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나타난 그리스도(4) 생명나무 vs 선악과 (창 2:9)
_손종태 목사(진행교회)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은 네 개의 강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단순히 ‘동산’이라고 할 수 없는 상당히 큰 지역이었다.
넓은 광활한 에덴동산에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인류의 타락이 있기 전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는 풍성하고 싱그러운 열매들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마치 카메라의 렌즈가 클로즈업 하듯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주목하게 하신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수많은 나무의 열매들을 다 먹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보통 선악과를 생각하면 '아담이 먹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텐데...’와 같은 선악과에 대하여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정서가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선입관을 배제하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글자 그대로 볼 때 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하는 지식을 주는 열매이다. 그런데 얼핏 이 사실 자체만 보면,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왜 나쁜 것인지, 하나님께서 왜 금지하신 것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구분하는 것에서 이 땅의 도덕과 윤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인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 그 후손인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아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의 기준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과목 중 국어 산수 사회 자연과 달리, 바른 생활이나 도덕은 아무리 공부를 안 해도 최소 90점 이상이 나온다. 문제의 질문이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휴지를 길에 버리는 것이 맞는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맞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답을 안다.
선과 악을 구분해야 도덕이 나오고 윤리의 기준이 나오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신약성경 로마서 7장의 고백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8-19)
사도 바울은 본능적으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선을 행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실제로는 악을 행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이것이 인간의 현주소이다.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 누구든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하는 지식이 있다고 해서 삶 속에서 실제로 늘 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는 교육을 통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주입해서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선과 악을 지식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사람의 실존 문제는 이를 행할 힘이 없어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면, 자신의 지식을 과신하여 판단하는 문제를 저지를 위험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자신이 아는 부분에 근거하여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습관에 젖어있으면,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는 회피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러한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지성의 질서를 따르는 삶의 문제는, 그것을 초월하지 못하면(그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가 지닌 지식과 노하우에 대한 거만함이 생겨난다는 것이다(‘나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어’와도 같은 생각이다).
...지성의 질서를 따라 살면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불가피하게 자신들이 잘 모르거나 지식이 부족한 영역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는 교만을 키우게 된다. 거기에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리처드 포스터가 언급한 것 같이, 사람이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선택할 때 자칫하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까지도 부인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추구하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지식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기로 하고 처음 그 죄를 지을 때 행복하고 흥분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심장이 급하게 뛰며 양심이 그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나는 상황이 이렇게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나에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다. 죄가 아니다.’ 스스로 갖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한다.
두 번째, 세 번째 범행을 저지를 때마다 그의 양심은 무뎌져 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죄자도 범행이 발각된 후 체포되어 TV 카메라를 들이대면 다 고개를 숙인다. 그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죄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식이 생겨서 선과 악의 기준은 알지만 실제로 그 기준대로 행할 힘이 없는 것이 인간의 현주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마지막 구절의 ‘드러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트라켈리스메노스’는 그 당시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이 단어의 용례는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형을 집행하기 위해 수레에 태워 형장으로 데리고 가는 동안, 거리에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죄수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출 때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단도를 거꾸로 하여 죄수의 목 부분에 고정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감춘 모든 죄는 당장은 수치를 겪지 않고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차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는 그 날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 옳고 그름과 율법의 결과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통해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나온다. 우리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하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의 기준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나 이는 필경 사망으로 인도한다. 수천 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 있다. 율법은 결국 사람들에게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5)
창세기에서 성령님께서는 동산 중앙의 두 나무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셨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선악과는 율법의 원리이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은 결국은 사망으로 이끈다.
그런데 또 다른 나무인 생명나무가 있다. 이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율법의 기준은 그것이 옳은 것일지라도 끝에 가서는 사망을 가져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를 끌고 예수께 나아와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시험하여 묻는 장면이 나온다.
율법대로 돌을 던지면 그 여자는 죽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어둠이 들어온다. 어떻게든 사망을 가져온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잠잠히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 쓰신 내용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를 추측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암시가 있다.
예수께서 땅에 쓰셨다는 표현을 살펴보면, ‘쓰셨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카타그라페인’인데, ‘쓰다’라는 의미의 ‘그라페인’과 ‘다시’라는 의미 ‘카타’가 결합한 단어이다.
즉, 다시 쓰다, 되풀이해서 쓴다는 의미이다. 독자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쓴다는 의미에 주목하여 많은 성경학자는 예수께서 쓰신 것이 아마 십계명일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씨는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전부 양심에 찔림을 받고 그 여자를 향해 던지려고 했던 돌을 하나둘씩 내려놓고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두려워했던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여인을 정죄하고 판단했던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간음은 죄가 아니다. 괜찮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신 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의 이면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다. ‘여인아, 죽어 마땅한 너의 죄를 위해 내가 대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분명히 그 간음죄는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는 율법의 기준은 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결국 사람들의 삶 속에 사망을 가져오게 된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면 이미 우리는 모두 죽었어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오셨다. 죄를 지은 여자뿐만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생명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원칙에 의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선악을 아는 본능적인 지식은 어린아이여도 다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선을 행할 힘이 없고 도리어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생명나무를 먹기 원하신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식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다. 선과 악의 지식을 우리 삶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생명의 역사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워치만 니의 책에 보면 이러한 일화가 나온다.
중국 남부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 농부가 산 중턱에 논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열심히 논에 물을 대면 그 저녁에 이웃 사람이 그 수로를 변경하여 그 물을 자신의 논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 농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화를 낼 수 없다고 여기고 인내하며 참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서너 차례 반복되자 그는 워치만 니를 찾아가 “나는 지금까지 인내하며 보복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워치만 니는 “우리가 만일 옳은 일을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가련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옳은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답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내일 논에 가시면 아랫집 논에 물을 먼저 채워놓으시고 그다음 형제님의 논에 물을 채우세요.”
그 말에 그 농부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다른 이웃의 논에 물을 가득 대주고 오후에는 자기 논에 물을 대었다. 그의 마음 한결 가벼워졌다. 며칠을 그랬더니 그의 논 안에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이웃 사람이 그의 행동에 놀라 농부를 찾아와 그 까닭을 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웃도 “당신이 믿는 예수, 나도 믿겠다.”고 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원리이다.
*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2014년 3월 30일 자 뉴스에 한 흥미로운 사연이 보도되었다.
1986년 9월, 미국 펜실베니아의 주 알렌타운의 버거킹 매장 화장실에서 태어난 지 3시간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가 발견되었다. 경찰이 직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아이를 두고 간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을 찾았지만 실패했고, 아이는 입양되었다.
이 아이의 양부모는 아이가 12살이 되던 해 1987년 당시 ‘버거킹 베이비’로 기사화된 신문 스크랩을 함께 내밀며 입양 사실을 조심스럽게 전하였다.
패스트푸드점에 버려진 ‘버거킹 베이비’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된 이 아이는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이제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캐서린 데프릴(Katheryn Deprill)이라는 여성의 실제 사연이다.

캐서린 데프릴은 페이스북에 ‘엄마를 찾고 있다’는 내용의 메모를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올린 뒤 엄마도 이 사진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공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3만 3천 명이 넘는 페이스북 이용자들이 캐서린의 글을 공유했고 캐서린의 사연은 화제가 되었다. 미국 언론들도 그 때 그 버거킹 베이비가 자신을 두고 간 생물학적 엄마를 찾고 있다며 그녀의 사연을 보도했다.
화제가 된 덕에 TV에 출연하게 된 캐서린은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왜 엄마를 찾느냐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바로 이렇게 답했다.
“엄마를 찾고 싶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먼저 엄마를 만나면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녀는 나를 따뜻하고(warm) 마른(dry) 장소에 두고 갔잖아요. 저에겐 3명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고 지금 제 삶은 매우 훌륭해요…."
캐서린의 말을 듣고 진행자가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듯 목이 메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니, 본인을 버리고 간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고요?"
그러자 캐서린은 웃으며 답했다. "네, 발견했을 당시 의료진은 저에게 제가 아주 건강했고 임신 기간 내내 잘 보살핀 상태였다고 했어요. 엄마가 저를 사랑했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죠. 엄마는 매우 나쁜 상황에 놓여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저를 키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엄마를 만나면 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러자 캐서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왜, 무엇이 두려워서 저를 거기에 놔뒀는지 일단 묻고 싶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아이를 낳아봐서 알아요. 출산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엄마는 강한 여자였음이 분명해요."
TV를 통해 자신을 찾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결국 생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두 모녀는 27년 만에 재회하였다.
두 모녀의 만남을 주선한 변호사에 따르면, 캐서린의 생모는 당시 17살이었고 해외여행 중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어,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채 혼자 방에서 몰래 출산했고 아이를 그곳에 두고 간 것이었다.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을 택한 것은 그래도 그곳이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인 만큼 아이가 빨리 발견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캐서린 데프린이 선악을 아는 원리에 따라 행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자신을 버거킹 화장실에 버린 엄마를 평생 원망과 미움의 결박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그 행동은 자신에게도 사망의 열매를 맺게 했을 뿐 아니라, 생모에게도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캐서린 데프린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하였다. 자신의 엄마가 건강하게 출산해준 것, 따뜻하고 마른 곳에 자신을 두어서 감사하다고 여겼다.
(아마도 캐서린 데프린은 크리스천인 것으로 짐작된다.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이러한 용서의 삶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캐서린의 얼굴을 보라. 얼마나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인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지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살라고 하신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우리 안에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따라가라. 생명을 _아 행할 때 우리에게 참 평안과 기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