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봄, 군대 전역하고
학기 복학했을 때
군대에서 남들(선후임들) 연애썰 풀면서
여친 얘기하고 그럴 때
연애 경험 없어서 아닥하고 있던 게
천추의 한이 되어서
연애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찰나에
어느날, 전공과목 수업을 듣는데
내 대각선 방향에 앉은 여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옆모습도 얼핏 예뻤는데, 쉬는 시간에 물 떠마시러 가는 모습의
정면을 보니 와.. 진짜 무슨 걸그룹보다도 훨씬 예쁘더라.
순간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더라..
이 두근거림은 단순히 예쁜 여자를 봤을 때의 수줍은 떨림 같은 감정이라기보다는
흉포한 맹수를 앞에 두고 창을 들고 대치했을 때의 중압감이 짓누르는 떨림..
왜냐면 나는 마음 속에서 "걱정돼.. 그냥 포기하자." VS "아니야.. 남자 답게 용기 내서 번호 물어보자!"
바로 긴장과 떨림이라는 맹수와 용기라는 마음 속 전사가 한바탕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에서 힘든 훈련까지 받았던 나는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전공과목이 끝나고
그 여자애가 건물을 나가면서 천천히 걸어갈 때 뒤따라가서 말을 걸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아까부터 마음에 들어서 계속 보게됐다고..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되냐고 해서
번호까지 얻는 데는 성공했다.
근데 당시 내가 여사친도 없었고,
여자랑 카톡으로 대화를 하면서 뭐 분위기를 주도한다는 그런 개념이 없어서
그냥 썰렁한 질문.. 형식적 대답이나 나올 법한 질문이나 툭툭 던졌는데
또 여자애 쪽에서도 답장이 늦게 오니까..
왠지 속으로 '아.. 왜 답장이 안 오나..' 마치 구원병을 기다리는
포로 신세가 된 것마냥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점점 나와 여자애의 카톡 전달 답장 간격은 벌어지다보니
나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결국 바보같이 그 여자애를 앞으로 강의실에서 보더라도
더 이상 부담 주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그 후에는 강의실에서 마주치더라도 못 본 척, 처음부터 몰랐던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강의실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그 결심이 있은 다다음날이었나, 이게 사랑의 열병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평소 걸리지도 않던 심한 몸살 감기를 앓았고 지하철에서도 의자에 앉아
살짝 졸도해버려서 가방에 토자국이 살짝 묻어 버렸다.
그때 내 마음도 현실을 직시했던 것 같다.
아 그 여자애는 예쁘고 대쉬하는 잘생기고 멋진 넘들도 많을 테고
나란 넘은 잘생긴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목소리도 애 같고 남성미도 없는 찐따라는 것을..
그 순간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른 바보처럼 느껴져서
내 마음의 나침반은 단념으로 정확히 향해버렸다.
그러다 4~5일 뒤였나, 그 여자애가 어느날 정수기 앞에서 물 떠마시는 나한테
먼저 와서 조용히 인사하더라..
아...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나오는데, 그때 뭐 캔음료라도 하나 사주면서
말붙였어야 되는데
진짜 바보 같은 나는, 무슨 교인이 말 걸었을 때 귀찮게 대꾸하는 사람마냥
아무 표정 없이 "네.." 하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더 이상 아무 일이 없었다.
강의실에서 서로 웬만하면 안 마주치게 그 여자애는 날 피해서 멀리 떨어져 앉는 것 같았고
그 후로는 더 이상 나의 부끄러웠던.. 그리고 그 여자애한테는 미안했던 하나의 짧은 기억의 조각으로 남았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이상하게 카톡 프사 같은 데에 자기 사진을 잘 안 올렸다.
내가 볼 때는 여자애가 너무 예쁘다 보니 남자 애들도 잘 대쉬 안 하고
여자애도 딱 보니까 성격이 여자애들하고만 친하게 지내고
남자애들하고는 잘 안 어울리는 타입 같아서
남친이 없는 것 같더라.
원탑급 예쁜 외모와 달리
강의실에서 뭔가 튀거나 시선 주목받을 만한 행동이나
그런 것 없이 조용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게 되고 그렇게 사회인으로서 살다가
문득 그 시절이 떠올라 그 여자애의 카톡 프사를 보니
왠일인지 몇 년 간 프로필 사진 없던 여자애가 화사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올렸더라..
정말 참 예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덧 그 여자애도 이십대 중반이 넘은 나이고
어느 수필의 한 구절처럼
내가 그 시절 처음 봤을 때 마치 스위트비처럼 청초롬했던 그녀가
어느덧 목련꽃 같은 숙녀가 되어 숙녀의 아름다움을 비칠 때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참 묘했다..
그래도 나는 그 여자애한테 고마움 마음을 아직도 조금은 갖고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여자한테도 고백한 적이 없고
사실 지금 직장인이 되고서도 미팅 두 번은 나간 적 있는데
결과도 좋지 않았고, 그 시절처럼 뭔가 확 떨리는 그런 게 없더라.
그래도 그 시절 처음 용기 내서 고백할 때의 떨림과 설렘
그리고 짝사랑의 뜨거운 열병이란 추억의 그림자를 던져준 그녀를 떠올릴 때면
쓴커피 같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물결이 내 마음속에 잔잔히 밀려온다..
글 다 읽어주신 분 감사하고
bgm으로는 유키 구라모토의 nostalgia 추천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