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07월 24일 출생지 서울.
나는 서울의 어느 천주교 입양기관으로 입양 되었습니다.
당시 이름은 “남 OO“ 이였고, 현재 이름은 “윤 OO“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게된것은 불과 이틀 전 입니다.
우리집 식구들은 천주교 신자 입니다.
길러주신 엄마는 올해 60세, 아빠는 곧 70세 이십니다.
1991년, 아버지가 40세가 되시던 해에 저를 입양하여 키우셨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엄마,아빠,나. 이렇게 다섯식구가 함께 한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전공하였습니다.
4살 때 아버지가 미술학원을 보냈는데 제가 적응하지 못해서 피아노학원을 데리고 갔더니, 제가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가 바로 피아노를 사주셨습니다. 그 피아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보물이 되었고 지금도 제 방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엄마는 뇌병변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으셨고, 어렸을때부터 다리가 좋지 않아 소아마비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늦은나이에 결혼을 하시고,(1982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는 글을 적어가며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짧은 가족소개였고, 지금부터 저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4살때부터 초등학교6학년때까지 엄마에게 아동학대를 당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침 7시30분에 출근을 하시고 나면 저는 엄마에게 맞을 것 같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시달렸습니다. 사실 4살부터 6살까지의 기억은 많이 흐릿하지만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7살부터 현재까지의 기억들은 생생 합니다.
1. 유치원을 가기 전, 성서(성경) 를 입으로 소리내어 읽지 않는다며 엄마가 안방문을 걸어 잠구고 파리채와 손으로 저를 마구 때렸고 책 모서리로 머리를 찍기도 했습니다.
2. 식탁에서 반찬투정을 하여 엄마가 부엌에서 칼질을 하다가 칼을 들고 제게 야단을 치시며 빨리 안먹냐며 흉기로 위협하고 식탁 의자를 들어 저에게 던지거나 의자 다리를 제 몸쪽을 향해 들어 찌르곤 했습니다. 김치가 먹기 싫어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면 버릇이 더럽다며 밥을 뺏어버리고 김치만 먹게 했습니다.
3. 유치원을 마치고 피아노학원에 갔는데 바닥에 앉아있는 채로 바지에 대변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않고 그대로 집으로 갔습니다. 엄마에게 또 맞을까봐 두려워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엄마와 할머니가 냄새를 맡으시고 바지를 강제로 벗겨 확인을 했습니다. 엄마가 파리채를 들고 나의 온 몸을 때리고 손으로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옷과 속옷이 다 벗겨진 나체의 상태로 거실 베란다 창고에 갇혔습니다.
얼마나 갇혀있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꽤 오랜시간을 갇혀있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리고 잘못했다고 애원했지만 엄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창고는 문에 세줄로 틈이 있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감옥처럼 바깥 빛이 미세하게 들어오는 정도 였습니다. 빛이 들어오는데도 너무 어두웠고 바퀴벌레가 나올까봐 무서웠고 겁이 났습니다. 그 이후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창고에 갇히는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제일 잔인하고 무서웠던 기억 입니다.
4. 초등학교 1학년, 저는 긴 생머리 였습니다.
파마를 하러가자는 엄마 말씀에, 저는 하기 싫다고 했다가 엄마가 손으로 제 온 몸을 꼬집으며 마구 때렸습니다. 제가 맞을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싹싹 빌며 “잘못했어요” 라고 하면 엄마는 그때마다 항상 “닥쳐“ 라고 말을 했습니다. 제가사는 집이 7층이였는데 항상 맞을때마다 제가 소리를 질러서 아파트 주민들이 제가 맞는 것을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어울려 놀던 친구 동생들이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창피했고 죽고싶었습니다.
5. 초등학교 1~2학년 때쯤, 엄마와 손을 잡고 병원을 걸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 제 속마음은 이렇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엄마가 제게 따뜻한 관심과 걱정을 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애가 왜이러냐며 소리를 지르며 어서 일어나라고 팔을 잡아당기고 때리려고 했습니다.
6. 같은 해, 엄마랑 길을 걸어가다가 작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초보운전자가 제 뒤에서 천천히 오다가 제 왼쪽 다리를 밟고 지나갔습니다. 다행히 뼈에 무리도 없고 무거운 것이 내 다리를 지나갔다 라는 정도의 느낌 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심하지 못해 다친 이유로 엄마에게 야단을 맞을까봐 아프지 않다며 집으로 가길 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제 다리를 보시며 걱정하시면서 병원을 가자고 하셨는데, 그때 많이 행복했습니다.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해주셔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때의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와 무릎이 많이 아팠고 성장통도 심해졌나 봅니다. 그 상처는 지금 아주 희미하게 바퀴자국이 보일 듯 말 듯 남아 있습니다.
7. 초등학교 3학년, 저는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의 생활기록부를 훔쳐 집에 숨겼습니다. 한 장씩 넘겨가며 내가 싫어하는 아이들의 기록부에 낙서를 하고 욕을 적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던 다른 친구가 담임 선생님께 말했고 저는 교실에 남아 꿇어앉은채로 담임 선생님께 나무로 된 몽둥이로 팔뚝,손바닥,손등,허벅지,등,머리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에 도착하셨고 저를 보며 소리를 지르시며 죽어버리라며 제 팔을 붙잡고 팔이 돌아가고 어깨가 빠질 듯이 마구 비틀어버렸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시며 엄마를 말리셨지만 엄마는 계속해서 제 팔을 비틀었습니다. 손등에 엄마의 손톱자국이 생겨 피가 났고, 담임선생님은 그 상처를 보며 선생님이 때려서 그런줄 알고 제 손을 어루만지며 미안한 내색을 하셨습니다. 엄마는 화가난 상태로 저를 집으로 데리고 갔고, 저는 안방에서 문이 잠긴채로 엄마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안방에 피아노가 있었는데, 피아노 위에 있던 깡통을 집어들고 제 머리 정수리를 마구 찍어내렸습니다. 저는 두 손을 싹싹빌며 잘못했어요 라고 울면서 외쳤습니다. 엄마는 “닥쳐” 라고 하시며 계속하여 구타를 했습니다.
8. 제가 컴퓨터 게임을 워낙 좋아해서 아버지가 밤 늦게 컴퓨터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실로 컴퓨터를 옮겼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분리수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게임이 더 하고 싶어서 “이것만 하고요” 라고 말을 했다가, 엄마가 말대답을 한다며 깡통과 병이 들어있는 분리수거통을 집어들고 제게 던지며 어디서 말대꾸를 하냐며 마구 때렸습니다. 이렇게 말을 듣지 않거나 조금의 반항이라도 하면 저는 30분가량 구타를 당하는것이 기본이였습니다.
9. 이런 구타는 집에서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피아노학원을 다닐 때 원장 선생님이 저를 많이 때리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아노 실력이 남들보다 뛰어났기에 더 성장하라는 의미로 많이 혼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저는 집에서 엄마에게 많이 맞았기 때문에, 맞는게 너무 싫었습니다. 집에서도 맞고 학원에서도 맞고 학교에서도 맞았습니다. 엄마에게 너무 많이 맞으며 특히 팔은 꼬집었고 머리와 얼굴은 손으로 사정없이 후려쳤고 쪼그려앉아 싹싹빌면 발로 밟아버릴때도 있었습니다. 제 몸은 항상 시퍼런 멍 투성이였습니다. 한 여름에 반팔 반바지를 입으면 피멍이 보일까봐 부끄러워서 긴팔 긴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저는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다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담임 선생님도 제가 더럽다며 손가락질 하셨고 선생님도 반친구들에게 저와 이야기를 하지마라고 왕따를 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학교생활은 부모님이 여태 모르셨습니다.
10.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이 올라갈때까지 쉴 틈 없이 엄마에게 이유없는 구타를 당하였고 아버지는 당연히 훈육 차원에서 엄마가 매를 든것으로만 판단 하셨기에, 엄마에게 때리지말아라. 나중에 더 크면 큰 몽둥이로 때릴것이냐. 하며 타이르는 정도만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저는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럴때마다 엄마가 때리면 예전처럼 두손을 싹싹 빌며 잘못했어요 라고 하지 않고 미친사람 마냥 소리를 있는 힘껏 지르며 방어 했습니다. 같은 해, 학교에서 5학년 후배를 괴롭히고 손지검을 하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 사실이 학교에 밝혀지고 엄마아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학교에 찾아와 사과를 하시고, 그 후배의 집으로 엄마와 함께 찾아가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엄마가 옆에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 모습이 증오스러웠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저녁식사를 다 하시고 안방에 저를 불러 파리채로 발바닥을 때리셨습니다. 맞는 것은 죽도록 싫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맞았습니다. 아버지의 야단은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제가 잘못해서 맞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서운함은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많이 맞으며 자라왔는데, 아빠는 때리지 말고 말로 타일러주시지.. 하는 그런 서운함 말입니다.
11. 저희집은 할아버지와 부모님과의 다툼이 많았습니다. 물론 할머니와의 다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제는 고모,큰아버지 이렇게 계십니다. 아버지가 어릴적 고생을 많이 하시고 밥을 잘 먹지 못해 몸이 앙상하게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챙기시며 돈을 벌러 나가시고, 큰아빠가 할아버지를 모시지 않아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셨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도 구타를 당했습니다. 다시 초등학교 5학년으로 돌아가, 엄마 아빠가 일본으로 4박5일 정도 여행을 가셨습니다. 저는 자유를 느꼈고 오랜만에 저녁9시까지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저를 찾아 나오셨고, 저는 할아버지에게 맞을까봐 무서워 도망쳐 다니다가 몰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안때릴테니 어여 들어와라 하시며 대문을 열어주셨고, 할머니는 갑자기 구둣주걱으로 저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키도 몸도 자라서인지, 할머니가 힘이 없으셔서인지 많이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맞고있는 그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고 무서워서 또 두손으로 싹싹 빌며 늦게와서 죄송하다며 울고 소리쳤습니다. 부엌 베란다까지 저는 도망쳤고 할머니는 옆에 보이던 나무쟁반으로 제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 너무 아프고 머리가 띵 해서 몇 초간 멍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며칠간 엄마아빠가 올때까지 집에서 꼼짝 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오시던 날, 아빠한테 울면서 할머니에게 맞았다고 말하니, 아빠가 할머니께 가셔서 왜 때렸냐며 소리치셨습니다. 속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했고 아버지가 제 편을 들어주셔서 행복했습니다.
12. 초등학교 6학년, 저는 방 안에서 머리를 자른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서를 썼습니다. 3장가량 썼고 책장 사이에 숨겨둔 기억이 생생합니다. 머리를 자른 것은 자학이였습니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심하게 왔으나 뛰어내리면 아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방에서 툭하면 머리카락을 자르곤 했습니다. 자른 머리카락은 거실 쓰레기통 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아빠가 그것을 보고 제게 관심을 가져줄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중에 아무도 제 머리카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어떠한 질문과 관심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안방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 피아노연습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시끄럽다며 건반위에 제 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아노 뚜껑을 확 닫아버려서 제 손이 끼었습니다.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고 울었지만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부엌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왔을때만 겨우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그 시간이 아버지가 퇴근하신 저녁 시간 이였기 때문에, 6층에 사시는 아줌마가 집으로 자주 찾아와 시끄럽다고 불평을 하시곤 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였고 낙이였던 피아노도 결국 엄마 눈치를 보며 조심히 연습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피아노를 칠 때 제일 행복해 하셨는데 말입니다..
12. 중학생이 되고, 저는 사춘기가 심하게 왔고 집이 싫고 엄마가 싫어서 가출을 밥먹듯이 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와 후배들을 이잡듯이 잡으며 툭 하면 폭행을 일삼고, 돈을 빼앗고 숙제를 대신 시키고 협박하고 약한 친구들 사이에서 무서운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아빠와 말을 하지 않거나, 집에 아예 들어가지 않고 친구집에서 외박 하기를 반복했고, 엄마 지갑에서 돈을 빼가는가 하면, 사진앨범에 들어있는 엄마의 사진을 칼로 찢기도 하고, 엄마를 죽이는 상상과 꿈도 많이 꾸었습니다. 아버지는 사고치고 다니고 가출을 일삼는 저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셨고 밤낮 없이 저를 찾아 헤매셨습니다. 그러한 반항심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고. 아버지는 지쳐갔지만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의 학대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없어졌습니다.)
13. 저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1년 쉬다가 타지역에 있는 학교를 복학했습니다. 2시간가량 되는 너무 먼 거리라서 아버지가 새벽5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시고, 항상 자가용으로 태워주시고 학교 끝날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다주는것만 3년을 하셨습니다. 학교에 빠진적도 많고, 아빠엄마와 계속해서 다툼이 있었지만 저는 다행히 고등학교 졸업을 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중간에 엄마에게 소리를 지른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에게 그동안 쌓인 감정들과, 어렸을 때 받았던 학대에 대해 물었습니다. 엄마는 제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하시며 눈물을 보이셨고, 그때 저는 엄마를 용서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14. 저는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웠고, 아버지가 대학교도 보내주셨습니다. 동갑친구들보다 조금 늦은 1년 뒤, 대학을 들어갔고 피아노과를 들어가 본격적으로 전공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취도 허락해주셔서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냈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저는 방황했습니다. 어느날은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놀다가 학교를 빠지는가 하면, 또 어떤날은 학교 연습실에 가서 10시간동안 피아노를 친적도 있습니다. 제 대학생활은 이렇게 왔다갔다 하며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실기점수가 매우 좋았으나 이론점수가 너무 낮아 졸업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다른 대학교로 편입을 권유 하시고 편입준비를 하고, 편입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돈이 문제였습니다. 돈을 주면 레슨을 해주고, 돈을 주지 않으면 레슨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갑질이 너무 싫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게 너무 죄송했음에도 저는 알바를 시작하지 않아서 아버지께 용돈과 학비를 받아가며 생활 했습니다. 하지만 레슨은 다른 학생들보다 적게 받았고, 이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면 마음아프실까봐 숨기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15. 부전공으로 보컬을 배웠습니다. 그때부터 노래에 대한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맨날 노래방을 가고, 녹음용 마이크를 사서 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녹음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고, 매일매일 인터넷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 노래파일을 올리고 인터넷에서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결국 대학졸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제가 학사모를 쓰고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는것이라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저는 그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때 제 나이는 24살 이였 습니다.
16. 피아노와 벽을 쌓아가고 25살 26살, 여전히 인터넷에서 노래를 불러 영상을 올리고 음원을 올리며, 인터넷 사람들에게 아주 작게나마 소소하게 네임드를 알리며 음악생활을 하였습니다. 2015년,(26세)에는 다시 부산에서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독립하겠다고 내 손으로 돈을 벌겠다고 다짐을 하고 시작한 생활 이였습니다. 연봉 4천 이라는 큰 돈을 벌었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돈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지금 제게 없습니다. 친구에게 보증을 쓰고, 사기를 당하고, 한달에 100만원 넘게 나가는 생활에 지쳐 너무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고 결국, 저는 자취 2년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아버지에게 보증 사실과 그동안 힘든 생활고를 다 이야기 했습니다.
17. 현재 2017년 제 나이는 28살입니다. 여전히 인터넷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고, 최근에는 장애인 봉사도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제가 음악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이 찾아가며 하고 있는데, 아직 아버지는 제가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으시길 원하십니다. 피아노도 다시 치고 싶은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겨 다시 시작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 나이 28살이 되어서도 엄마와 자주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아빠에게 꾸중을 들을때면 항상 엄마가 제가 없는 사이, 아빠께 저의 안좋은 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믿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면, 제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며 하소연을 하시고, 제가 싫다는 티를 정말 많이 내셨습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 없어 자주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습니다.
18. 사실, 어렸을적부터 엄마에게 학대를 당할 때 마다 우리엄마가 생모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아빠 결혼앨범을 보며, 엄마가 임신했을때의 사진은 없을까? 하며 사진을 뒤져보기도 하고, 유전자검사를 어떻게 하는것인지 인터넷에 쳐보기도 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엄마에게 가끔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엄마, 나 낳았을 때 아팠어?” “엄마, 나 어디서 낳았어?” “엄마, 동생은 왜 안낳았어?” 라고..
부모님과 함께 드라마나 뉴스를 보다가 친부모 양부모 관련 기사나 장면이 나오면, 가끔 이런 이야기도 던져봤습니다. “나는, 절대 엄마아빠 버리지 않을거야. 양로원에 보내지 않고 영원히 같이 살거야. 나는 드라마처럼 엄마가 두명이 되더라도 집을 뛰쳐나가지 않을 거야”
사실, 엄마에 대한 존재 의심이 갈수록 심하게 들어서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혹여나 내 엄마가 생모가 아니더라도,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되더라도 아빠가 안심하실 수 있도록 던진 말들이였습니다.
19. 2017년 9월 11일 월요일.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에 저는 또 한 번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집 옥상에 올라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올라오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왜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지, 왜 엄마가 아빠와 나 사이에 자꾸 이간질을 시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아직도 엄마한테 받은 상처가 이렇게 큰데, 엄마가 얼마 전 나를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는데, 나는 그게 진심이라고 믿었는데 아니였어. 아빠. 엄마 내 생모 맞아? 대답해줘. 맞다고 해도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집 뛰쳐나가거나 그러지 않을게. 나 28살이야 이해할 수 있어. 아빠한테서 사실을 듣고싶어”
아빠가 제 손을 잡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씀하셨습니다
“OO아.. 사실 너를 입양해서 키웠다”
그리고 아버지는 입양 당시 기억들을 토대로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생모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나의 생부가 도망가버린 바람에 생모의 어머니(외할머니)가 서울 어느 천주교 입양기관에 저를 데려다 놨고, 91년 겨울에 지금의 아버지 품으로 안긴 것 까지...
어렸을때부터 쭉 의심은 해왔지만, 아버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입이 벌어진 상태로 말이 나오지 않고 심장과 신경기능이 모두 멈춘 것 마냥 저는 얼음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오다가도 멈추고, 오열하는 소리가 나오다가도 멈추고, 이 상황이 꿈인지 의심이 들고, 믿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빠의 피가 아니라니, 엄마가 나를 낳아주셨기에 그토록 나를 아껴주지 않았던 엄마를 용서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니, A형인줄로만 알았던 우리아빠가 B형이라니.. 내 이름이 “윤” 씨가 아니고 “남" 씨 이였다니...
하늘을 원망했고 엄마를 원망했고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왜 나를 낳아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살게 했는지.. 하지만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할때마다 아버지가 주신 그 사랑으로 제가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제가 엄마에게 그동안 학대를 당했을 당시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다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제게 계속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다가 엄마아빠가 잠든 새벽, 다락방에 올라가 가족사진 앨범을 들고와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보았습니다. 저의 돌 사진이 있었는데 엄마,아빠, 할아버지와 함께 찍힌 사진 이였습니다. 제 옆에는 엄마와 아빠가 있었고 다시 유심히 보니 저는 하나도 닮은구석이 없었습니다. 내가 가장 슬프고 원망스러운 이유는, 생모가 나를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내게 말해준 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고 슬프고 괴로우셨을지, 그 아픔의 크기를 감히 상상할 수 없어서 더욱 더 슬펐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서 아빠의 피가 없다는 사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낳은정 보다 키운정이 더 크다고 하여 저는 점점 자라면서 아빠와 많이 닮아갔습니다. 성격도, 이목구비도, 음악적 재능도, 지식도, 하지만..
제 몸에서 아빠의 피는 흐르고 있지 않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망스러운건 엄마였습니다. 그날 새벽, 저는 안방에 들어가 자고있는 엄마를 깨워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엄마 친 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때렸어? 배아파 낳은자식이 아니라서 나를 그렇게 막대했어? 이유가 뭐야? 차라리 그 이유라고 말해줘, 다른 말도 안되는 이유 말하지말고 차라리 그 이유라고 말해줘, 왜 나를 그렇게 때렸어?”
엄마는 아무말도 없으셨고 옆에 있던 아버지도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계셨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눈물로 지새우다가 아버지가 알려주신 제 입양기관을 인터넷에 검색하여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남겼습니다. 생모를 찾아달라는 글을 썼고, 그날 오후, 입양기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입양되던 당시 이름의 기록과, 제 생모의 기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제서야 제가 정말 입양아가 맞다는 사실을 실감 했습니다.
저는 생모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단지 나를 낳아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를 뱃속에서 지우지 않고 왜 낳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생겼을지, 살아계신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생모 기록과 정보를 알려면 직접 기관에 찾아가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고, 아버지는 흔쾌히 입양기관에 같이 가주시겠다고 동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데리고 오던 날, 하느님께 서약을 했다고, “잘 키우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잘 키우지 못해 속상하다며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중학생 시절, 내가 방황을 할 때마다 제 입양사실을 알고 있던 아버지 지인분들은 입양한 것을 밝히고 내쫓아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저를 끝까지 사람 만들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당시 다니던 성당 수녀님께서도 아버지께 포기하지 말라고 일러주셨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헛되게 살아온 제 인생이 너무나 후회스러웠고 자괴감이 들었고 아버지께 너무 죄송해서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안아줄 수 조차 없었습니다.
10월, 입양기관을 가는 날입니다.
생모의 생사여부만이라도 알고 싶고,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만나보고도 싶습니다.
저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서러움과 미움과 슬픔은 아직 제 마음속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엄마가 마음을 열어 제게 다가와 진심으로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만 해주면 마음을 열 수 있는데, 엄마의 말 한마디들이 아직까지 가시처럼 뾰족하고 아프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나날들입니다.
나는, 길러주신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딸 입니다.
비록 피붙이는 아니지만, 피붙이보다 더 진하고 더 소중한 딸입니다.
생모를 찾게 되더라도 저는 영원히 엄마아빠 딸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생모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이 말을 꼭 전해야 합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이렇게 사랑받고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죽이지 않고 세상의 빛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나를 길러주신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도 없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려 합니다. 비록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나를 아프게 했던 엄마이지만, 어쩌면 나는 엄마를 마음속으로 이미 용서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일지도,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합니다. 아빠를 사랑합니다.
나는 아빠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 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