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좋아하지않는분은 지루함주의.
세비야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과 '콘베르소'는 대성당에 반드시 출두해야 한다. 페르디난드 5세 국왕 폐하와 이사벨라 여왕 폐하께서 교황의 승인을 받아 윤허하신 종교재판을 통해 가톨릭 신앙이 돈독한지를 확인받아야 한다. 불참하는 유대인, 콘베르소는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스페인을 떠나야 하거나 사형당할 수도 있다.'
'북풍의 신' 보레아스의 심술이 어느 해보다 극심했던 1480년 12월 겨울 어느날이었다. 유대인 쇼샨 가문의 맏어른이었던 디에고 데 쇼샨은 아도바 가문을 이끄는 페드로 아도바와 함께 세비야 유대인 공동 주거지인 '유데리아' 입구에 붙은 방을 보고 있었다. 세비야 지역의 가톨릭을 이끄는 산 파블로 도미니카 수도원의 알폰소 데 호헤다 원장이 붙인 글이었다.
"아도바 씨, 피바람이 불 날이 멀지 않았군요. 큰일입니다."
발걸음을 돌려 유데리아 안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들의 어깨에는 아틀라스가 메고 있는 하늘만큼의 부담이 지워져 있었고, 가슴에는 독수리에게 매일 심장을 파먹히는 프로메테우스만큼의 고통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들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발을 천천히 옮겨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시나고그로 걸어갔다. 저기 멀리서 시나고그 문 앞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쇼샨과 아도바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시나고그 출입문을 굳게 잠궜다. 모든 창문도 다 닫아버렸다. 출입문 앞에는 젊은 청년 여러 명이 서서 혹시 누가 시나고그 안을 엿보지는 않는지 지키고 있었다. 쇼샨은 시나고그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죽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우려하던 일이 생겼습니다. 가톨릭 교회 측에서 종교재판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모든 유대인, 콘베르소는 꼭 참석해야 한답니다."
시나고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의자에 앉은 채 머리를 푹 숙여 두 손으로 감싼 채 아~ 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벽을 치며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때, 맨 앞 줄에 앉아 조용히 있던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두 갈래라오. 쫓겨나거나 죽든지, 아니면 싸우든지…."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앞으로 몰려와 그 노인의 입을 쳐다봤다. 세비야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야후다였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젊은이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묘수를 제안해 '지혜 주머니'라는 평판을 듣는 최고의 원로였다.
"세비야 가톨릭 신도들이 모두 다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일부는 오히려 우리와 공존하기를 바라고 있으면서도 강경파들의 기세에 눌려 목소리를 못내고 있을 뿐이지. 만약 우리가 일부 강경파들만 제거한다면 문제는 생각 외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도 있지 않겠소?"
"만약 실패할 경우 엄청난 폭풍우가 몰려오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우리는 죽게 돼 있지 않은가?"
쇼샨과 아도바는 야후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을 무장시켜 세비야 가톨릭계 중에서 가장 반유대적인 가문의 지도자 일부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에는 가톨릭 온건파들에게 가서 무릎을 꿇기로 했다. 그들이 제거하기로 한 사람들은 세비야의 전통적 귀족인 구스만 가문의 몇몇과 호헤다 원장 등이었다. 거사일은 다음날 저녁으로 잡았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5세기 무렵 스페인에 처음 발을 디뎠다. 초창기에는 특별한 종교가 없던 현지인들과 마찰없이 무난하게 지냈지만, 서고트족이 스페인을 점령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서고트족은 가톨릭 교회와 손을 잡고 유대인들을 탄압했다.
그러던 중 7세기 무렵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다. 유대인들은 탄압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이슬람 군대의 진격을 돕는가 하면 이슬람 역대 왕조 밑에서 일하면서 스페인 통치를 지원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의 행동에 격분하고 있던 스페인의 가톨릭계 국민들은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를 계기로 보복에 나섰다. 레콩키스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슬람 세력을 거의 몰아낸 14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유대인 박해를 시작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해 생존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들을 콘베르소라고 불렀다.
일부 지역에서는 가톨릭계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유대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세비야에서도 1391년 4월 가톨릭계 군인, 선원 들이 일으킨 폭동 때문에 지역 유대인 4000여 명이 숨지기도 했다. 폭도들은 유대인들을 납치해 아랍 등에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가톨릭의 박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종교재판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일일이 심판하기 시작했다. 세비야의 유데리아 입구에 나붙은 방도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비야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과달키비르 강은 평소처럼 느긋하게 흐르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어서인지 낮인데도 강변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강변 한쪽에 서 있는 '황금의 탑' 인근 강둑에 두 연인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이제 겨우 16~17세는 됐을까. 금발 머리에 각종 장식이 달린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두 연인의 얼굴에는 아직 앳된 기색이 역력했다.