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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다섯번 결혼을 했고, 다섯번째 이혼을 앞두고 있다.

인생별거없음 |2017.07.17 02:08
조회 41,737 |추천 86
엄마의 세번째 이혼에 대해 쓰기 전에 나의 실종 처리에 대해 궁금하실까 하여 몇자 적어보자면,

옆집에 사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엄마에게 그랬다고 한다. 날 자기들 호적에 넣지 않겠냐고. 호적도 없이 초등학교에 들어갈수는 없을테고, 자기들도 막내딸 하나 생긴 셈 칠테니 자기들 호적에 넣자고... 엄마는 안그래도 고민이었는데 너무 감사드린다며 나를 할머니 할아버지의 막내딸로 올렸고, 내가 태어났을때 생긴 이름과 생년월일은 그렇게 새로운 이름과 생년월일로 바뀌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나를 찾을게 두려워 생년월일 마저 두달 앞당겨 새로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엄마의 세번째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와 그 아저씨는 전혀 어울리지 못했고,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닌, 주변에 등떠밀려 한 결혼이라 그런지 둘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이혼을 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났고 내가 중2가 끝날때 쯤 엄마는 인천으로 이사를 가는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난 그때 한창 꿈도 많았고, 게다가 첫사랑에 설레였을때라 절대 안된다고 싫다고 했지만 엄마는 네번째 결혼을 계획했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실행에 옮겼다. 

지금은 말하면 다 아는 곳에 선산이 있는 아저씨였고, 농사를 짓는다고 했고, 딸 하나 아들이 둘이라고 했다. 엄마는 짜증으로 가득찬 내게 언니 오빠들이 생겨서 좋겠다고 했고, 난 울며 불며 친구들과 헤어지고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인천. 태어나 처음 이사를 가보는 새로운 지역이었다.
여중으로 들어갔고, 전학생인 내게 텃새 아닌 텃새도 있었으며, 지방색도 있었다. 
(인천 여자가 드세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녀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엄마는 아저씨와 농촌에서 생활했고, 나는 언니 오빠들과 시내에서 살았다. 나는 중3이 되었고 언니 오빠들은 모두 20대 초 중반 성인들이었다. 
평일에 나는 엄마 없이 내손으로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고, 전학을 왔다는 위화감에 공부도 나름 열심히 해서 반에서 상위권 등수를 유지했다. (인천 여자들은 드세지만, 인천 학군이 전국에서 꼴찌였다는건 첫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새로 생긴 언니는 나를 질투했고, 내가 자기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미워하는 언니가 나도 좋지 않았고 우리는 집안의 갈등 요소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는 내가 자기가 쓰던 방을 쓰는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고, 집안에 고성이 오갔고, 몇일 뒤 엄마와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이사를 가고 나서도 왕래는 있었지만 그렇게 되니 엄마의 결혼 생활도 곱게 유지될 수는 없었던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지나고 엄마는 아저씨와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평범하고 신나는 새내기 생활을 하던 중, 어느날 엄마가 물었다. "만약에 친아빠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볼래?" 
난 별 생각 없이 "응" 이라고 했고, 난 이때 나의 선택을 아직까지 후회한다. 

처음 만난 아빠는 나와 닮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니가 내 딸이냐 하며 신기해 하고 좋아하던 아빠는 그날 내게 좋은 음식, 좋은 옷, 금목걸이 등등을 선물해 주셨고, 그 하루동안 나는 '이런 아빠가 엄마한테 그런 짓을 했다고?' 하며 의아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는 과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엄마와 내게 집착했다. 술만 마시면 사람 피를 말리며 폭언을 퍼붓고, 전화를 안받으면 받을때까지 하다가 그래도 안받으면 집으로 찾아와 문을 부실듯이 두드렸다. 

죽고싶었다. 
나는 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부모님과 가족들과 살 수 없는걸까. 

별 별 안좋은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며 엄마와 힘을 모아 스물 한살이 되던 해 초에 아빠 몰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아빠는 우리가 아직 그 집에 사는줄 알고 술을 마시고 찾아가 문을 두드렸고, 이웃들이 밤중에 놀라 뛰쳐나와 경찰을 불러 곤혹을 치뤘다며 전화가 부셔져라 전화를 했고, 찾아서 둘 다 죽여버리겠다며 협박을 했다. 
하지만 아빠의 협박은 오래 가지 못했고, 어느새 엄마와 나의 인생에서 기억하고싶지 않은 해프닝으로 잊혀져 갔다. 

그 해 9월, 나는 캐나다에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이 지긋지긋했고, 아빠가 학교에 찾아올까 무서웠다. 살아보니 좋길래 영주권을 받고 싶어 준비를 시작했다. 

해외 생활을 시작한지 3년쯤 됐을때, 엄마가 혼인신고를 한다고 했다. 나라에서 연금을 받는 아저씨였고, 이 연금이 엄마에게도 승계가 된다고 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해서 하는 결혼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내게 짐이 될까 걱정이었는데 잘됐다며 실행에 옮기셨다. 처음에는 따로 생활하시더니 그 다음 해에 한국에 와보니 같이 살고 계셨다. 

엄마는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아저씨를 돌봐드리는 요양보호사 쯤 되는것 같이 보였지만, 그 댓가로 엄마는 생활비와 급여를 받으니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살겠다고,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17년이 됐고,
2017년의 나는 캐나다 영주권자이고, 캐나다에서 대학교를 졸업했고, 로컬 증권사 직원이 되어 있었다. 

내 인생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았다. 
마음 한켠엔 엄마가 늘 걸렸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잘 자리를 잡았으니 엄마의 노후도 내가 편하게 해드리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나름 자기 합리화를 했던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엄마 목소리가 이상했다. 
엄마 왜그래, 무슨일 있어? 물으니 
아니야 좀 피곤해서 그래. 라고 하더니. 

폐암 말기라고 한다.
1년 생존율이 30프로대. 

건강하고 씩씩하게 웃던 엄마가, 지금은 계속되는 항암치료에 신경질과 짜증만 가득한 상태로 지금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나는 연락을 받자마자 휴직계를 내고 한국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엄마의 곁에 있지만...

솔직히 엄마의 신경질과 짜증을 다 받아주지 못해 서로 마음에 상처만 깊어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엄마는 연금이고 뭐고 이혼하겠다며, 이혼하고 홀가분하게 당신의 인생을 살겠다며 그렇게 다섯번째 이혼을 앞두고 있다. 

도대체 엄마는 왜 그런 인생을 살았을까.

온전히 엄마 팔자가 드세서?

오늘 저녁상 앞에서, 엄마의 현재 이혼에 대해 내 남편이나 남편 가족들이 얼마나 알고 계시냐는 엄마의 질문에 "다 알고 계셔." 라고 했더니 엄마가 화를 낸다.
엄마 체면이 뭐가 되냐고. 엄마 신뢰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고...

순간 이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엄마 나는 안보여? 나한테는 안미안해?
지금 엄마 자존심 상하는게 문제야? 
난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엄마 결정에 다 따랐는데 그때마다 내가 받았던 상처는 걱정도 안돼?"

혀를 물고 꾹 참았다. 

엄마는 지금 환자니까. 

하지만 마음 한켠으론 이런 못된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엄마가 차라리 빨리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이승에서 이렇게 하나밖에 없는 가족을 괴롭힐거면, 그리고 엄마 자신을 그런식으로 괴롭힐거면 차라리 빨리 다 끝내고 가시라고. 

나는 정말 나쁜 딸이다.  
추천수86
반대수2
베플ㅇㅇ|2017.07.17 10:48
그래도 어머니는 쓴이를 끝까지 놓지 않았네요. 인생은 결국 본인이 선택한 삶을 산다 하지만...어머니의 그런 삶의 선택의 이유가 딸을 지키려는 의지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곡절 많은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이 안타깝네요.
베플ㅇㅇ|2017.07.17 10:47
어머니 딴에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오신 것 같아요. 여자 혼자 아이 키우기 얼마나 어려워요.. 어머니 인생 굴곡이 참 험하시네요. 얼마나 고된 삶을 사셨을까 눈물이 납니다.. 님 앞으로는 그래도 밝은 날들이 남아있잖아요. 님과 비슷한 나이때부터 그래도 하나 낳은 자식 먹여살리겠다고 고생만 하며 사셨을 어머니 마음도 헤아려주세요..
베플ㅇㅇ|2017.07.17 11:24
그래도 자식을 끝까지 놓지 않은 엄마를 다른 사람이 다 흉본다 해도 쓰니는 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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