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07년 여름, 돌이켜보면 이맘때쯤 같다.장마기간이라 며칠동안 비만 주구장창 내리던 때였지.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심이긴 해도 가로등이 몇 개 없어서 밤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다니지 않아. 범죄가 자주 일어난다던가 하는 동네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둡다보니까 여자들은 일찍일찍 다니는게 습관이 되어있지.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집 가는게 일상이었기도 하고, 남자라서 대수롭지 않게 다녔지만.
뭐 좌우간, 그 날도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버스탔는데, 진짜 예쁜 여자애가 한 명 있는거야. 내가 사실 우리 동네에 오래 산게 아니라 어디 학교인지는 몰랐는데 아무튼 화장기 없는 얼굴이 어찌나 청순해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되더라.물론 범죄라서 말걸고 싶은건 참았다 ㅎㅎ근데 마침 또 내가 내릴 정류장에서 그 애가 벨을 누른거야. 마음속으로 되게 좋아했지. 이 애가 내가 사는 동네에 살고 있고, 그럼 언젠가 또다시 이 애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니까.
위에서 말했지만 우리 동네는 가로등이 별로 없어. 당시에 아는 동생한테 여자들은 밤에 어두운 길을 걸을 때 근처에 누가 있으면 무서워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담배도 한 개비 태울 겸 여자애 먼저 보내고 나는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지. 근데 앞서가던 여자애를 우비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덮친거야. 당연히 여자애는 소리지르고 발버둥쳤지. 근데 수건같은걸로 여자애 입을 막고 뒤에서 제압하니까 어떻게 반항을 못하더라고.
나는 일 났다 싶어서 여자애가 끌려간 곳으로 뛰어갔어.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폐건물 지하주차장이었어. 거긴 지어진지 오래되서 CCTV같은건 진짜 하나도 없거든. 근데 범인이 그걸 알고 있더라고. 아 이새끼 강간지능범이구나 싶더라.
내가 덩치가 왜소한 편은 아닌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덩치가 좀 있는 편이야. 예전에 운동도 했었거든. 근데 여자애긴 하더라도 사람 한명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하는걸 보니까 보통놈은 아니구나 싶더라고. 그래서 지하주차장에 따라들어가기 전에 112에 신고해서 지원을 요청했고, 그 후에 바로 따라 들어갔어.
그 여자애를 끌고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이에 팔에 수갑 묶여있고 옷도 거의 다 풀어헤쳐져있더라고. 여자애는 계속 반항하면서 울고. 근데 이 미친놈이 칼을 들고 있었어. 칼로 여자애 팬티를 찢고 있더라고. 그 찰나에 내가 딱 들어간거지.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머리가 새하얘지더라. 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몸이 안움직여지고 그냥 진짜 계속 지켜보게 됐는데 여자애랑 눈이 딱 마주쳤어. 아차 싶더라고. 그러자 정신이 바짝 드는거야. 바로 "야이 강아지야!!!"하면서 진짜 온힘을 다해 소리 질렀어. 성폭행범이 깜짝 놀라서 내쪽을 쳐다보더라고. "아 __..."하고 혼잣말 중얼거리더니 이새끼가 하던걸 멈추고 일어나서 칼들고 나한테 달려드는거야.
그때 _됐다 싶으면서 만감이 교차하더라. 저거 한방 맞으면 골로간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도우러왔나 싶기도하고 그래도 사람 하나 구하는건데 잘한거라고 생각도 들고. 그러고 있는데 진짜 무의식적으로 이새끼가 나 찌르려고 달려드니까 내가 들고 있던 우산으로 그새끼 팔을 조카 세게 내려친거야(사실 여자애한테 들음). 그새끼가 들고 있던 칼을 떨궜고 나는 그걸 재빨리 발로 멀리 찼지. 그리고는 그새끼를 내가 우산으로 미친듯이 패더래. 온갖 쌍욕이란 쌍욕은 다 하면서. 솔직히 이제와서 말하지만 마침 그게 철제장우산이라서 망정이지 플라스틱 이딴거였으면 내가 골로 갈뻔...
어쨌거나, 112신고하고 한 15분쯤? 지나서 경찰 두 명이 왔더라고. 한 명은 그새끼 족치고 있던나 뜯어말리고 한 명은 담요같은걸로 여자애 추스르고. 뭐 그렇게 경찰차 타고 경찰서 갔지. 우리 부모님 오시고 여자애 부모님 오시고 진짜 난장판이더라. 뭐 일이 일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만.
여자애 부모님은 경찰한테 정황을 듣더니 내 손 잡으면서 진짜 정말 너무 감사하다면서 몇번을 고개 숙이셨는지 몰라. 학생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뻔했다면서.
음 그러고 나서 조서인가 사건경위서인가 쓰고 이것저것 질문받고 그러고 집으로 돌아옴.(나중에 법원도 가고 했는데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여기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음.) 어머니는 왜 쓸데없이 오지랖 넓게 사서 위험찾아다니냐고 등짝 폭풍 스매쉬 당하긴 했는데, 나중에는 그래도 내가 아들이라 자랑스럽다고 하시더라. 근데 앞으로는 또 그러면 어머니가 몸소 칼부림 보여주겠다고 협박하시고 ㅋㅋ
며칠 지나서 그 여자애 데리고 걔네 부모님이 우리집 찾아오셨더라. 그리고 알고보니까 그 집안이 우리 집이랑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이더라고. 원래 항상 여자애 아버지가 차로 딸내미 등하교시켜줬었는데 그날따라 잔업이 있어서 그 날만 딸한테 버스타고 가라고 보냈는데 그 사단이 난거지.
그런 일을 당해서 그런가 처음에는 엄청 낯가렸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니까 나에 대한 견제? 두려움? 같은걸 좀 풀더라고. 다른 남자들은 피하는데 나랑은 눈도 쳐다보고 농담도 주고 받으니까 기분이 되게 묘하더라고. 응 사실 엄청 기뻤어. ㅎㅎ
뭐 그렇게 그 여자애 가족이랑 우리 가족이랑도 자주 왕래하게 됐고, 나는 여자애 부모님 부탁으로 그 애 과외도 봐주게 됐고. 원래 공부 잘하는 편이기도 했는데, 노력해서 결국 우리 학교에 합격했더라.
그 소식을 들으니까 기분이 또 묘하더라. 이제 내가 마음에 둔 얘가 2달만 지나면 성인이 된다는거잖아. 2달만 지나라 빨리 2달만 지나라. 2달만 지나면 사귀어달라고 꼭 고백해야지하고 계속 기도했는데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든게, 내가 군대를 안다녀온거야.
내가 고백을 해서 이 애랑 사귀게 된다고 하더라도 2년동안 군뒷바라지하게 될테니가 너무 미안한거야. 정말 좋아하는데, 좋아하니까 이 애가 고생하는게 정말 싫었어. 나도 남들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었지만, 이 애가 마음고생 하게 될거라는 걱정이 내 못된 생각을 막더라고.(물론 고백 전이라 얘가 받아준다고 확신도 없었던 상태라 사실 김칫국 드링킹이었음 ㅎㅎ)
그래서 그 애가 대학 합격한 이후로 일부러 내가 거리를 뒀어.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면 이 애를 향한 내 마음이 주체가 안될거 같더라고. 그래서 문자같은거 단답으로 하고, 만나야하는 일도 그 친구 부모님 통해서 전달하고. 그렇게 몇달 지내다가 군대간다는 말만 전하고 입대해버렸지.
근데 그렇게까지 했는데, 훈련소 면회를 왔더라고. 분명 그때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그리고 자대배치받은 이후로도 면회날마다 항상 오더라고.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까진 안하셨는데, 올때마다 치킨이며 피자며 먹을걸 들고 오더라. 선임들한테 잘보여야 내 군생활 편해진다고.
생각해봐. 갓 성인된 애가 뭔 돈이 그렇게 있겠어. 말도 안되는 소리지. 나중에 들어보니까 나 군입대한 이후로 과외 시작해서 그 과외비로 충당했던거라더라. 자기 생활비 쓰는 것도 힘들텐데..
사실 나는 그 애가 날 보러 오는게 마냥 기쁘지도 않았어. 친한 여동생이라고 하니까 선임들은 계속 소개시켜달라고 아우성이지, 나는 나대로 마음정리해보려고도 했던거였는데 오히려 내 마음은 더 커지기만 하는거야. 그 애가 나때문에 그 먼거리를 오가는걸 생각하면 괜히 마음도 아프고 신경쓰이니까.
그래서 더이상 오지 말라고 했어. 대학생도 학생이다. 학점관리 중요하다. 학생이 공부에 집중해야지 군인같은거 챙길 시간 없다. 선임들이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힘들어죽겠다. 그러면서.
근데 얘가 뭐라는 줄 알아? 여태까지 내가 자길 그렇게 아껴주고 곁에서 지켜봐주고 챙겨줬듯이 앞으로 자기도 날 그렇게 아껴주고 곁에서 지켜봐주고 챙겨줄거래.
진짜 할 말을 잃었다. 울컥하더라. 그래서 헛소리 그만하고 공부하러 가라고, 나도 주말에 쌓인 일 있어서 그만 들어가봐야된다고 하면서 보냈다. 선임들한테 쿠사리먹고 쳐맞아도 안울었었는데, 그 한마디가 뭐라고 눈시울이 붉어지더라.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쁘고 천사같은 여자애가 있을 수 있나 싶어서. 너무 고마워서.
나중에는 선임들도 더이상 나한테 그 애 소개시켜달라는 말 안하더라. 그리고 그렇게 2년이 지나 난 전역을 하게 됐고, 그날 그 애한테 고백했다. 몇푼 안되는 군인월급 모으고 모아서 마련한 금반지 무릎꿇고 그 애 손에 끼워주면서. 니가 내 군생활동안 그렇게 아껴주고 곁에서 지켜봐주고 챙겨줬듯이 나는 앞으로 평생 널 아껴주고 곁에서 지켜봐주고 챙겨주게 해달라고.
울면서 고맙다고 하더라.
사귀고 딱 1년째 되는 날, 이제는 내 여자친구가 된 그 애의 손을 이끌고 우리집과 그 애 집에 찾아가서 우리의 교제사실을 말씀드렸어.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고.
1년이라는 시간동안 아무도 모르게 준비했던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저축한 통장과, 앞으로의 내 인생계획을 네 분께 말씀드렸고, 정말 감사하게도 네 분 모두 정말 진심으로 기뻐해주시고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네 분 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거 같았다고 하시더라.
우리는 그렇게 양가 부모님께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캠퍼스 커플로 쭉 사귀어오다가 제작년에 결혼식을 올렸고 오늘, 아니 어제구나 이제.
2017년 7월 31일, 나와 내 아내의 사랑의 결실인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10년동안의 우리의 이 긴 인연은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아닌가 싶다.평범하지 않은 사건으로 시작한 우리의 만남은 그 이후 많은 일들을 함께 경험해왔고,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겨왔지만, 결국 그 결실이 이뤄졌어.
이제 내 단 한가지 바람은, 앞으로도 이 행복이 우리 부모님, 장인장모님, 모든 게 다 완벽해서 항상 삶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내 아내와 사랑스러운 내 아들 곁에 함께하며 지켜줬으면 하는 거다.
좌우간, 우리는 행복했고, 행복하며, 행복할 것이다. 우리의 이 행복을 여러분도 모두 함께 향유할 수 있기를.
God bles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