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고있었던 일기장을 펼쳤다. 아니 차마 열 수 없었던 나의 흔적을 펼쳐봤다. 앞선 페이지엔 반사되지 않는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너를 이해해보려 했던 나의 노력이, 너를 욕하며 헤어지라했던 내 사람들에게 되려 화를 냈던 나의 어리석음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상처도 사랑이고 그것도 추억이라며 곱씹고 되뇌인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아직도 혼자 보내는 밤이면 너의 하루를 궁금해한다. 찢어버리고 태워버리고 싶은 일기장을 빠르게 넘기고 펜을 잡는다. 이렇게 글이라도 써야 내 마음이 정리될 듯 하다.
길지 않던 우리의 시간이 그나마 다행이라며 내 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걔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냐는 친구들의 말은, 내게서 그를 멀어지게 하지 않고 그들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너의 연락을 기다리며 잠들지 못한 무수한 밤들에 넌, 내겐 알려주지 않은 또 하나의 핸드폰을 들고 화려한 클럽에서 수많은 여자들의 번호를 채워넣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나날들이 얼마나 아팠는지, 이런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오히려 아프지도 않았다. 너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너를 보호하던 나도 사실은 다 짐작하고 있었나보다. 차라리 그 여자들처럼 이틀 사흘 연락하고 말지 그랬니. 그럼 나는 그저 한여름밤의 꿈이었구나 하고 쉽게 일상으로 돌아왔을텐데.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여자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기에, 너의 연락만을 하루종일 기다리는 집착하는 여자가 아니고 싶었기에 나는 열 번, 스무 번을 고민해야 너에게 한 번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넌 내게 항상 일이 바쁘다고 했었고 피곤하다고 했었다. 건강하지 않은 연애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너의 말을 너무나도 믿고 너의 삶을 존중했기에 내 전화 한 통이 네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몇 시간, 어쩌면 하루이틀 넘게 카톡을 읽지도 않는 너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혼자 합리화하기도 했다. 연애가 처음이라는 말에 여자문제는 의심해 볼 생각도 안했다. 그저 연애가 서투른 아이구나. 넌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일에 대한 열정이 크구나. 내 모습이 한심할 정도야. 그러나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고,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도 내 번호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핸드폰을 뒤집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넌 친구들과 계속 수다를 떨었겠지. 나는 어리석게도 너의 그런 삶을 의심하지도 못하고, 무슨 일이 생긴걸까 걱정만 했다.
그렇게 연락 한 번 하기가 힘들다가도 그나마 여자친구라고 5분, 10분 얼굴보러 집 앞에 와주면 그 잠깐 동안의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이 너무나 자상해서, 나를 안심시키는 너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달콤해서 나는 그저 그것에 만족하고 말았다. 아 얘가 날 사랑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수개월의 시간 동안 너를 바라보며 나는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모두 잊어버린 한심한 여자가 돼버렸고, 내게 다가와준 생각보다 많은 좋은 사람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너는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내게서 사라졌고, 말로만 듣던 최악의 이별은 내 이야기가 됐다.
이미 네 주변 사람들은 너가 그런 사람인걸 다 알고 있더라. 너가 너의 사람을 소개해주면 다들 널 믿지 말라는 말 뿐이었으니. 그들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바보같이 난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내가 아직 더 많이 좋아하니까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다고. 그리고 너가 내게 생각보다 잘 해준다고. 걱정도 많이해주고 표현도 많이 해준다고. 아직 철이 없어서 잠깐 방황하는 걸꺼라고. 그리고 그들은 내게 말했다. 넌 단 한 번도 나랑 사귄다 생각도 하지 않았을거라고
그 이후로 너는 흔적없이 사라졌고 나도 굳이 연락해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려 하는데 난 더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른은 언제 되는 걸까. 사랑은 언제쯤 쉬워지는 걸까.
넌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한다.
너에겐 아무 존재도 아니었던 사람이 혼자 이렇게 사랑하고 혼자 힘들어하는걸 들키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