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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저격에 대한 반격

ㄴ생각좀하자 |2017.08.18 01:29
조회 333 |추천 2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연달아 장애인에 대한 안타까운 저격글이 올라오던데 그에 대한 제 생각을 올려봅니다. 또한 이에 대한 다양한 님들의 입장과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럼 렛츠고





며칠 전 우연히 장애인의 결혼에 대한 글을 접했다.

http://pann.nate.com/talk/338335165

대학 때도 장애인의 성에 조금 관심이 있었는데 관심만 있었지 알고자 하는 노력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 실태에 대해 1도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무작정 비난받는 것은 분했다. 하지만 거기에 한 마디의 논리적인 반박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 분했다.

다음날 장애인 관련 글이 또 올라왔다.

http://pann.nate.com/talk/338360590

장애인이 이런 수모를 겪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전에도 이런 글을 보면 ‘어휴 이기적인 놈들’하고 외면하기 일쑤였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는 내 자신이 장애에 대한 개념이 아직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잉여력 대폭발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우선 장애인의 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당연히 장애인도 성적 욕구가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3대 욕구(출처는 알 수 없다.)에도 성욕이 포함된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 안에도 기본적으로 사랑의 욕구가 포함된다. 맹자 친구 고자도 인간의 본성은 식욕과 성욕이라고 하였다. 너무 성욕에 치우친 거 같은데 암튼 장애인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생리적·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심리적 욕구를 가진다. 이런 욕구는 법으로써 보장받는다. 헌법 제 1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기본의 기본의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FKYpZcjcfpM

장애인도 ‘성’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핑크 팰리스’

http://movie.naver.com/movie/mzine/cstory.nhn?nid=1348&page=4

시청각장애인 남편과 척수장애인 부인의 반짝반짝한 사랑을 보여주는 ‘달팽이의 별’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회는 그들이 성적 욕구와 이를 표현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외면하며 더 나아가 억압 또는 통제하고 있다. 이는 그들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고 그들이 혹시라도 가질 아기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의 결혼에 대해서 다른 성적 욕구들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결혼생활을 통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인 임신과 출산, 자녀양육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장애인들의 결혼을 성적 행위에 대한 욕구해소의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최근 사회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서도 장애인만은 배제되고 있다. 오히려 낳지 말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정상’아이 출산에 대한 의문, 효과적인 자녀 양육에 대한 의문, 경제적 부양능력에 대한 의문들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축복은커녕 혐오한다. 하지만 이는 비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비장애인들끼리 결혼하면 장애아동이 나올 가능성은 0인가? 장애인의 부모는 많은 경우 비장애인이다. 또한 비장애인은 효과적으로 자녀를 양육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마지막으로 모든 비장애인은 경제적 부양능력이 있는가? 혹자는 ‘그러니까 비장애인도 아이를 낳지 않잖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 의해 낳으라고 요청받는다. 그럼 그들은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매우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를 많이 낳는 비장애인들은 애국자라고 박수를 받는 요즘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앞에서 말했듯 낳지 말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자신의 기본 권리조차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와 국가를 향해 분노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거나,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고 투명인간이 되어 고립되고 또 고립되어 간다.


아주 많이 양보해서 국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국가는 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해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장애인들은 왜 애를 낳는 거예요?’ 라는 글은 국가의 이념이 사회 전반에 성공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그저 일개 노동자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허위의식이니 헤게모니니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걍 쉽게 말하면 그것은 그저 착각일 뿐이다.

아니 그리고 장애인은 노동자가 될 수 없을까? 이건 비장애인들의 오만한 편견일 뿐이다. 이미 우리사회 다양한 영역에서 장애인들이 일을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 보려 하지 않으니 보이지 않을 뿐이고 위와 같은 편견이 뿌리 깊게 박혀있으니 충분히 노동력을 갖춘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갖지 못할 뿐이다. 아니 그리고 장애인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것은 장애인을 가르치는 교사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휠체어를 만드는 사람도 장애인 덕에 먹고 사는 거고 음식, 옷, 물품 등을 장애인도 소비해줌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가 먹고 사는 거다. 또한 장애인 덕에 일상에서 도움 받는 것도 많다. 예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길바닥의 노란 유도블록을 들 수 있다. 스좀비들도 그 덕분에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서도 길을 다니고 횡단보도에서 안전하게 멈춰 선다. 그리고 요새 내가 제일 갖고 싶은 ‘크레마 사운드’도 활자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내세워 출시되었다. 이것도 시각장애인을 위해 사용되던 기술을 비장애인들에게 적용해서 편히 쓰는 것이다. 음식점에 있는 사진으로 된 메뉴판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유용하다. 당연히 비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유용하다. 또한 이들은 정서적으로도 여러 사람들에게 충만감을 준다(물론 님은 예외일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참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예뻐서 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해준다. 정신의학과를 가면 약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겠지만 이들은 존재 자체로 내 마음을 따숩게 덥혀준다. 이런 걸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장애인은 열등하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나치와 백인 우월주의에 휩싸인 사람들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장애인들 조카 싫지 않냐?’(원제)로 넘어가서, 이 글을 읽어보면 장애인시설에 봉사를 하러 간 고등학생은 그들의 애정 표현에 혐오를 느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 장애인은 욕을 먹어도 싸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선 고등학생이 장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장애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적절한 장애이해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절한 장애이해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교사들의 책임이다. 의무적으로 배정된 장애이해교육 시간에 동영상이나 하나 틀어주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또한 (일반)교사 자체도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아픈 친구니까 네가 참아~”라는 말도 안 되는 대응을 한다. 그 안에서 함께 타협점과 해결방안을 찾아야지 아이들이 서로 상처내고 분노하는 것을 나 몰라라 하고만 있다. 이는 교사의 무지와 귀찮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은 잘못된 교원양성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원양성교육과정에서는 교육대상이 일반학생에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에 다양한 학생 전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소위 ‘보통’아이들만을 위한 교육을 가르친다. 교사가 이럴진대 학생들은 어떻겠는가? 또한 복지관의 경우에는 대부분 사회복지사들이 교사역할을 한다. 솔직히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돈 주면 사는 것과 같다. 사회복지사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인터넷으로 그냥 강의 틀어놓고 대충 2년 보내면 자격증이 나온다. 나라가 돈을 받고 자격을 파는 것이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런 일이 벌어졌을 때 교사가 적절히 개입을 했어야 했다.

장애인도 봉사활동을 온 학생에게 저렇게 해서는 안 됐다. 잘못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교육을 적절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한다고? 그 사람이 알아듣게 교육하는 게 교사의 역할이다. 개별적 특성과 수준과 요구에 맞게 지도를 했으면 과연 저렇게 행동했을까? 저렇게 행동을 했다 손 치더라도 즉각 교사가 개입해서 양측 모두에게 교육을 했어야 바람직하다. 또한 글에서 보면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다 봉사자에게 떠맡겼다. 그 상황에서 교사는 장애인편만 들었다고 한다. 봉사자 입장에서 쓴 글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표면적인 상황으로만 봤을 때 이는 또 교사의 잘못이다. 오히려 봉사자의 불필요한 도움을 제재하고 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도록 지도했어야하는 것이다. 저런 작은 상황들이 모여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피해나 주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장애인의 삶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진짜 사소한 예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지적장애인이 길을 찾거나 무엇을 물어볼 때 낯선 사람과 직접 이야기하도록 지도한다. 처음엔 부끄러움이 많아서 하기 싫어하는가보다 했는데 시켜보니까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분명 학생이 물었는데 대답은 나한테 한다. 학생이 용기내서 “ㅇㅇ역 어디에요?” 라고 물었는데 나를 쳐다보며 “ㅇㅇ역? ㅇㅇ역 말하는 거예요? 이쪽으로 쭉 가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열이면 열 다 그랬다. 그럼 내가 일부러 학생을 다시 쳐다보면서 “우리 어디 가는 거지?”라고 학생과 직접 이야기하도록 유도하면 아무렇지 않게 학생에게 반말을 하거나 명령식으로 알려준다.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은 철저히 무시되고 배제되는 것을 이렇듯 아주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이 나빠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부정적 시선이 이토록 만연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장애인은 아무 것도 못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1+1은 하지 못해도 수영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 (수영 잘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그럼 수많은 수영선수들의 가치는 무엇인가?) 전구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해를 못해도(나도 모른다) 교통수단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저 멀리 유럽철도의 역사에 대해서도 줄줄 외고 있다(이것 또한 나는 모른다). 이렇게 각자의 강점이 누구에게나 있다. 개개인의 이러한 강점을 찾아내어 적절히 교육하고 열매를 맺어 사회에 기여하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지만, 교사들이 그 역할을 잘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괜한 장애인들만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이에는 또 다양한 원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만 그 끝엔 사회와 국가가 있다.


장애라는 개념은 사회가 만든 개념이다. 엄마 뱃속에서 장애인 딱지를 붙이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 보통의 사람들이 편하게 살도록 만들어진 세상에서 불편한 사람들이 장애인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세상 사는데 불편함이 없으면 장애인이 아니다. 자폐가 있어 가끔 박수치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사회가 그 행동을 용인한다면 장애인이 아니다. 모든 건물에 턱이 없어 휠체어로도 문제없이 다닐 수 있다면 장애인이 아니란 말이다. 사회가 장애를 만든다는 것에 마땅히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장애인 앞에서 고작 비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리를 쳐들고 우월한 지위를 느낄 때가 아니다. 한 발 자전거, 두 발 자전거, 세 발 자전거, 네 발 자전거, 브레이크가 있는 것, 브레이크가 없는 것, 앞바퀴는 크고 뒷바퀴는 작은 것, 앞바퀴는 작고 뒷바퀴는 큰 것, 둘 다 큰 것, 둘 다 작은 것 모두가 다 자전거이듯이, 손가락이 3개인 사람, 눈이 안 보이는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귀가 없는 사람, 마구 박수를 치는 사람, 온 신경이 마비된 사람 모두가 다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모두가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는 양질의 교육이 필요하다. 시민을 위한 장애이해교육, 전문인력을 위한 보수교육, 양성교육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교육 모두 중요하다. 그 중 여기서는 장애인 평생교육에 대해 말을 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에게 학령기란 황금기와 같다. 모든 서비스와 혜택이 학령기에 집중된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면 케이크 자르듯 사회에서 단절되어 버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이전의 교육받은 것을 가지고 살아내야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참여한 성인장애인의 85%가 평생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생의 발달 단계마다 발달 과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장애인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겁다. 마땅히 도움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2014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1년 장애인 실태조사)

학력보완 교육 0.3 (0.2)
성인 기초 및 문자해독 교육 0.4 (0.2)
직업능력 향상교육 1.4(1.4)
인문교양교육 0.8 (0.8)
문화`체육`예술교육 2.6 (2.1)
시민참여 교육 0.3 (0.3)

%의 사람들이 평생교육에 참여했다고 한다.
위의 6가지 중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97.4% 이상이다.


++
장애인들은 ‘장애인’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발끈해서 오바한다는 댓글이 많다.
장애인은 소수집단이다.
따라서 그러한 댓글은 소수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이름으로 치환해서 읽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너네반 애들은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지냐?’ 라고 했을 때 모두가 분노한 것은 그 발언 자체가 우리반 모두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한 사람은 ‘다 그런 건 아니지~ 나도 알아~’라고 하지만 듣는 사람은 ‘너네’ 대신 ‘너’로 들린다. 예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더 오바하자면, 네이버 메인 뉴스에 ‘ㅇㅇ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애 왜 낳냐? 그런 아파트 살면서도 애가 갖고 싶냐?’ 라든지 ‘ㅇㅇ대학교 ㅇㅇ과 애들은 그것도 얼굴이라고 들고 다니냐?’라고 올라왔다 치자. 발끈 안 할 사람 있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내가 아무리 돈이 있어도(없다) 외모가 출중해도(후) 저건 나한테 하는 소리로 들리게 된다.

대리사회에서 김민섭은 아주 우아한 언어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필력이 아주 존경스럽다.
“그러고 보면 을의 자리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좀’이라는 부사 하나로도 나는 오만 가지 상상을 했다. 많이, 적당히, 조금, 이런 모호한 부사들은 듣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별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 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 쉼표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그렇게 조심을 해야겠다. 의미 없는 단어로, 몸짓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
암튼 위의 글들은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고 실행하지 못하는 사회와 국가를 향해, 그러한 사회에서 침묵하는 자신을 향해 비판하는 게 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당신도 잠재적 장애인이니 예비 장애인이니 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네 가족이 장애인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고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것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줄 수 없겠느냐는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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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보건복지부
성인장애인의 평생교육에 관한 욕구분석-장미숙
생활시설 지적장애인의 성에 대한 생활재활교사들의 태도에 관한 연구-권재운
직접 인용은 이거뿐인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 문제 있는 거 발견 시 알려주소서
추천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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