식힌 후 껍질을 벗겨냅니다. 냉장고에 넣어서 차게 식히면 준비 완료.
복숭아가 식는 동안 갈아놓은 라즈베리를 체에 내려서 씨를 걸러줍니다.
라즈베리 퓨레가 꽤 점도가 있는 편이라 숟가락이나 주걱 등으로 긁어주면서 과즙만 모아줍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듬뿍 떠서 접시에 담고, 그 위에 복숭아 반 쪽을 올린 다음 라즈베리 퓨레를 넉넉하게 뿌려주면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넬리 멜바(Nellie Melba)의 이름을 따서 만든 피치 멜바 완성입니다.
이 역시 어지간히 유명한 요리 레시피는 혼자서 다 만들어낸 프랑스 요리의 제왕, 에스코피에의 작품입니다.
멜바는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할 때면 에스코피에의 레스토랑에 자주 가곤 했는데, 하루는 자신의 공연 티켓을 에스코피에에게 선물합니다.
이 때의 오페라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결혼식마다 울려퍼지는 "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즐겁게 공연을 감상한 에스코피에는 넬리 멜바에게 보답하기 위해 다음 날 저녁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를 위한 디저트를 선보였는데,
공연 중 백조의 모습을 한 보트가 등장하는 것에 착안해서 얼음으로 백조 조각을 만든 후,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복숭아를 얹어서 서빙합니다. 이 당시의 이름은 "백조와 복숭아".
하지만 몇 년 후에 얼음으로 만든 백조를 생략하는 대신 라즈베리 퓨레를 더한 최종 버전을 완성했으니
그 이름이 바로 피치 멜바입니다.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역시 부드럽지만 약간은 씹히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복숭아 절임, 그리고 그 위를 뒤덮는 새콤한 라즈베리 퓨레의 맛이 잘 어울리는 디저트입니다.
단순하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아이스크림인지라 이 밖의 다른 재료는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네요.
실제로 에스코피에는 그의 자서전에서 피치 멜바가 여러가지 버전으로 유행하는 것에 대해 비웃으며
"피치 멜바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복숭아, 라즈베리 퓨레만으로 만들어지는 간단한 요리다. 여기에 다른 뭔가를 더 집어넣는 건 이 절묘한 균형을 무너뜨릴 뿐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면 조리법이 복잡하고 재료가 여러가지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맛있으라는 법은 없는 듯 합니다.
그보다는 간단하더라도 재료에 숨은 본질적인 맛을 끌어내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고급 요리지요.
그렇기 때문에 요리(料理)라는 단어에는 재료(材料)의 이치(理致)를 파악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